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이의 마지막 날

in #kr4 years ago

1992년 10월 28일 윤금이, 그녀에게 미안한 이유

1992년 10월 28일 오후 4시 경 동두천시 보산동의 어느 집. 집주인은 아침부터 기척이 없는 셋방 아가씨의 문을 두드렸다. 응답이 없었다. 언성을 높여 대답을 채근해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버럭 이상한 기운이 든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그는 목불인견의 참상에 몸이 얼어 붙고 말았다.

미군 전용 클럽 여종업원으로 일하는 둥글둥글한 얼굴의 스물 여섯 여자는 옷이 다 벗겨진 상태로 죽어 있었고. 자궁에는 맥주병 2개가, 그 다음으로 콜라병이 박혀 있었다. 즉 범인은 고인의 몸에 팔뚝만한 병 세 개를 꽂은 것이다. 또 항문으로는 우산대를 찔러 놓았다. 사인은 두부 손상으로 인한 과다 출혈. 콜라병으로 집중적으로 머리를 때렸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여인의 몸에 엽기적인 장난질을 친 것이다. 시신은 온몸에 타박상과 피멍 투성이였고 증거를 없애려는 시도였는지 하얀 합성 세제를 있는 대로 뿌려 놓았다.

범인의 신원은 곧 밝혀졌다. 고인의 몸에서 나온 맥주병에 범인의 지문이 찍혀 있었고, 지문의 임자는 미군 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이었고, 체포될 당시 그의 옷에는 현장에서 튄 핏자국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그를 체포하지 못했다. 미군측의 신병 인도 요청에 따라 피의자 조서도 받지 않고 ‘즉각’ 미군에 그를 인계한 것이다. 그가 재판을 거쳐 한국측에 인도된 것은 그로부터 근 1년 반이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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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행정협정이니 미군범죄니 하는 얘기들은 일단 접어 두자. 오늘은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 당시 시위도 하고 서명운동도 도와 주면서 길거리에서 피켓팅 여러 번 했던 입장에서 정말 싫었던 기억 하나가 콕 하고 찝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고인의 그 끔찍한 사진 전시(?)였다. 유인물에 실리기도 했고, 어떤 경우는 컬러(!)로 소개되어 미군의 만행을 입증하는 증거로 쓰여졌다.

그 사진을 소개하며 미군 철거를 외치는 청춘들의 열정에 눌려 뭐라고 말은 못했었지만, 말끝마다 윤금이를 누이라고 지칭하면서 그 누이의 하이타이 뒤집어 쓴 가련한 몸뚱이를 중인환시에 들이미는 것은 좀체 마땅한 일이 아니었다. 어렵게 친구에게 이 얘기를 꺼냈지만, 단칼에 정리당하고 말았다. “광주항쟁 사진은 안 그랬고 이철규 (저수지에서 사체로 발견된 조선대 교지 편집장) 때는 안 그랬냐? 갑자기 웬 감상주의?”

그랬다. 그건 오래된 습관 같은 거였다. 감당하기 어려운 참혹한 모습으로 분노의 부싯돌을 때리고 그 불꽃이 사람들의 바짝 말라 버린 마음에 불길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그런 습관. 그만큼 절박하기도 했으나 그만큼 원시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습관은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 때까지 전승된다. 장갑차에 짓이겨져 뇌수가 흘러나오고 내장까지 선명한 사진들을 종로 한복판에 내걸면서 우리는 뭘 얻으려고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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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검색하면 대번에 나오는 윤금이씨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나는 웬지 미안해진다. 정말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세상에 불거지기 않기를 바랐을 텐데. 1992년 10월 28일 윤금이가 죽었다. 그리고 그를 죽인 미군은 2006년도에 형기를 다 치르지도 않고 이미 미국으로 돌아갔다. 모범수라면 모르겠는데 안에서 소화기로 기물 때려 부수고 교도관을 폭행하기도 했던 악질이었는데...... 미안하다 그녀에게 여러 모로....... 미안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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