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H의 환생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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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친구들과 강원도 원주에 다녀왔다. 한 번도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는 곳인데 직장 때문에 원주로 건너가 사는 친구와 오래간만에 연락이 닿아 얼굴도 볼 겸 얼렁뚱땅 원주행이 결정되었다.

차가 막혀 길에서 시간을 허비할까 봐 아침도 먹지 않고 일찌감치 출발했으나 맵을 확인하니 그다지 효과적인 전략은 아니었다. 5월의 주말에 서울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날이 무척 더웠다. 나와 젠젠은 H의 차에 올라타자마자 덥다, 목마르다, 물 마시자, 커피 마시자 난리였다. H가 기다렸다는 듯이 뒷좌석에 놓인 아이스박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커피 있어.” 그 안에는 커피 말고도 무언가 잔뜩 들어 있었는데 먹고 마시는 일에 언제나 진심인 H와의 여행에 이 정도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서둘러 목을 축이고 동네 빵집에서 사 온 단팥빵을 꺼냈다. 어째서 크림단팥빵이 아닌 그냥 단팥빵이냐며 투덜거리는 H에게 날이 너무 더워서 크림이 든 빵은 사지 않았다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전날 저녁 "그 집은 크림단팥빵이 맛있다"고 했던 H의 말을 잊고 있었다. 그래, 맞아. 그 집은 크림단팥빵이 맛있지. 지난달 H네 집에 놀러갔을 때 꼬마김밥 사 오라는 그녀의 요청을 깜빡한 적이 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컸다. 머쓱해져서 배가 부른데도 빵 하나를 끝까지 다 먹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차 안에서 급하게 먹은 단팥빵이 별 탈 없이 소화될 리 없었다. 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하얗게 질린 채로 손을 주물러야 했다.

원주에서의 첫 식사 메뉴로 H가 고른 음식은 알탕이었다. 최자로드에도 나온 원주 제1의 맛집이라나. 맛집에 대한 그녀의 열정 덕분에 어디에서 무얼 먹을지 골라야 하는, 무척 귀찮게 느껴지는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보통은 H가 제시한 두세 가지의 보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식이다. 가끔은 그마저도 귀찮다.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는 나는 어째서 메뉴를 고르는 일에 이렇게까지 신중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지만, 지독한 편식쟁이 주제에 할 말은 아니다.

살면서 알탕을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데다가 앞으로도 알탕을 먹을 일은 내 인생에 절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친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일단 가보기로 했다. 대기 줄은 예상보다 짧았고, 마침 앞번호의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 차례가 되어 운 좋게 빨리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역시 메뉴는 알탕뿐이었다. 젠젠은 이상하게 생긴 '그것들'을 자꾸만 내 접시에 놓아주며 먹어보라고 부추겼다. 알아서 먹을 테니 강요하지 말라고 짐짓 단호하게 못을 박고는 끝내 먹지 못했다. 눈 딱 감고 한입 먹어보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울까. 한 입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맛없으면 바로 뱉어 버려도 되잖아. 가끔은 나도 그런 내가 징글징글하다고 여긴다. 3인분을 시켰는데 1인분이 고스란히 남아 포장해 가기로 했다.

H의 진두지휘 아래 원주의 전통시장에서 수박 한 통과 소고기 두 팩을 사고, 편의점에 들렀다. 이미 샴페인 두 병과 레드 와인 한 병, 제주에서 온 전통주가 두 병이나 있었는데도 혹시 모르니 맥주와 와인을 더 사두는 것이 좋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H와 젠젠. 두 사람이 신중하게 맥주와 와인을 고르는 동안 뒷짐을 지고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았다. H가 냉동고에서 얼음 한 봉지를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얼음은 어디에 쓰려는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장보기를 마치고 카페에 들러 젠젠의 생일 케이크까지 사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원주 친구가 뮤지엄 산의 입장권을 할인가에 살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두었던 터라 마음이 급했다. “이제는 제발 목적지에 도착이라는 걸 좀 하자”고 조르는 내게 H는 “다 왔어, 다 왔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어쩐지 어른의 말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리조트 입구를 통과하자 왼쪽 창밖으로 싱그러운 잔디로 뒤덮인 골프 필드가 펼쳐졌다.

"아... 강이 보여야 하는데..."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H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그녀가 뭔가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너 설마 뭔가 로맨틱한 거 하려는 거야?"

H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대로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너 아쪼남걀이 했던 거 하려는 거지?"

H는 잇따른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에서 내리더니 아이스박스에 바리바리 싸 온 탄산수와 레몬즙과 헨드릭스 진을 꺼내어 진토닉 두 잔을 만들었다. 어떠한 호들갑도 흥분도 없이 경건하게 칵테일 두 잔을 담아내는 H는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잔에 든 얼음조각이 무너지며 보석처럼 빛났다. H는 그제야 웃으며 "어게인 울레똑뽀"라고 말했다. 내 생각이 맞았다. H는 10년 전에 있었던 어떤 로맨틱한 순간을 재현한 것이다.


