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제주도 자전거 일주 7. 혼인지-제주항

in #tripsteem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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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여름에 자전거로 다녀온 제주도 사진을 정리하며 하루 단위로 1편2편, 그리고 3편4편, 5편6편을 썼습니다. 제주 자전거 여행기 마지막편입니다.




어제 밤늦게 숙소에 도착해보니 나 말고는 투숙객이 없었다. 민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라 주인집은 1층에 기거하고, 2층의 방에 침대를 4개씩 두고 게스트하우스 영업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여관으로도 잠시 운영을 했는지 숙박부에 인적사항을 쓰도록 되어있었고 '혼숙금지'라고도 붙여져 있었던 것 같다. 시골의 꼬장꼬장한 노인의 집에 신세지는 느낌이 났다. 주방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놓고 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갑자기 20대 남녀 4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혼숙 문제로 주인과 잠시 실랑이를 하더니 남녀 따로 방에 들어갔다가 주인이 내려간 다음에 한 방에 모여 떠들어 놀기 시작했다. 내가 눈을 감고 젖은 옷에 대한 걱정을 하는동안 떠드는 소리와 주인의 호통소리가 들리다가 귀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들은 부지런했다. 다시 귀에 그들의 떠드는 소리가 가까워지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아있었다.

팔토시를 하고 다녔는데도 시커멓게 탔다. 밤새 에어컨을 켜놓고 그 밑에 젖은 옷을 두었더니 얼추 말랐다. 지도를 보니 혼인지가 가깝다고 하길래 짐을 꾸려 출발했다. 오늘은 부산행 배를 타는 날이다. 오후 5시~6시쯤에는 발권을 해야하니 뭘 하든 남은 시간을 잘 계산하며 움직여야 한다.




옛날 옛날, 대한항공이 제주 KAL호텔을 세울 땅을 매입하기 전에, 그 옆 땅에서 남자 셋이 솟아나며 '구덩이 세 개'를 만들었다. 삼성혈에서 땅 파고 솟아난 그들은 흙파먹고 사냥하며 살던 중에 해변에 갔다가 상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상자에는 처녀 세 명과 곡물 종자, 소와 말이 들어있었고 뒤늦게 나타난 사회자가 이들을 사랑의 리퀘스트로 엮어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즉석 소개팅이 끝나고 여기 혼인지에 와서 결혼식을 올린 뒤 신혼방을 차리고 살았다고 하는데... 신방이었다는 구멍을 보면서 예전에도 집 장만은 참 힘든일이었구나, 내 집은 언제쯤..하며 눈물을 닦을뻔 했다. 제주지역이 구석기문화에서 신석기문화로 넘어가는 단계를 상징하는 신화가 아닐까 싶다.

괜히 왔다 싶으면서도 괜시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다시 나섰다.



방파제에 쌓아놓는 테트라포드를 제조하는 풍경도 보고, 오징어인지 한치인지 말리는 풍경도 보고 자전거는 씽씽 달린다.



가다보니 '양심휴게소'도 있다. 지키는 사람은 없고, 양심껏 냉장고에서 뭘 꺼내먹고 돈을 두고 가면 된단다. 나는 공짜로 에어컨 바람만 쐬다가 나왔다. 몇 년이 지나고 결혼 후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그 때의 냉방요금을 내려고 했는데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게시글에서 글자로라도 남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쉬고 갔습니다.'





고맙다고 하려면 어딘지도 모를 이 공간들을 예쁘게 관리한 모든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감사인사를 해도 모자랄 것이다. 쉬는 곳마다 절경이고 지나는 곳마다 명소였다.



곳곳이 멋진 풍경을 지키기 위한 전쟁중이다. 모래가 떠내려가서도 안 되고, 모래바람이 섬쪽으로 날아들어와서도 안 되나보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변 곳곳에 나무벽을 세워놓았다.




사진 순서는 뒤죽박죽이다. 폰 네비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폰 네비 덕에 고생도 많이 했다. 지도를 켜고 5분 정도를 달린 후에야 제 위치를 찾아주곤 했다. 일출봉 옆을 지나는데 내가 바다위에 떠 있다고 표시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캡쳐. 여행내내 이런식이었다. 갤럭시 네오, 못쓰겠 네오.







