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다시보기 #1 해미는 누구인가?
이 글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 대한 리뷰(review)다. preview는 관람전 가이드라면 review는 다시(re) 보는 것(view)이다. 즉, review는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정서와 메시지를 해석해봄으로써 그 여운을 곱씹어보려는 시도다. 따라서 이 글은 영화를 관람한 분들만 읽기를 권한다. 영화의 디테일과 결말까지도 언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버닝'에 대해선 몇 가지 키워드를 매개로 해석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 번에 걸쳐서 차례로 키워드 하나씩을 꺼내 영화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오늘은 일단 전종서가 연기한 해미라는 인물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자.
#1. 해미
종수(유아인)가 우연하게 만나게 되는 어릴 적 친구 해미는 꽤나 당돌한 아가씨다. 두 번째 만남만에 종수와 섹스할 정도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다. 돌연 아프리카로 훌쩍 여행을 떠날 정도로 삶에 적극적이다. 그럼에도 그녀에겐 무언가 모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 시대 청춘이 처한 궁핍한 삶에서 그녀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 가운데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영화 속의 해미는 그러나 주체처럼 보이는 객체다. 즉, 종수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인물이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해미의 상황이 단독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녀는 종수의 시선과 인식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래서 해미는 불쑥 종수에게 성애의 흔적을 남기고 곁을 떠났다가 벤(스티븐 연)이라는 미스터리한 남성과 함께 나타나며, 또한 어느날 갑자기 실종된다. 이것은 종수의 혼란과 집착, 강박증을 불러 일으킨다.
해미는 자신이 어릴 적 우물에 빠진 적이 있는데 종수가 구해주었다고 말한다. 종수의 기억에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수는 그걸 믿어 버린다. 그런데 해미의 실종 이후 우물의 존재에 대한 관계자들의 증언이 엇갈린다. 해미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했다면 왜 그런 것일까?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 해미라는 인물이 미스터리한 성격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종수가 그녀를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미는 종수가 믿어 버린 대로 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일 수도, 그냥 훌쩍 종수를 떠나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앞서 해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자. "죽는 건 무서워. 하지만 사라지고 싶어. 그냥 없었던 것처럼."
해미는 한국의 사회적 지형 속에서 종수와 같은 계급적 처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수의 얼터 에고(대체 자아)이자 결핍과 혼란, 욕망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종수에 의해 착취되는 젠더적 판타지이기도 하다.
판타지는 투영의 주체만 존중하지 객체에 대한 존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 폭력적인 양태로 나타난다. "너 왜 남자들 앞에서 옷을 그렇게 벗어? 그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야." 해미의 아름다운 젖가슴은 종수의 시선에만 독점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때 불쑥 계급적 적대자이자 잠재적 연적인 벤의 시선이 그녀의 자유 의지가 발현된 장면을 공유하고 있음을 종수는 불쾌하게 깨달은 것이다.
이 장면에서도 사실상 해미는 없.다. 해미의 엉뚱한 춤을 존중하듯 비웃는 시선으로 바라본 상류층 젊은이들이 그랬듯, 소유욕에 사로잡힌 종수의 시선에도 존중은 빠져 있다. 시선의 폭력. 그러니 해미는 원래 없었고, 그때 다시 없어진 것이다.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을 내포한다. 내가 인식하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있는 것. 내가 인식함으로써 있게 되는 것. 해미의 실체는 종수의 인식 속에서만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없다. 물리적 실체가 사라진 것만 없는 게 아니다. 우리의 많은 관계 안에서 있는 자는 동시에 사라짐을 당한다. 종수가 일자리를 얻으러 간 자리에서 이름이 아닌 "3번"으로 불리듯, 우리는 분명히 있지만, 익명의 부재자 취급을 당한다. 그게 이 사회에서 종수가 처한 입장이고, 동시에 해미가 종수에게 취급되는 방식이다.
판타지는 또한 진실을 미궁에 가둔다. 이 미궁이 종수가 갇혀 있는 감옥이다. 그래서 종수는 또 다른 미스터리의 축인 벤에게 무력하게 털어 놓는 것이다.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