[책을 읽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by 박민규
가볍다! 즐겁다! 그러면 안돼?
명성은 익히 들어왔으나 접할 길이 없었던 책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드디어 읽었다. 왜 이제야 읽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재미있고 강렬했다.
일단 책의 어조 자체가 무척 가볍다. 말장난 같기도 하고, 헛소리 같기도 한데, 그걸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재밌다. 한 장 걸러 한번씩 피식피식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렇게 가볍고 유쾌한 책이라니! 처음 나왔을 때 정말 모든 이의 주목을 확 끌었을 것 같다.
책에서는 야구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특히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팀은 들어본 적도 없고, 야구에 대해서도 그저 수박 겉핥기 정도로만 알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려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이 책은 야구에 대한 이야기이기는 하나, 그보다는 삶에 대한 이야기,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두가 일류가 되고자 하고, 프로가 되려할 때 잠깐만, 삶에는 그거 말고도 뭔가 더 있지 않아? 하고 소매를 붙드는 이야기다.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든 생각.
- 아, 진짜 글 잘쓴다. 이렇게 가볍고 유쾌한 글 오랜만이다. (김영하의 단편 "옥수수와 나"가 떠올랐다)
-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프로는 아름답다. 이런 말을 들으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아름답기는 개뿔.
- 책이 출간된 건 어언 15,6년 전.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젊은 나에게 좀더 위안이 됐을 거 같다.
- 물론 지금 읽어도 충분히 위안이 된다. 재미도 있고.
- 그런데 2,30대에 이렇게 사는 것과 달리 40대 이후에 이렇게 사는 것은 더 큰 용기가 필요할 거 같다.
- 이제 용기만 내면 된다. 용기만.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시다면, 책을 읽어보시라.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줄
1.
아무리 봐도 3위와 4위가 그럭저럭 평범한 삶처럼 보이고 6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하위의 삶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꽤 이상한 일이긴 해도 원래 프로의 세계는 이런 것이라고 하니까. (p. 127)
2.
“처음 널 봤을 떄 …… 내 느낌이 어땠는지 말해줄까?”
“어땠는데?”
“9회 말 투 아웃에서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상황을 맞이한 타자 같았어.”
“뭐가?”
“너 4년 내내 그렇게 살았지? 내 느낌이 맞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들어온 공,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했겠지? 삼진이다, 끝장이다, 라고!”
“……”
“바보야, 그건 볼이었어!”
“볼?”
“투 스트라이크 포 볼! 그러니 진루해!”
“진루라니?”
“이젠 1루로 나가서 쉬란 말이야…… 쉬고, 자고, 뒹굴고, 놀란 말이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 – 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 (p. 235)
3.
그 <자신의 야구>가 뭔데?
그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야. 그것이 바로 삼미가 완성한 <자신의 야구>지.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 – 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야.
뭐야, 너무 쉽잖아?
틀렸어! 그건 그래서 가장 힘든 <야구>야. 이 <프로의 세계>에서 가장 하기 힘든 <야구>인 것이지. 왜? 이 세계는 언제나 선수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야. 어이, 잘하는데.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누군 이번에 어떤 팀으로 옮겨갔대. 연봉이 얼마래. 열심히 해. 넌 연봉이 얼마지? 아냐, 넌 할 수 있어. 그걸 놓치다니! 방출된 사람들이 뭘 하며 사는지 아니? 넌 주무기가 뭐야? 도루해, 도루! 이봐, 팀을 위해 사생활을 포기하는 건 당연하잖아! 밤중에 연습이라, 보기 좋은데! 다음달까지 타율을 2푼만 끌어올린다. 왜, 그것도 힘들 것 같아? 좋아, 잘하고 있어. 넌 어디 출신이야? 더 열심히 해! 오늘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뛰어!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이봐, 뭘 생각해? 생각할 시간 있으면 뛰어 병신아! 훈련 시간에 늦지 마. 연봉이 아깝다, 연봉이 아까워. 이봐, 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네가 그러고도 프로야? 응? 너 이 세계가 얼마나 냉정한지 모르지? 너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지 모르지? 맛 좀 볼래? 한눈팔지 마! 언제 공이 올지 모르잖아! 몸을 날려! 날리란 말이야! 이봐, 기왕이면 멋지게 살아야지. 안 그래? 이 악물고 해봐. 뭐? 맘대로 해. 너 아님 뛸 선수가 없을 거 같아? 줄을 섰어! 줄을!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야. 넌 우리 팀의 대들보다. 이봐, 신문에 뭐라고 났는지 알아? 기본이 안 돼 있어, 기본이! 잘했어, 그러나 팀 기여도를 생각하면 생각처럼 좋은 성적은 아닌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힘들어? 힘들면 나가! 둘러봐, 다들 똑같은 조건에서 너보다 더 열심히, 잘하고 있잖아! 그게 힘들어? 힘든 걸 이겨내는 게 프로야! 좋아, 열심히 해.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있지. 몸이 힘들면 정신력으로 이겨내! 올해 목표도 우승이다. 다들 알지?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어이, 체인지 업만으로는 이제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응? 세상 돌아가는 게 눈에 안 보여? 응?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던져! 잡아! 뛰어! 쳐! 빨리, 빨리 달려! 라고 하는데, 그 속에서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를 견지한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p. 251)
4.
올 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p. 264)
제목: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저자: 박민규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추가 해야겠어요
한번 펼치면 책장은 술술 넘어가요. :)
저도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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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이제 일루로 나가서 삶을 좀 즐겨도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