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정치] 진보적 정책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아래의 글은 강서지역진보정치모임에서 주관하는 <손 좀 보자, 지역정치>라는 연속 강좌사업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론적인 설명보다는 구체적인 정책 형성의 방법과 고민들, 그리고 단순히 개별적인 정책의제에 대한 대응을 넘어서는 정치운동의 맥락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들을 다룹니다. 정책학은 20세기의 학문으로 사실상 정부에 대한 학문으로 이해되어 온 만큼 그 대상과 내용에 있어서 정치학의, 혹은 행정학의 하위 학문으로 다뤄져온 체계 입니다. 학문 체계인 만큼 당연히 학문 자체 내의 학설과 방법론이 있지만 여기서는 이를 다루지 않습니다. 만약 궁금하다면 ‘정정길 저, <정책학>’을 참조하시거나 실제 정책-정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다룬 ‘이재영,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를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1.진보적 정책: 2가지 오해를 넘자
통상 ‘정책’하면 떠오르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진보정치 운동의 맥락에서 살펴볼 맥락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책=지식이라는 관점과 정책=점진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정책=지식’ 이란 건 가장 오래된 선입견 같은 데, 많이 아는 것이 곧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많이 아는 것과 우리가 쓸모 있다 생각하는 정책은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정책은 관점입니다. 즉 동일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것에 더 닿아 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정 중에서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정책 중 하나가 ‘올빼미 버스’입니다. 일반적인 버스 시간보다 더 늦은 시간까지 버스를 운행하는 것이죠. 시민들은 이것을 왜 좋아할 까요? ‘싸게 이용할 수 있어서’ 입니다. 올빼미 버스가 생기면서 기존보다 더 늦은 시간에 이동하는 것이 싸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이 올빼미 버스에 대한 호감도가 큽니다. 실제로 경제적 부담을 줄여 준다고 생각하니 말이죠. 하지만 그것의 추진방법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당초 올빼미버스를 시행하게 된 배경에는 심야시간에 택시들의 승차거부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2012년 연말에 서울시는 일시적인 심야버스를 운행했는데 이에 대한 호응도가 높았던 겁니다. 비슷한 시기 대리기사 등을 실어 나르는 불법 전세버스 등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규제 정책의 일환으로 접근한 것이 올빼미버스 입니다. 실제로 올빼미버스 도입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 갈등은 택시업체와 서울시의 갈등입니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호응과 택시업계의 승차거부 관행을 들어 ‘사회적으로’ 승리하죠. 서울시는 이 사업을 해외에 가서도 혁신사업으로 말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다른 나라에선 올빼미버스라는 것이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일단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외국은 야간 노동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은 아예 운수업에 대해 근로기준법에서 제외했습니다(노동시간에 대한 부분에 한정되지만). 두번째로 택시 등과 같이 기존의 대중교통 생태계의 반발이 높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미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운행하던 노선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시는 당초 올빼미버스를 도입하게 된 의도와 그 효과를 숨깁니다. 오히려 시민들의 직접적인 만족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그렇다면 진보적이라는 우리는 이 정책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할 수 있을까요? 정책은, 특히 진보적 정책은 ‘시민들이 원하는 정책’이 곧 ‘시민들에게 좋은 정책’이 아니다라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많은 시간 동안 이런 관점이 ‘시민들을 가르치려 한다’는 시각에서 배척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선호란 기존의 관행 속에서 구축된 것입니다. 중국집에 가서 짜장이냐, 짬뽕이냐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저기 밖에 분식집이 있고 냉면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진보적 정책’의 관점입니다. 당연히 현재의 선호 구조와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정책은 지식이 필요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관점을 형성하기 위한 토대로서 필요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이를테면, 올빼미 버스란 야간 노동을 강요하는 사업주가 부담해야 해야 하는 이동비용을 노동자와 공공기관에 전가하는 행위이다라는 평가는 어떤가요?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라면, “왜 올빼미 버스의 부담을 오로지 이용자의 요금과 서울시의 재정보조 만으로 충당하는지”를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서울지역의 많은 24시간 프랜차이즈들이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생기겠죠. 두번째로 버스 운전자의 노동권 문제입니다. 당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특정 노동자의 건강과 맞바꾼 야간 버스 운행에 대해선 가치적 측면의 검토도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치명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향유하는 편리라는 것에 대한 태도 말이죠.