H는 내 친구 중에 손꼽히는 똑순이인데 가끔 아주 엉뚱할 때가 있다. 라다크에서 가수 짙은에게 러브레터를 써 보냈던 친구가 바로 H다. 나와 젠젠은 라다크 카페 두레에서 H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나의 대학 친구 N의 친구였다. 라다크에 가자는 N의 꼬임에 넘어가 계획에도 없던 인도 여행을 하게 된 H는 이듬해 다시 라다크를 찾았다. 그해에는 H 말고도 친구들이 많이 왔는데 마침 라다크 친구가 자신이 운영하는 캠핑장에 우리 모두를 초대해주어 다 같이 놀러 갈 기회가 생겼다. 그 동네 이름이 울레똑뽀, 동행한 라다크 친구 중 한 명이 아쪼남걀이다. 친구들의 방문으로 합당한 휴업의 명분을 찾은 젠젠과 나는 간만의 교외 나들이에 흥분하여 오후 영업도 친구들에게 맡겨 버리고 먼저 울레똑뽀에 가서 후발대를 기다렸다. 레에서 차를 타고 10분만 벗어나면 어디든 시골인지라 제법 멀리 떠나온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일탈이라도 되는 양 유난을 떨어놓고는 게르 같이 생긴 천막 안에서 고작 낮잠이나 잤지만 말이다.

하늘빛이 제법 어두워졌을 때 나머지 친구들이 캠핑장에 도착했고, 친구들이 가져온 한국 식재료로 저녁상을 차렸다. 라다크 친구들도 맛있게 먹어주었다. 새카만 하늘 아래 펼쳐진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이따금 웃음이 터져 나왔고, 누군가의 콧노래도 흘렀다. 다 같이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보기도 했다. 사람이 만들어낸 거칠고 단단한 것들에게서 멀어지면 마음도 덩달아 예민하고 연약해진다. 쉽게 웃고, 쉽게 울게 된다. 그리고 H가 말했다. 울레똑뽀에서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어떤 색, 어떤 맛, 어떤 냄새, 어떤 말 등 다양한 재료가 완벽한 비율로 섞여 만들어낸 결정적 장면 때문이었다.

라다크 친구 아쪼남걀의 차를 타고 울레똑뽀로 향하는 길. 왼쪽으로 인더스강을 끼고 달리는 차 안에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침에는 해를 쫓아 달리는데 이 시간에는 해가 나를 쫓아와." 아쪼남걀이 길가에 차를 세우더니 잠깐 내리라고 했다고 한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으니 세레모니를 해야 한다고. 보드카와 주스를 꺼내 칵테일을 만들어 건네고 건배. 굽이치는 인더스강, 신비로운 빛깔로 물든 하늘과 고원의 마른 바람, 시원한 칵테일. 칵테일에는 얼음이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H는 이후로도 자주 이 장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마다 나와 젠젠은 윤종신의 환생을 부르며 H를 놀리기 바빴다. 그 장면의 8할은 아쪼남걀이 완성한 거라고. 라다크의 아름다운 장면들에 익숙해진 우리는 H가 묘사한 그 결정적 장면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거기까지 가서 낮잠이나 자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가끔은 둘러싼 모든 낯선 것들을 빠르게 익숙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나의 적응력, 나의 낙천주의, 그 마음의 힘이 미워질 때가 있다. 모든 것이 늘 낯설기만 하다면 온몸에 가시가 곤두선 채로 숨도 못 쉬고 살 것이 뻔한데도 그렇다.


울레똑뽀의 그 장면은 H에게 무척 큰 의미가 있다. H와 친구가 되었으니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내가 아는 H는 어쩌면, 울레똑뽀에서 다시 태어난 H이고, 앞으로도 환생 이전의 H를 끝내 만나지 못한 채로 우리는 계속 친구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제주에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싶다고 했던 H에게 아직도 그 생각이 유효하냐고 몇 년 뒤에 물은 적이 있는데 고개를 내저으며 죽을 때까지 월급 받을 거라고 하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는 어쩌면 나의 그것과 만날 수 있었던 H의 꿈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사실 H는 더 큰 꿈을 품었던 것이 아닌가. 그건 회사를 관두고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아는 H가, 언제나 지금에 있어서 좋다. H는 나의 모든 지금에, 그 장면 안에, 늘 있어 주었다. 카페 두레에도 있었고, 미니스트릿에도 있었고, 20세기의 여름에도 있었다. 젠젠과 내가 스페인 토레몰리노스에서 없는 돈을 쪼개어 살며 궁상떨고 있을 때조차도 H는 우리와 함께 있었다. 오늘은 맛있는 안주 사먹으라며 H가 보낸 돈으로 마트에서 한가득 장을 봐서 술상을 차렸던 날, H의 증명사진을 바탕화면에 띄운 노트북 앞에 샴페인 잔을 놓아두고는 제사상이냐며 웃겨 죽던 장면이 떠오른다. 사실 그때 나와 젠젠은 웃다가 울었는데 H는 그걸 모른다.

과거는 지나갔으니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없다. 그러니 언제나 지금뿐이다. 지금과 여기뿐이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눈을 감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걸 아는 H가 의식을 치른 것이다. 2012년 8월 울레똑뽀에서 다시 태어났던 그 순간을, 다른 시공간에, 2022년 5월의 원주에 재현하는 의식을. 깔깔 웃는 와중에도 내가 실은 제법 숙연한 마음으로 그 의식에 임하고 있었다는 걸 H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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