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으로 기도하라.

in #christianity7 years ago

엊그제는 어느 자매님이 충주영성학교에 기도훈련을 받으러 오셨다. 그래서 필자는 통례상 평소에 어떻게 기도하고 계신지를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어느 묵상기도로 유명한 교회에서 기도훈련을 받아서 그대로 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덧붙여서, 자신이 훈련받은 교회의 담임목사는 하루에 13시간 이상 기도하고, 웬만한 교인들도 대여섯 시간 이상 기도하는 사람이 널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업적인(?) 호기심이 발동해서 묵상기도를 어떻게 하는 지 재차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성경말씀을 붙들고 기도한다고 하였다. 성경말씀을 하나하나 머리에 떠올리며 묵상하는 기도란다. 아하, 이런 기도라면 관상기도와 비슷한가 보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떠올리면서 생각에 깊이 잠겨서 생각의 흐름에 따라 기도하는 것으로 중세의 수도원에서 유행했던 기도방식인데, 누군가가 우리나라에 들여와 따라하고 있는 기도방식이다. 또한 성막기도라는 것도 있다. 성막에 들어가는 자신을 떠올리면서 성막에 설치된 제사시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저런 기도방식을 크리스천들이 배워서 따라하고 있는 가보다. 물론 그 나름대로 성과도 있고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바로 성경적인 기도방식이냐는 것이다.

아무리 멋지고 세련된 기도방식처럼 보여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도방식이 아니라면 무용지물이지 않은가? 사람이 만든 것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보여도, 오래 가지도 못하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지 못한다. 왜냐면 모든 믿음의 열매는 성령께서 맺게 해주어야 가능한 것이지, 인간적인 지식이나 지혜, 인본적인 경험이나 세상의 방법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참에 성경적인 기도에 대해 한번 살펴보고 싶다.

기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뤼슈케’라는 단어이다. 기도란 영이신 하나님과 내 영혼이 만나는 영적 통로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깊이 사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축도에 쓰이는 ‘성령의 교통하심’에서 말하는 ‘교통’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인데, ‘사귐’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신다. 계시록에 예수님께서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셔서, 우리가 문을 열고 맞아들이면 들어오셔서 우리와 먹고 마시는 교제를 하겠다고 표현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또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튼튼한 가지가 되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기도의 내용은 여러 가지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회개하고, 간구하고, 중보 기도하는 내용을 총망라하고 있다. 그중에서 압권은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부르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고 찾고 찾아라.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해 찾아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내용이 수도 없이 나온다. 그분과 대화하고 교제하려면 그 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당연히 간절히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전심으로 성령의 내주를 간구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자신이 원하는 요구사항을 외치는 기도인 ‘주세요주세요’기도가 기도의 전부인줄 알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을 부르고 회개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이다. 이런 기도를 하게 되면 성령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 기도에 쫙 몰입이 되면서 마음에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찬다. 그래서 필자는 기도할 때마다 1시간을 넘게 하나님을 부르고 회개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기도의 상태가 성령이 내 영혼과 깊게 사귀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증거이다.

간구나 중보기도도 기도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간구는 요청하는 것으로, 내 욕심이나 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요청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시간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기도목록을 경쟁적으로 외치는 시간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라면 입만 아플 것이 뻔하다. 그래서 기도응답이 없자, 새벽기도를 작정하고, 헌금을 넣어서 드리며,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을 선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기도의 강도를 높여 하나님을 윽박지르는 기도방식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며 귀신들만이 기뻐할 뿐이다. 그동안 우리네 교회가 시행했던 이런 기도방식이 무슨 열매가 있었는지, 잘 생각해 보시라.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는 기도방식은 기도가 아니라 말씀 묵상일 뿐이다. 깨달음은 성령이 주시는 지혜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가 필수적이다. 그런 다음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도형식을 빌려서 말씀을 묵상을 한다고?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언제 하느냐고??? 또한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떠올리면서 생각의 흐름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생각의 흐름에 맡기는 것은 생각이고 묵상이지 기도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대화하고 감정을 서로 나누며 깊이 사귀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기도는 생각이 아니라 말로 해야 한다. 물론 굳이 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그래서 필자는 성대를 진동시키지 말고 숨을 내쉬면서 전심으로 기도하는 방식을 권유하며 훈련시키고 있다. 이 방식은 목소리를 내지 않을 뿐이지 말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생각의 흐름에 맡겨버린다면 그게 무슨 기도인가? 공상이고 명상일 뿐이다. 성막 기도도 그 내용을 떠나서, 기도 본래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생각해보다. 내용은 간결해도, 하나님을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회개하며, 악한 영과 싸워 이기는 능력을 간구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의 바울의 기도문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영적 능력을 요청하는 기도이다. 시편도 다윗의 기도문을 시의 형식으로 써놓은 것이다. 그 내용은 대부분 하나님을 반복해서 부르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기뻐하는 간구하는 내용들이다. 이렇게 성경에는 예수님과 성경의 위인들의 기도의 모범답안을 적지 않게 기록하고 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따라할 생각이 없이, 교회에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자신의 기도방식을 가르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 같은 현상은 교회에서 성경적인 기도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를 비롯한 각종 기도회를 만들어 목사와 교인들의 욕심을 채우는 목록만을 외칠 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비성경적인 기도방식이 버젓이 교회에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그 대가는 참혹하다. 목소리를 높이고 희생의 강도를 더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듣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기도소리가 사라진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 귀신들만이 판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