두번째로 앞서 말한 ‘정책=점진론’이라는 관점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정책이라는 것이 현재의 불합리한 정치적 의도를 정당화해주고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인 사회변화에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은 상당히 오래된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런 차이가 곧 개량주의와 혁명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간혹 카우츠키나 베른슈타운 류의 수정주의 흐름에 대한 맑스와 레닌의 태도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관점은 그 역사적 맥락을 떠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정치’에 대한 태도입니다. 현재의 정치에 개입한다는 것은 당대의 주요한 이슈에 대해 입장을 낸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입장이 바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정책이 가지고 있는 지향점입니다. 상가임차인 문제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지역의 상가임차인이 어려운 것은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변에 대형마트가 들어오는 것, 임대료가 갑자기 인상되는 것, 일대가 재개발지역으로 묶이는 것과 같이 자체적인 경영의 부실 외의 환경적 요인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대형마트 진입을 막는 것, 임대료 상한제 등을 임대료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 재개발사업시 상가임차인에 대한 적절한 보상정책을 수립하도록 하는 것이 소위 진보적 정책 대응의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응이 모두 같은 것이라 보기 힘듭니다. 이를테면, 높은 임대료 문제를 대응하는데 임차인에게 임대료 지원을 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건물주를 포함한 지역사회의 사회적 협약을 통해서 적절한 임대료 기준을 마련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상가임차인에 대해 적정한 보상기준을 만들자고 제안할 수도 있죠.
그런데 이런 정책들이 현상유지적이라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상가임차인 임대료를 유지하기 위해 건물주에게 임대료 보조를 해준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리 사회는 혹은 우리 지방정부의 재정은 어느 수준까지 건물주의 임대료 수입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의 최종적인 정책 효과가 임대인을 향하는 것일 까요, 임차인을 향하는 것일까요. 만약 건물주가 정부로부터 임대료 보조를 받는 임차인과 임대차 계약을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질문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의 정책은 정책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각이 정책은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든 원치 않든 해당 정책의 효과가 장기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성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임차상인 문제에 건물주의 소유권 문제로 접근하는 것, 즉 임대료 책정 및 재개발 시에 몇 가지의 사회적 절차를 마련함으로써 상가임차인 문제의 핵심을 소유권에 대한 제한으로 접근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제한은 건물주에 의한 보상이 아니라 정부에 의한 통제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의 정책은 곧 그 다음 정책의 전제가 됩니다. 따라서 정책을 고민하는 것은 단순히 그 자체로 점진적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의 지향점에 따라 충분히 혁명적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적 정책을 고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으로 정책을 만들면서도 그것이 사회의 어떤 변화를 예상하거나 의도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책 수립의 핵심은 ‘문제의 발견’보다는 ‘문제의 해석’에 놓이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의 방향’을 어떻게 잡는가에 놓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정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정책을 뜻하는 policy의 어원은 기원전 1400년의 그리스에서 사용한 국가, 정부, 시민을 뜻하는 politeia와 라틴어에서 국가나 시민 정부를 뜻하는 politia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정책은 기본적으로 국가 혹은 정부 등 공적인 정치기구에 속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직접적으로 보면, 공적인 결정과정의 결과가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상 정책을 다루는 학문을 정책학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만든 이는 해롤드 라스웰이라는 미국의 정치학자로 6~70년대 미국 정치학 사조를 풍미했던 행태주의 정치학에 반대했는데, 그런 학문 풍토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핵폭탄을 만드는 학문’과 유사한 결론으로 간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성’이고, 그 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어떤 정책도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정책은 각각의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가시적인 정책효과 외에 사람의 행태를 통제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예로 ‘무임승차’ 논란을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현재 지하철이 그 자체로는 경영이 나쁘지 않은데, 무임승차나 환승할인과 같은 사회정책 때문에 적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것이 고스란히 지하철 운영기관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이 때문에 지하철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는 데 구조적인 한계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익숙합니다.
