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여행 1

in Korea • 한국 • KR • KO6 months ago (edited)

쌍화차와 무성서원 –정읍 여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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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배운 현전 유일의 ‘백제 가요’ 제목은 정읍사(井邑詞)다.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 머리곰 비취오시라/아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 져재 녀러신고요 / 즌 ᄃᆡᄅᆞᆯ 드ᄃᆡ욜셰라 /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단골 시험 문제였다. ‘즌ᄃᆡ’란 무엇을 말하는가 묻기도 하고 ‘아으 다롱디리’를 써 보라고도 했고, ‘저제‘ 녀러신고요’를 해석하라는 문제도 있었다 어쨌든 적어도 대학 수험생 시절에는 달달 외웠던 고문(古文)이자 고문(拷問)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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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읍사, 백제 시대 만들어졌고 조선 시대 채록된 가사의 공간적 배경이 ‘정읍’이다. 백제시대 지명은 정촌(井村)이었는데 우리 나라 거의 모든 지명을 중국식 지명으로 바꿔 버렸던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정읍의 이름을 얻었으니 무척 고색창연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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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정읍은 더 크다. 전라좌수사가 되기 직전 이순신의 직책이 정읍현감이었는데 현감은 종 6품이다. 근처 고부와 태인은 종 4품인 군수가 다스렸으니 더 큰 고을이었지만, 오늘날의 정읍은 옛 고부와 태인을 망라하고 있고 전라북도에서 전주 군산 익산 다음이다. (인구는 10만을 살풋 넘지만) 백제 시대 정읍사의 고장이면서 고부, 태인 등 동학 농민 혁명을 품은 도시, 그게 정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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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전쟁 폭발과 탐관오리의 탐욕의 상징이었던 만석보 터도 정읍에 있고, , 동학 농민군들이 관군의 기세를 꺾었던 황토현 전적지도 오늘날의 정읍 소재다. 전봉준과는 사뭇 다른 노선으로 마음에 안드는 사또가 있으면 달려가서 단칼에 목을 쳤던 과격한 쾌남 김개남은 전봉준처럼 서울로 압송되지 않고 현지에서 사형에 처해졌는데 그 무덤도 정읍에 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중기의 문제적 인물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또 다른 죄목에 얽혀 서울로 끌려가던 중 사약을 받은 것도 정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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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에도 정읍의 이름은 굵직하게 남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귀국 일성을 날렸던 이승만이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무산된 뒤, 정히 안되면 38선 이남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연설하여, 공식적인 분단의 불씨를 날린 장소가 정읍이었다. 이승만의 발언은 ‘정읍 발언’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이 역사적 고장을 대학 동기들과 함께 찾았다. 다만 그 목적은 결코 심각하지 않은 단풍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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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은 장성과 함께 내장산을 나누고 있다. 내장산이라면 그 화려한 단풍으로 조선 8경으로 명성을 드높이는 곳이다보니 2023년 마지막 가을의 정취를 나누고자 하는 20여 명의 아재 아지매들이 모여들었다. (아 총각도 끼긴 했다.) 대학 입학한 지 35년 된 사람들이라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앉고 큰주름 잔주름들이 얼굴에 그득하지만 처음 만난 이들도 바로 말을 놓고,수년 묵은 친구가 되는 것은 ‘동기’라는 허울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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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정읍 발언을 토해 놓은 곳은 지금도 있는 정읍 동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고 들었는데 그 학교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샘고을 시장을 찾았다. “시장이 왜 샘고을이게?” “글세 이름이 이쁘다.” “여기가 우물 정자 정읍이잖아. 그래서 샘고을이야.” “뭐야 우물고을이라고 해야지 그럼.” “짜슥이 따지냐. 우물고을보다 샘고을이 이쁘잖아.” “얘들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자. 여기 이곳 맛집이야” 정읍을 외가로 두고, 그 외갓집 고택에 동기들을 초대한 호스트(?) 유창이 식당 한곳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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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고을 시장 안에는 70년이 넘는, 즉 이곳을 찾은 동기들이 대학 입학 후 지내온 세월의 두 배를 넘는 시간, 이 시장 안에서 사람들의 주린 ‘순대’를 채워 주었던 순대국집 화순옥이 있다. 언뜻 아무 시장에 있는 아무 순대국집 같지만 일단 순대 자체가 범상치 않게 맛있다. 맑은 국물에 양념장 풀고 자기 입맛에 맞게 새우젓 듬뿍 치고 김치 곁들여서 먹으니 새삼 전라도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무엇보다 혀가 즐거운 고장, 어느 곳에 대충 들어가도 후회 없다는 고장에서도 소문난 곳이니 닐러 무삼하겠냐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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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었으면 후식을 즐겨야 하는 것이 강호의 도리. 