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이를 위한 조의금

in #kr2 years ago

살아 있는 이를 위한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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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짤린 하나님>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달동네로 유명했던 관악구 신림 7동, 난곡 마을의 낙골교회 전도사로 일했던 김흥겸이 연세대 신학과 재학 시절 만든 노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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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겸은 교내 채플 시간에 멀쩡히 살아 숨쉬는 독재자들의 건재를 통탄하며 “우리보고 회개하라구요? 우리가 죄인이라구요? 정말 울며불며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이요, 죄인 중의 죄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독재자가 주 대낮에 수천 명을 학살하는 광주에서 당신은 뭘 했냐구요.....”라며 하나님의 멱살을 잡을 듯한 기도를 올렸던 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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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였던 곳에 터를 잡아 뼛가루들이 날아다닌다고 해서 ‘낙골’이었던 동네의 하꼬방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다가 영등포 역 앞에서 테이프 노점상을 하면서는 노점상 아줌마와 젓가락 장단을 함께 하며 어울렸고, 신대방동 철거 현장에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석 달간 콩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극단의 배우로, 배추장사로, 음반 기획자로 그야말로 삶의 바닥을 몸으로 쓸어내던 그는 1995년 위암 선고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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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은 점점 더 깊어갔고,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을 때, 그와 인연이 깊었던 오충일 목사는 모세가 바다를 가른 이래 없었을 일 하나를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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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겸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벗들이 함께 모여 미리 장례식을 치르자.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하는 건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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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1월 가쁜 숨이긴 하지만 멀쩡히 숨을 쉬고, 창백하긴 하지만 아직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살아 있는 사람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고인’은 휠체어에 앉아 문상객들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지요.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마치 부활한 사람처럼. 다시 살아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 뒤 1997년 1월 21일 그가 회개하라고 당돌하게 요구했던 하나님 곁으로 갔습니다. 어언 그가 간지도 4반세기가 흘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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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사람의 장례식이 어땠을지, 어떤 분위기였을지, 살아있는 망자와 눈을 마주치고 말을 섞고 음식도 나누는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 포스팅을 보며 그 ‘어바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됩니다. 제주도 4.3 사건을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부표 가운데 하나였던 장편시 ‘한라산’의 저자 이산하 시인을 위해 ‘조의금’을 선결제해 주십사 하는 부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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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시인은 대부분 시인들이 그러하듯 또는 그보다 더 안좋게, 매우 가난합니다. 그 흔한 실손보험도 안/못 들어놓았고 오랫동안 메뚜기 뛰며 살아온 처지로 주머니에 뭐가 있을랑가요...... 시인과 상의해 <조의금>을 선결제 하자고 합의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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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을 때 받아야 누가 얼마 냈고,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당신이 잘 살았는 지 알 거 아니냐 이렇게 제가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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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부디 청컨대 회원님들께서 아래 계좌로 조의금을 보내 주시면 시인의 자활 및 재활에 이루 말로 못다 할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시인은 향후 제주로 귀촌해 요양에 집중할 요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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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대학 1학년 때 그의 시 <한라산>에서 딴 가사에 페친인 이창학님이 곡을 붙인 노래 <한라산>을 들으며 전율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껏 저는 4.3을 잘 몰랐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었고 차라리 ‘여순 반란’은 들어 봤만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은 실로 생면부지의 사실이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것도, 그리고 그걸 죽인 손길이 다름아닌 대한민국 정부와 그들이 동원한 살인자 집단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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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더 많은 정보와 사실을 접하게 된 요즘, 당시의 <한라산>의 격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저들 가슴에 칼날을 꽂고 아 해방의 땅 그리며 조국 통일 만만세” 부른 사람들을 이해는 하지만 그 투쟁이 적절하였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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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대한민국 정부는 민주주의를 표방한 나라 정부로서는 하면 안될 일을 저질러 한 지역 사람들의 가슴에 씻지 못할 한의 흉터를 남겼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오랜 동안 제주 사람들은 그 흉터를 내보일 수조차 없이 싸매고 숨겨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되 <한라산>은 그 부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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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에 시인은 모진 형극을 치렀습니다. 나이 스물 일곱에 발표한 그 시 때문에 그는 국가보안법의 올가미에 목을 꿰어야 했고, 평생을 따라다니는 악몽이 된 무지막지한 고문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당시 검사였던 황교안은 그에게 “평생 콩밥을 먹여야 될 놈”이라고 일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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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질게 당하면서도 그는 항소이유서로 검사와 판사 모두를 기절초풍하게 할 대소동을 일으킵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로 항소 이유서를 맺어 버린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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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떤 생각을 가졌고 무슨 사상의 세례를 받았는지 저는 모릅니다. 또 ‘부칸’ 왕국을 혐오하며 그 3대 왕정이 하루 빨리 무너지기를 바라고 정상적인 국가로 다시 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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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87년. 그의 고등학교 후배 박종철이 참고인으로 끌려가 물고문을 받고 죽던 시절, 서빙고 보안분실에서 누구 하나 죽여 한강에 떠내려 보내도 아무도 몰랐던 시절, 자그마치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써제끼는 시인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60년대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전율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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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기에 금기를 넘어서고, 시인이기에 못할 말이 없으며, 시인이기에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했으나 아시다시피 우리 현대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라산>은 이산하 시인에게 명예보다는 ‘멍에’ (시인 스스로의 표현)로 남았습니다. 저는 그 멍에가 오늘날의 부족하나마 이전에 비해서는 풍성해진 사상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의 성취 위에 얹혀진 가시 면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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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이기도 하며 몇 번 ‘알현’의 기회를 가지며 과거의 스타를 만난 느낌으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던 기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눈빛은 형형했으나 몸은 쇠약한 느낌이 역력했던 느낌도 아울러 따라옵니다. 제가 그를 처음 만났을 무렵, 시인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심한 폭력을 당해 서른 바늘을 꿰매고 몇 달간 입원한 뒤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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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괴한의 정체는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노상강도나 불량배의 폭력과는 질이 달랐습니다. 그의 시련은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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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인 이산하가 대장암과 싸우고 있습니다. “조의금 선결제”라는 표현이 언뜻 스산하고 생뚱맞기는 하나, “살아있을 때 받아야 누가 얼마 냈고,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당신이 잘 살았는 지 알 거 아니냐.”고 누군가 그에게 건넬 설득에 공감하여, 또 <혀짤린 하나님>의 김흥겸의 살아 생전 장례식을 떠올리며....... 오늘 계좌 이체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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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살아 있는 시인. 그리고 더 살아야 할 시인. 우리들의 아픈 과거를 십자가처럼 걸머지고 살았던 시인에게 조의금을 선결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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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302 04 116218 국민은행 이상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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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백은 이산하 시인의 본명입니다. 아시겠지만 이런 경우는 왼손이 일을 오른쪽 새끼 손가락이 알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동의하시고 동참하실 경우 댓글 많이 달아 주시고 공유도 많이 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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