가다가 눈만 돌리면 바다가 나온다. 소나기가 자주 내렸다. 비를 피할 여유도 없고 비를 피해봐야 갈아입을 옷도 시원찮고. 어느 마을 입구를 지나다가 짝퉁 옷을 파는 트럭이 보이면 옷을 하나 샀고 젖은 옷이 너무 많아지면 비닐로 꽁꽁 싸매고 박스를 하나 주워 편의점에 들러 집으로 택배를 부쳤다. 젖은 채로 비닐에 잘 포장된 옷을 여행이 끝나고 하루 이틀 후에 집에서 받는 느낌이 묘했다.



갑자기 비가 미친듯이 온다.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따. 아, 하늘이 미쳤나보다. 나도 미쳤나보다 달리면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끝까지 안 지고 비 맞으며 달리려고 했는데 내가 졌다. 10분 정도 쉬었는데 한여름의 소나기가 뿌리는 냉기가 젖은 옷과 만나 추위를 만들어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비를 맞으며 출발했다.




기념관이 보여 들어가려고 머뭇거리다가 그냥 가기로 했다. 배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시내에서 혹시나 길을 잃거나 내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달린다.


쉰다.

제주 시내에 들어가기 직전에 무슨 공립 박물관이 보였다. 궁금했지만 시간이 겁나 들어가지 못했다. 정해진 기한 없이 돌아다녔다면 한달도 모자랐을 것 같다.


제주시에서 돼지고깃집을 운영하시는 사장님, 1인분만 먹어서 죄송했습니다. 다시 사진을 보니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하네요. 그래도 죄송한 마음에 맥주와 음료수, 밥과 된장을 시켰사옵니다. 당시 노여워하지 않으셨다면 좋겠습니다.


배에서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서점에 들렀다. 이 때 자전거로 시내쪽을 통과할 때 여유가 있었기에 나중에 아내와 렌트카로 이 쪽을 다시 돌아볼 때 '괜찮아 괜찮아 이 동네 금방 지나간다고' 호언장담하며 여유부리다가 비행기를 놓칠뻔 했다. 성수기 제주의 교통체증은 예측을 훨씬 뛰어넘는데 자전거로는 그걸 겪지 않아도 된다.






여러번 서두른 덕분에 여유있게 배를 탈 수 있었다. 제주로 들어올 때 그랬듯이 괜히 갑판과 선실을 들락날락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내게는 상대방이 내게 말을 걸도록 하는 능력이 있다. 저 사람 분명히 자전거 여행객인데 말 좀 붙여볼까.. 하면 그 쪽이 먼저 와서 '어, 자전거 타고 오셨죠?'라고 말을 붙인다. 그렇게 서넛, 너댓이 모여서 이야기로 밤을 보낸다.



아침, 부산항이 보인다. 맥주 두어캔 마시고 쪽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을 건다. 부산 거의 도착한 것 같은데 하선해서 우리 아침식사 같이 하실래요?

자갈치 시장 어느 구석, '아침식사 됩니다'를 붙여놓은 집에서 아침밥을 먹으며 출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 집에 가서 할 일이 너무 많네...


여행지 정보
● 서귀포시 성산읍 혼인지입구
● 제주시 건입동 제주항



여름, 제주도 자전거 일주 7. 혼인지-제주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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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제가 여행기를 써내는 능력에서 졌습니다..이게 결국 완결되다니.. 비를 맞고 정류장에 서있는게 너무나 강해보입니다.

고맙습니다. 소수점님의 교토여행도 겨울이 끝나기 전에 끝날 것으로 믿습니다ㅎㅎㅎㅎㅎ

아직 저에게는 제주도에서 자전거타기라는 버킷리스트가 있습니다. ^^

꼭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휴가철, 붐비는 여름보다는 봄 가을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게는 상대방이 내게 말을 걸도록 하는 능력이 있다

부러운 능력입니다 ㅎㅎ
여행기 재밌게 잘 쓰시네요!

고맙습니다. 당시에는 말을 걸고 싶은데 우물쭈물하던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더라고요. 아마 제 얼굴에 '나 너한테 할말있음'이라고 써놓고 다녔나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