‘무임승차 정잭’의 논리 구조_1
노인 무임승차 -> 운영 적자 -> 경영 악화 -> 구조조정 -> 노동조건 악화
이럴 경우, 최종적인 노동조건 악화는 결국 노인 무임승차가 중요한 원인이 됨으로 당연히 노인 무인승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하철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데 핵심이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노인 무임승차가 운영적자의 원인일까요? 이를테면 노인들이 지하철을 타지 않으면 운영 흑자가 달성되는 걸까요? 아닐 겁니다. 따라서 위의 주장은 노인들을 ‘유임으로 승차’시키든지 아니면 그에 따른 요금을 별도로 지급해달라는 요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음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노인 무임승차 -> 노인 유임승차]가 가장 중요한 변화의 방향이지만 오히려 [노인 유임승차 -> 노인 이용률 하락]이 되면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현재 무임승차=적자의 기본 원인이라는 주장이 강화되면,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지키기 위해 노인들의 무임승차 폐지에 나섰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인 무임승차 논리는 우리의 논리가 아니라 그들의 논리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대중교통 이용을 투자의 관점이 아니라 비용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에 대해 다른 사회적 효과를 무시한 체 직접적인 응익성의 구조로만 접근하는 시장주의적인 공공서비스 정책이라는 관점을 말이죠. 명확하게 현재 공공서비스 요금 구조는 ‘응익성이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공공서비스라는 것 자체가 시장에서 공급하기 어려운 공공재를 효율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재와 동일한 요금부담구조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논리구조 위에서는 우리가 고민하는 ‘진보적인 정책’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 무임승차 논리를 좀 더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노인들에 대해 모든 교통수단 무상운영을 주장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버스의 경우에는 민간회사의 운영체제이기 때문에 바로 비용보존 문제가 제기될 겁니다. 굳이 공사가 비용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1) 그러니 버스공영제로 가서 적절한 투자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 2) 민간버스회사에 지급하는 만큼 지하철공사에도 지급해야 한다는 두 방향의 제안이 가능해집니다. 만약 지하철공사에서 다양한 정기권을 만들어서 시민들의 대중교통이용을 촉진하자고 하면 어떨까요? 더 나아가, 기존의 원가 계산 방식이 아니라 대중교통의 사회적 편익까지 고려한 ‘사회적 회계 방식’으로 금전적 경영은 적자일 수 있으나 사회적 경영에선 많은 흑자를 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 어떨까요?
정책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가치적이고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정책을 만든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완결된 지향점을 보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그 정책의 방향으로 나아갈 때 궁극적으로 닿을 수 있는 사회의 가능성이 어떤 내용인지가 관건이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의 ‘노인 무임승차’ 논의는 결국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은 적절한 부담을 져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정부의 공공서비스 논리를 그대로 투영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설사 무임승차에 대해 정부지원을 이끌어 냈다 하더라도 이는 구조적인 패배를 의미할 것입니다.
이처럼 기존의 정책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책을 수립한다는 것은 즉자적인 대결논리의 선명성 보다는 오히려 ‘장을 바꾸는 고민’이 더욱 중요합니다. 즉, 전혀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경기로 끌고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무상급식 논쟁입니다. 물론 다들 무상급식 운동을 기억할 테지만 그 전에 있었던 친환경급식 운동은 기억하는 분이 별로 없을 겁니다. 급식의 식재료를 친환경 재료로 교체하는 운동이었고, 이는 지역의 생협운동과 농촌지역의 국내산 먹거리 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이었습니다. 실제로는 WTO 체제 등으로 인한 국내 농업의 위축을 적극적인 국내 시장 개척으로 보완하려는 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이것이 국산 먹기 운동으로 갔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컸을 겁니다. 지나치게 보호주의적으로 보일 것이고, 당시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개방전략에 비춰 낡은 것으로 보일 테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전략을 급식 재료 문제로 전환시킨 것이 ‘룰 체인지’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각종 급식 식재료 사고가 있었고 이를 매개로 급식 재료의 안정성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쟁점을 활용해서 농업정책을 교육정책으로 넘겨버린 것입니다. 최초의 친환경 급식조례가 전라남도에서 제정된 것은 이런 흐름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친환경 급식 의제가 무상급식의제로 전환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단순히 급식 공영제로 전환했다면 지리한 관료제 논쟁으로 끌려갔을 것이나 이를 급식 문제로 예각화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비용 문제가 ‘부담가능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방향의 전환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이를 통해서 어떤 경향성 혹은 지향성을 갖도록 만들 것인가라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는, 다른 부문보다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문제가 더 심각해서가 아닙니다. 더 열악한 것은 민간부문의 비정규직이 더욱 심각하죠. 하지만 정부가 민간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싫다면, 스스로 좋은 사용자가 되어서 모범을 보이라는 사회적 압력을 활용한 것입니다. 이 논리라면 겉으로만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한 보수적인 정치세력 역시도 반대하기 어려울 것일테니 말입니다. 지역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고, 이것의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지만 단순히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해 알고 있고 그에 대한 대책도 가직 있지’라는 수준에서 머무러서는 안됩니다. 각각의 대책이 궁극적으로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그것의 방향을 연장해가면 궁극적으로 어떤 해결책을 바라게 되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구조-전환적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법론을 비판적 실재론이라는 흐름에서 참조했습니다.