호스트 유창이 쌍화차 거리에서 차담을 나누자 한다. ‘태양 같이 젊었던’ 시절 정읍에 들렀을 때에도 쌍화차가 좋다고 한 잔 마신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없던 ‘쌍화차 거리’가 생겼고 수십 군데가 넘는 가게들이 성업 중이었다. 정읍의 쌍화차가 유명한 이유는 쌍화차의 중요한 재료 중 하나인 지황의 주산지가 정읍시 옹동면이기 때문이다. 한때 전국 지황 생산량의 70%를 차지했다니 정읍 쌍화차가 이름값을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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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쌍화차야?” “몰라. 검색해 봐.” “내가 해 봤어.” “옛날 임금님한테 진상하던 거래. 임금이 기가 허해 보이면 올렸는데 혈과 기를 아울러 충전시킨다고 해서 쌍(雙) 화(和)란다.” “뭐야 우리 임금 된 거야. 나는 어쩐지 궁궐에 가면 옛집에 온 느낌이 들었어.” “너 내시였구나 전생에.” 전생의 임금인지 내시인지 왕비인지 무수리인지 모를 50대 아재 아지매들은 그렇게 찻집 안을 장악한 채 왁자지껄 떠들었다. 쌍화차 역시 훌륭했다. 이건 차가 아니라 탕이나 국 같다는 찬사가 나올 만큼 재료도 풍성했고 조청과 가래떡 구이까지 곁들여지니 기와 혈은 물론 뼈와 살까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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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배를 두드리고 찾은 곳은 정읍시 칠보면의 무성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사(泰山祠)라고 하여 태산현 (태인 지역의 신라 시대 이름) 태수로 왔던 최치원의 선정을 기린 사당이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조선 시대 신숙주의 증손으로 태인 현감으로서 훌륭히 고을을 다스린 신잠을 모시는 서원이 세워졌다. 여기에 몇 명의 이름이 더해지고 숙종 때 임금이 ‘무성서원’이 이름을 내린다. ‘무성’은 칠보면 무성리의 지명에서 딴 것도 있지만, 더 큰 의미는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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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아끼는 제자 자유(子游)가 노나라 무성(武城)의 현감이 됐는데 예악(禮樂)으로 백성을 잘 다스렸고, 공자가 이 고을을 찾았을 때 현가지성(絃歌之聲: 현악에 맞춰 부르는 노래)이 들려와 탄복했다는 고사다. 최치원 신잠 등 고을을 잘 다스린 이들을 모시는 곳이니 더없이 들어맞는 이야기였을 것이고, 숙종은 이곳에 ‘무성서원’의 이름을 내렸다. 그 이름에 걸맞게 무성서원 입구에는 현가루(絃歌樓 )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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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의 규모는 작다. 도산서원이니 병산서원이니 거창한 서원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또 그 고명한 서원들이 경치 좋은 곳에 우람하게 서 있는 반면,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 우리는 이 서원을 세운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서원을 웅장하게 세우면 그 비용과 수고는 누가 감당할 것이며, 경치 좋은 곳에 누각 세우면 음풍농월하는 선비들 조용히 과거 공부하기는 좋겠으나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성현의 가르침을 전하고 행실을 바로잡을 수 있었을까. 이 무성서원에 모셔진 사람 가운데 하나인 정극인은 조선에서 향약(鄕約)을 최초로 전파한 사람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이설도 있음) 사람들 허리 휘게 만들고 감히 드나들기 어렵게 자리잡은 서원보다는 동네 한복판의 서원이 ‘덕업’을 서로 권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예법을 지켜 서로 교류할 수 있게 만드는데는 제격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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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지는 몰라도 전국 서원의 90%가 없어졌던 대원군의 철권 개혁의 소용돌이 와중에서도 무성서원은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린다.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이었다. 이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식물국가가 됐을 때 이 무성서원에서는 예악 대신 창의(倡義)의 북소리가 울린다. 천하의 대원군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 10년 세도의 종말의 시작을 알렸던 대꼬챙이같은 유림, 단발령 앞에서 ‘이 머리는 잘라도 머리카락은 못 자른다.’고 아우성쳤던 (미안하지만) 벽창호. 그 이름도 팍팍한 면암 최익현이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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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담한 서원에는 이렇듯 여러 사람의 이름이 드리우고 있지만 오늘 우리 일행이 특히 주목해야 할 이름은 정극인이었다. 국어 시험 문제로 ‘가사 문학의 최초 작품은?’을 떠올리는 사람은 누구나 기억할 노래 ‘상춘곡’의 저자. 그 역시 무성서원에 모셔져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머물 숙소 규당고택의 옛 주인에게로 이어지는 가사(歌詞)의 전통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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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onths ago 

오랜만애 찾아와주셨네요~~

네 와 봤는데 낯서네요 ㅎㅎㅎ 메뉴도 좀 바뀐 거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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