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날 특집 : The First Teacher in Space, Barbara Morgan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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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ara Radding Morgan, Source : Collect Space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여성들은 유사 이래로 지구 인구의 절반을 구성해 왔지만, 안타깝게도 과거로부터 공고히 전해져 내려오던 성 차별의 장막에 가려 대부분이 조명받지 못했으며, 끊임없이 타자화되고 대상화되어 왔다. 때문에 이러한 차별을 이겨내고 인류에 공헌한 위대한 여성들의 삶이 최근 많이 주목받고 있다. 2016년 개봉했던 영화 <히든 피겨스> 가 그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조금은 특별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노력한 끝에 세계 최초로 우주에서의 과학 수업이라는 꿈을 이룬 여성, 바버라 모건(Barbara Morgan, 1951~)의 이야기이다.

STS-51-L Mission, 1986, KSC


1984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자국의 우주 개발에 한 획을 그을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프로젝트명은 바로 'Teacher in Space(TISP)'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 전역의 교사들 중 한 명을 선발하여, 우주 왕복선에 태워 우주 공간으로 쏘아 보낸 뒤, 그 곳에서 원격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이를 미국 전역에 생중계한다는 아주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미국의 국력과 발전한 과학 기술을 과시함과 동시에, 미국의 청소년들에게 과학과 우주 탐사에 대한 꿈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당시 기술의 한계로 인해 수업은 고작 30분 남짓에 불과할 전망이었지만, 세계 최초의 '우주 수업' 이라는 의미만으로도 충분했다.

당시 이를 위해 NASA는 지원자들 중 한 명을 'Payload Specialist (비NASA 우주인)' 로 선발하기로 결정했고, 곧 미국 전역에서 이 기회를 잡기 위한 교사들의 지원서가 쇄도했다. 당시 NASA의 기록에 따르면 문의가 무려 4만 건에 이르렀으며, 실제로 완성된 지원서는 1만 1천부 가량이 도착했다고 한다. 치열한 선발 과정을 뚫고 세계 최초의 우주 교사로 선발된 사람은 바로 뉴햄프셔 주 콩코드 고등학교의 사회 교사 크리스타 매콜리프(Sharon Christa McAuliffe)였다. 그녀는 곧 자신과 함께 우주로 나갈 6명의 우주인들과 함께 맹훈련에 돌입했다.

Concord High School
Christa McAuliffe in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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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Source : Wikipedia

그러나 안타깝게도 매콜리프의 우주 수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들 알고 계시듯이 '챌린저 호 참사' 라고 알려진 사고로 인해 그녀와 함께 우주로 떠났던 6명의 우주 비행사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챌린저 호는 발사 후 73초만에 공중에서 폭발하여 산산히 분해되었는데, 후일 리처드 파인만이 이끄는 진상조사팀이 밝혀낸 결과, 챌린저 호 폭발의 원인은 로켓 부스터의 이음매를 연결하는 O-Ring 이 추위로 인해 경화되면서 제대로 된 차폐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공표되었다.

이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챌린저 호의 발사 실패에 대해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하면서도 Teacher in Space 프로그램은 계속될 것이라 밝혔으나, NASA는 결국 1990년 Teacher in Space 프로그램을 중단했으며, 또한 우주 왕복선 프로그램도 상당히 오랜 기간 중단되어야만 했다. 한편 챌린저 호의 발사 당시 발사부터 폭발까지 모든 과정을 지상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Teacher in Space 프로그램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매콜리프의 백업 역할을 맡았던 바버라 모건이었다.

Astronauts in SLS-51-L Mi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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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ara Radding Morgan


바버라 모건은 크리스타 매콜리프와 마찬가지로 Teacher in Space 프로그램에 지원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미국 아이다호 주 맥콜(McCall,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맥콜과 다르다)에 있는 맥콜-도널리 초등학교에서 읽기와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아쉽게도 최종 심사에서 매콜리프에게 밀려 2위로 낙방했지만, 매콜리프와 함께 동일한 훈련을 받을 기회는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고산 씨와 이소연 씨가 1, 2위이지만 동시에 러시아에서 같은 훈련을 받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왜냐 하면 발사 직전 갑자기 매콜리프의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거나 또는 다른 긴급 상황이 발생할 때에는 예비로 투입될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Barbara Morgan in Training
Christa McAuliffe & Barbara M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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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Source : Wikipedia

두 사진 모두 오른쪽 여성이 바버라 모건이다.

당시 NASA가 우주에서 시연할 과학 수업의 컨텐츠는 우주 공간에서의 크로마토그래피(혼합물을 분리하는 실험 기법의 일종), 우주 공간에서의 작물 수경 재배 시연 및 우주 공간에서의 자성, 간단한 뉴턴 법칙의 실험 등이었다. 훈련을 받기 위해 모건과 매콜리프는 모두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급여는 NASA에서 지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의 1986년 1월 28일, 챌린저 호는 매콜리프를 싣고 힘차게 하늘로 솟아올랐으나,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게다가 얄궂게도 매콜리프가 떠나는 모습을 지상에서 지켜보고 있던 모건은 챌린저 호가 폭발하는 장면까지 모두 지켜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챌린저 호의 발사 장면을 지켜보는 바버라 모건의 모습. 이 영상에서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나. 약 1분 40초 경과 후 우주선이 갑자기 폭발하고 놀란 모건이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뛰쳐나가는 장면이 그대로 송출된다.