비판적 실재론의 구조분석
눈에 드러나는 현상은 보이지 않는 구조적 원인의 상호 작용, 즉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메카니즘의 강도를 완화하는 방법도 사용할 수 있지만 해당 메카니즘이 가능한 구조적 원인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노인 무임승차 문제로 보자면 당장 공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인무임승차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공공서비스의 지원을 요구함으로서 기존의 비용구조를 투자구조로 전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해당 사회문제가 작동하는 회로를 바꾸는 것입니다.
- 지역에서의 진보적 정책?
이제 지역의 논리를 더해 보면 좋겠습니다. 보통 사람의 생각은 반대말로 짝짓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쉽게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생각하는데 에너지의 소비를 줄이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카네만이라는 인지심리학자는 사람의 생각이 두 가지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빠르게 생각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느리게 생각하기’ 입니다. 통상 빠르게 생각하는 것들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편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명박이 말했다-> 무슨 거짓말 했네”와 같은 편향은 이명박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반면, 느리게 생각하기의 경우에는 반대 입니다. 늘 그렇게 생각했던 것을 뒤집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래?’라는 의심이 그동안의 직관적인 ‘빠르게 생각하는 것’을 멈추게 합니다.
저는 지역 정치에서 지역이라는 말이 바로 그동안 익숙했던 편향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의 반대말이 중앙일까요? 국가일까요? 아래를 그림은 현재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스케일을 도식화한 그림입니다. 이를 참조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지역의 쌍 개념은 무엇이 되는 것이 적절할 까요?
우리가 말하는 지역정치는 보통 중앙정치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 읽힙니다. 즉, 중앙정치에서의 의제와 갈등이 여과없이 지역정치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과연 나쁜 것일 까요? 당연히 국가와 지역이 연결되어 있다면 중앙정치의 의제가 지역정치의 의제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중앙대 지역의 대립이 아니라, 중앙의제의 ‘지역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국가적 문제를 지역화하여 변형되는데 우리의 정치는 이런 변형에 대응할 만큼 유연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비근한 예로 2016년과 2017년에 이어온 박근혜 퇴진 운동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이 운동은 중앙정치에 해당합니다. 대통령에 대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 속에서 나온 내용은 과연 중앙정치 만의 것이었을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오히려 중앙정치의 선명한 대립이 지역 수준에선 좀 더 복잡하게 얽혀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내지 못했습니다.
지역정치의 부재는 바로 이런 것과 같이 중앙의제가 지역화되지 못하는 것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지 중앙정치로 환원될 수 없는 지역정치의 독특함을 찾는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중앙대 지역의 문제를 대립적으로만 접근하게 되면 지역에서의 고유성에 지나치게 특권적인 지위를 주게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해도 되지만 우리 지역은 그렇지 않다는 지역의 특수성이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지역정치는 중앙정치와의 연계를 잃고 지역 안으로 고립됩니다.
