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House of Hummingbird, 2018)

in #movie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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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은 내가 태어난 해. 내가 태어난 해에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고 한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음에도, 그 때의 나는 갓 태어난 갓난아이였기에 나는 그 사실을 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영화 <벌새>의 주인공 은희는 1994년,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한참 세상을 알아갈 나이. 영화는 그런 은희의 일상을 보여준다. 딸 2, 아들 1의 5인 가구 중 은희는 조용한 막내딸이다. 언니처럼 부모님께 대들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오빠처럼 공부를 하자니 공부엔 관심이 없다. 딱히 눈에 띄지 않는 아이. 하지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조용하고 소심한 아이처럼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을 졸이게 되는 아이, 은희.

은희는 한문 학원에 다닌다.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건 아니고,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다니고 있는 중이다. 여느 날처럼 학원 문을 열고 들어선 그 날, 김영지 선생님을 만났다. 어딘가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선생님에 자꾸 눈이 간다. 선생님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꾸만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 일상에, 자신을 괴롭히는 환경에 지칠 때면 이상하게 선생님을 찾게 된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왠지 힘이 나는 기분이 든다. 살면서 처음으로 만난, 변하지 않는 내 편을 만난 것 같다. 선생님과 함께 하는 수업 시간이 기다려지고, 선생님을 알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던 어느 날,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그러면서 시작되는 또 다른 이야기. 선생님은 한문 학원을 그만 두셨고,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영화 <벌새>. 처음에는 포스터만 보고 '만화영환가?' 싶어 볼 생각이 없었는데, 친구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네가 좋아할 것 같다'는 말에 약한 것 같다.

친구도 그랬고 다른 후기들도 마찬가지로 <벌새>를 이야기할 때, 당시의 한국 사회의 시대적 배경을 많이 언급하고 있었다. 가부장적인 사회, 남성 중심주의 사회, 공부를 못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것만으로도 날라리라는 취급을 받았던 사회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나는 영지 선생님에게 관심이 갔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영지 선생님의 개인사에 관심이 갔달까.

김영지라는 캐릭터는 내가 현실에서도 정말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이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 영지 역을 맡은 배우 김새벽의 말을 빌리면, '세상에 허무함을 느끼면서도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살아온 세월이 가득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상상하게 만드는 사람. 상상 속 영지는 사회의 불합리함을 목도하고 그 덧없음에 좌절했으나, 그럼에도 삶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는 성숙한 사람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동정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허무함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그녀를 보여준다.

세상이 나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서럽고 서운해서 서툴게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던 은희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날에도 은희 곁에는 영지 선생님이 있었다. 나 여기 있다고,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온 몸으로 표현하는 은희를 보며 어린 아이가 품고 있던 응어리의 크기에 새삼 놀랐다. 영지 선생님을 만나지 못 했더라면, 은희는 그저 평범한 '여학생'으로 살아갔을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은희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은희는 지금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까? 은희가 보는 2020년의 서울은 또 어떤 모습일까? 영화가 끝난 지금, 은희의 모습이 궁금하다.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은희는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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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영화네요.
검색 좀 해봐야겠습니다~~
좋은 영화 리뷰 감사합니다

ㅎㅎ고맙습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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