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故 심일소령 공적진위 확인-30

in #busy4 years ago

안태석(7연대 8중대 화기소대장) 1

안태석은 1950년 6월 25일 당시 제7연대 8중대 화기소대장으로 보직되어 있었다. 그는 생전에 두 차례의 증언 면담에 임했다. 첫 번째는 1977년 6월 27일이었고, 그 다음은 1980년 10월 18일이었다.

첫 번째 증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육은?) 물론 대대전투는 종료하였다. 그러나 실전에 임하여서는 사실상 배우면서 싸웠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연대장은 중화기교육을 강화하라고 하곤 하였다. (배치는?) 제3대대 제9중대-모진강, 제2대대 제7중대-고탄, 제6중대-부용산, 제5중대-내평리, 연대본부-현 미 제4유도탄 부대, 각 중대본부는 전부 연대본부와 같이 있었다. 제8중대는 청평골에 주둔하여 어디든지(중대)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부의 장비를 모창설부대로 돌렸다고 하는데?) 사실이다. 즉 연대에 차량 50대 중 20대만 남기고 타처(불지)로 뽑아 돌렸고, 병기는 MI, CAR 및 중화기를 각대(數未詳)에서 뽑아 후송하기로 하고 연대창고에 수집하였다가 유용하게 썼다. 대인지뢰는 매설하였다.”

“(제8중대의 지휘관?) 신용관 소위 박격포소대장, 이우식 소위?, 노모 중위?, 김모 중위 부관이었다. (전투경과는?) 제7연대는 1/3 병력이 24시간 외출하고 있었다(춘천시내). 중대나 타중대도 밀려드는 적의 대병력에 저항하면서 철수했다. 그 많은 적에게 1개 소대나 중대가 대항할 수 있겠는가. 우두산에서 비로서 대대장도 상봉하고 여기에 전대대가 집결했다. 시간상으로는 06:00에 철수시작, 08:00에 우두산에 집결. 여기에 전열을 처음 정비하고 윗문정 일대에 배치했고 지휘도 회복됐다. 26일 새벽에는 제1소양교를 중심으로 좌로 1대대, 우로 2대대(후평동), 저녁 에 내평동쪽으로부터 소양강교로 전차 10대가 출현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이때쯤 하여 각 대대에게 수집하였던 M1, CAR 중화기를 재지함 때문에 화력이 상당히 강력하였다. 전차에 대하여 심소위는 소양강 파출소옆 정자나무(현존)에 57mm 대전차포를 거치하고 26일 일몰경에 적 전차에 사격을 가하영 적전차(1번) 캬다베라를 파괴하여 주저 앉혔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뒤차가 빠지지 못하고 하여 1번차, 2번차의 북한군이 포탑을 열고 나오는 것을 제8중대가 집중사격을 가해 많은 전과를 내었다. 그 날 밤 심소위는 잠행하여 2대의 전차를 특공대원과 같이 파괴하였다. 파괴된 위치는 893-850이다.”

“(중대장의 명령은(전투시)?) 25~26사이에는 ‘다만 적을 섬멸하라’ 이것뿐이었다. 후퇴명령은 28일에 받았는데 장병들은 죽더라도 이곳에서 싸우다 죽겠다고 항전하니 참으로 훌륭하였다. (춘천 철수시는?) 28일 17:00경이며 그 후 원창고개에서 그날 저녁에 한바탕 했다. (철수시 병력손실은?) 소대원 40명 중에서 12명이 전사했다."

"(춘천시민의 작전(전투간) 협조는?) 학생들은 자진하여 부상병을 담가로 날랐다. 소양강 제방에서 현 도립병원까지, 청년들은 7연대 탄약고(삼천리 ASP)에서 탄약을 메고 소양강제방까지 날라주고 부녀자들은 부인회가 동원되어 밥을 지어 날라주고 하였는데 28일까지 춘천시민들이 피난 갈 생각을 안했다."

"(심일 소위에 대해 아는 사항은?) 콧수염일 기르고, 남자답고, 활발하여 영향력이 컸으며 제7연대 #8기 회장을 지냈다. 그와는 북진시 금산까지 같이 갔다가 그곳에서 포위되어 나는 포로 됐다가 탈출하고 그는 그 후에 소식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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