진보정치의 많은 흐름 중에서 지역정치를 강조해온 다양한 흐름들이 결국 지역화하는 문제의식보다는 물리적 공간으로서 자기 지역에 갖히는 것은 중앙과 지역을 대립적으로 접근하는 논리를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더 유리한 것은 기득권 구조입니다. 기득권이야 말로 중앙정치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보면서도 지역정치의 고립이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용이합니다. 이를테면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와 관련된 정책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실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보면, 기초의원 정당 공천제가 정치신인의 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계량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비슷하게 무소속 기초의원이 정당소속 기초의원보다 더 진보적이거나 개혁적이라는 증거 역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공천제 폐자를 주장하는 것은 지역정치를 중앙정치로의 종속이 나쁘다는 일반적인 편향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좋은 이들은 아마도 자유한국당의 후보자들일 겁니다. 이들은 정당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손쉬울 대상입니다.
비슷하게 우리가 지역정치 혹은 지역에 맞는 정책을 고민하는 것은 단순히 지역에 고유한 어떤 것을 찾는 것이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지역 내 이해관계는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가장 잘 압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잘 묶는 것은 기존의 기득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불가피하게 중앙정치의 가치적인, 이념적인 대립 대신에 지역 현안에 대한 이해도만을 중심으로 대결하게 됩니다. 이것이 과연 진보정치 운동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유리한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역정치는 구체적인 헤게모니 각축의 장입니다. 따라서 지역정치의 논리는 지역 기득권의 가장 약한 고리를 겨냥해야 하고 그것들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역정책의 대상 역시 지역에 고유한 정책 의제를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목하는 정치의제 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지역 기득권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의제를 ‘지역화’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테면 양천지역의 항공기 소음문제는 성북구나 은평구의 의제라고 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는 사드배치라는 중앙정치의 문제, 핵방폐장이라는 중앙정치의 문제와 논리나 성격에서 유사합니다. 즉 공익을 위한 사적인 부담을 어떻게 사회화할 것인가와 닿아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우리의 논리는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이들에게 일차적으로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그곳에 살고 있지 않는 건물주나 소유주에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항공기 소음을 겪으며 생활하는 이들에게 가야합니다. 이를 위해선 개별 분배 방식보다는 오히려 거주자들을 위한 생활편의를 높이는 투자로 유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개별 보상 방식은 불가피하게 무임승차 논리를 만듭니다. 오히려 해당 지역 주민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공서비스를 강화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를 위해서 지난 지방선거 당시 노동당 양천당협에서는 마을버스 공영노선을 신설하는 것에 대하여 토론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신월, 신정 지역의 항공기 소음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구청이 일반예산으로 흡수해 사용하지 말고 여기의 일부분을 신월, 신정 지역에 무상 마을버스를 운영하는 것으로 돌리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만약 이 주장이 지금한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드 문제와 핵 방폐장 문제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의제를 통해서 중앙의제에 대한 정치적 감각을 갖도록 할 수 있을 겁니다.
비슷하게 지역의 생활임금 문제도,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도 이렇게 지역화할 수 있는 매개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지역정책을 만드는 기본적인 관점이고, 진보적 의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가능성의 정치
진보정치의 어려움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보정치가 이미 익숙한 것들의 조합에 불과하다면 정책은 곧 능력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보정치는 현재에는 없는 것들을 발견해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 새로운 사회의 미래를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정책을 만든다는 것이 구름 위의 이야기를 무 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지역에서만 독특하게 있는 논리의 반복도 아니라면 우리에겐 새로운 정책 만들기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정책은 단순히 지역에 애정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지역의 정치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이 것이고 결국 그런 정치하기의 과정에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진보정치는 유권자인 시민에 대한 일방적인 시험이 아니라 유권자인 시민과 우리가 함께 변화하는 과정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다양한 진보적 정책의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끝]
첫 보팅을 해 보았는데. 0.01 올라가네요. 글도 잘 읽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올리고 나니 오타가 눈에 띄어 부끄럽네요. ㅠㅠ
정책학이란 책은 찾지 못하고 정책학 원론은 찾았는데, 아마 저 책이 맞겠죠?
이번 글은 그림이 있군요 ㅎㅎ 하지만 서식이... ㅠㅠ
@홍보해
맞습니다. 서식은 어떻게... 헤헤 가르쳐 주세요.
https://steemkr.com/kr-newbie/@goodcontent4u/3cvnki 이분 글을 좀 살펴보시면 감을 잡으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