물론 NASA가 많은 비용을 들여 훈련시킨 인력을 그대로 놀리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모건은 그 이후 자신이 일하던 학교로 되돌아 갔지만 꾸준히 NASA와의 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Teacher in Space 프로그램은 다시 진행되지 않았다. 당장 레이건 정권의 뒤를 이은 G.W 부시 정권 초기 소련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더 이상 소련과 체제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때문에 우주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자본주의 체제 경쟁의 첨병이었던 NASA 역시 예산이 감소하는 등 많은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린턴 정권이 들어서고 미국의 경제가 사상 최고의 호황기에 접어들자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998년 NASA가 Teacher in Space 프로그램을 부활시킨 것이다.

게다가 단순한 Passenger (승객) 역할이었던 1986년의 Payload Specialist 와는 달리, NASA 는 모건을 Mission Specialist, 즉 NASA의 정식 우주비행사로 다시 선발했다. (때문에 모건은 1998년 근무하던 학교에서 교사로써의 커리어는 마무리하게 된다.) 모건은 1998년 NASA에 정식으로 참여하여 2002년까지 약 4년 간 우주 비행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첫 우주 비행은 2004년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모건이 탑승할 우주 왕복선이었던 컬럼비아 호가 2003년 지구로 귀환 도중 공중 분해되면서 또 다시 승무원 7명의 목숨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2003년 2월 1일 컬럼비아 호의 지구 재돌입 도중의 사고 장면. 컬럼비아 호의 사고 원인은 발사 직후 충격으로 인해 우주 왕복선의 절연판이 떨어져 나가 시속 800km 의 속도로 날개와 부딪히면서 구멍이 생긴 것이었다.

The First Teacher in Space


1986년부터 2004년까지, 그녀는 무려 18년이라는 기간 동안 '우주에서의 수업' 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과거 함께 훈련을 받으며 사이좋은 동료가 되었던 매콜리프의 이루지 못한 꿈 역시 이루지 못했다. NASA에서는 2003년 컬럼비아 호 사고 이후에도 계속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Teacher in Space 프로그램의 뒤를 잇는 Educator Astronaut Project 를 기획하여 (목적은 같다) 새로운 사람을 선발해 우주로 보냈다. 1986년 챌린저 호의 실패 당시 전문 지식이 부족한 민간인을 우주선에 태워 보내는 것에 정치적인 부담감을 느꼈던 NASA는 Educator Astronaut Project 를 진행하면서는 전문가 그룹의 선발에 더욱 치중했다.

그 후 2007년, 모건은 첫 우주 비행의 꿈을 품고 발걸음을 내딛은 지 21년 만에 우주왕복선 '엔데버' 호를 타고 STS-118 임무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매콜리프와 영원히 헤어진 지도 강산이 두 번이 바뀔 시간이 지나고 난 후였다. 엔데버 호는 국제 우주정거장 ISS 와 도킹하는 것을 목표로 2007년 8월 8일 우주 공간을 향해 성공적으로 날아올랐다. 1951년생이었던 바버라 모건의 나이가 벌써 환갑에 다가갈 시점이었다. 모건은 그리고 21년 만에 '세계 최초의 우주 수업' 을 진행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1986년에 계획된 것처럼 여러 가지 실험을 미국 전역에 생중계하지는 못했지만, 미국 각지의 학생들과 약 25분 간 간단한 질의 응답을 갖는 시간을 가졌다.

바버라 모건과 우주 비행사들이 학생들과 질의 응답을 하는 장면, 이 때 나왔던 질문으로는 '우주선 내부에서는 어떻게 운동을 하나요', '우주선 내에서는 어떻게 물을 마시나요' 등이 있었고, 이에 모건은 실제로 남성 비행사를 들어올려 보인다던가 물을 마시는 시연 등으로 답변을 수행했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오기 이틀 전 (즉 임무 12일차), 모건은 우주 비행사들이 하루씩 돌아가며 신청곡을 재생하는 관례에 따라 38 Special 의 "Teacher, Teacher" 를 재생했다. '세계 최초로 우주에 나간 선생님' 이 21년 만에 그 임무를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모건과 동료들은 엔데버 호를 타고 무사히 지구에 귀환했고, 모건은 Educator Astronaut Project 에 선발된 후배들에게 STS-118 이후의 임무를 넘겨주고 NASA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2008년 4월에는 모건이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던 아이다호 주 맥콜에 '바버라 R. 모건 초등학교' 가 개교했다.

세계사에 명멸했던, 성 차별을 뚫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위대한 여성들의 삶에 비한다면 아이다호 주 작은 시골 마을의 수학 교사였던 바버라 모건의 삶은 어쩌면 그리 특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삶은 보통 극적인 성공도 처참한 실패도 그렇게 자주 반복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영화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던 여성들보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함 속에서 위기에 굴하지 않고 목표한 바를 이뤄낸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평범하지만 굴하지 않는 여성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평범하지만 굴하지 않는 여성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 다음 편은 "Cliffhanger : 격류에 휘말린 이탈리아 정계" 라는 제목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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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어째 갈수록 글이 망하는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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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잉위잉

여성의 인권이 아직도 형편 없는 증거는 '여성의 날'의 존재이다.

훌륭한 글 감사합니다.
어렸을 적 미국계 한인이었던 아는 분께서 본인의 학교 선생님이 NASA의 우주비행사가 되어 챌린저 호 사건 당시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다름아닌 크리스타 맥콜리프였습니다.
바바라 모건의 경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겪으며, 거듭되는 어려움 속에서 우주 비행의 꿈을 이루기까지 많은 노력을 했다니 존경 받을 만한 분이 분명합니다.
히든 피겨스의 소설과 영화화 열풍으로 과학계의 유색인종, 여성에 대한 차별, 편견이 환기되고 있습니다. 매우 긍정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