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50/50 (Domaine Anne Gros et Jean Paul Tollot, La 50/50 2014) 리뷰

in #kr2 years ago (edited)

왠 와인글에 이소룡인가 싶겠다만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이소룡 격언을 하나 올린다. 그건 "쓰지 않을 기술은 잊어버려라."이다. 영미권 일류 아티스트들이 자주 인용한 격언이기도 하다.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가능성보다 개연성을 보고 살아야 하고, 자신의 관심과 기억력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된다.

생각해보니 와인 품평이라는 것이 내게 가지는 가치가 전무한 듯 하여 일단 서문에 이것을 써본다.

만약 와인을 직업으로 하는 일을 선택했더라면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일단 나는 좋든 나쁘든 꽤 예민하다. 유년 시절 내 어머니는 내가 냄새로 요리나 식기의 상태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두고, 내 후각의 예민함을 탓하곤 했다. 게다가 난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닌데 세계문학전집 만큼 많은 분량의 글(물론 질을 비교할 수는 없고 분량만)을 써왔다. 생각해보면 천직이었을지도.

그런데 살다보니, 예술 쪽 일이라는 건 그 미적 감각을 담고 있는 그릇의 아름다움이 꽤 중요한 일이더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실은 그 종사자가 좀 생겨야 대중에게 환영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만약 내가 꽃미남으로 태어났다면. <날개>의 이상처럼 여자 등쳐먹고 집에서 글이나 쓰며 "나 작가요."하며 살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와인 한 잔 걸치고 낭랑하게 지껄이는 언어도 사람들이 꽤 그럴듯하게 들어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꽃미남으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정리해보면, 나는 꽃미남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소믈리에가 아니었다, 혹은 작가가 아니었다, 혹은 화가가 아니었다 등등 여러 단어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태생적으로 남자다운 사람이 아니다. 글을 쓰는 남자는 근본적으로 남자답지 않고 공대를 나온 단순하고 직관적인 부양본능을 가진 남자가 남편감으로 제격이라는 흔한 여초 사이트의 글을 인용하면, 일기장이나 끄적거리며 자기 연민에 빠진 청년기를 보냈던 나는 좋은 남편감도 아니고, 믿을만한 근로자도 아니며, 실은 뻔했지만 훌륭한 군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생긴 게 우직한 탓에 어려서부터 남자다움을 강요 받았다. 어느 지하철 역에서 두 다리에 얼굴을 뭍은 채 통곡을 하는 어떤 여자에게 지나가는 남자들은 도움이 필요하냐는 식의 말을 걸었지만(실은 나도 걸었다네), 내가 길바닥에서 통곡을 했다면 사람들은 다 나를 피해갔을 것이다. 내 징징거리는 자기연민 따위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려다 보니 "남자다움"이라는 과제를 완수해야 했고, 연기도 평생하면 인격이 된다고 어느 시점부터는 남자답다는 말도 꽤 들었다. 직업도 법조인이라는 보수적인 직역을 택하게 되었다. 유전자도 중요하지만 환경도 중요하다. 자기 태어난 기질도 중요하지만 그걸 담은 그릇이라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실은 와인 맛이라고는 전혀 구별할 수 없게 생겼을 뿐 아니라 실제로 경험도 부족하여 그럴 개연성이 높은, 이 분야에 아무 지식이 없는 내가 누군가 힘들게 만든 와인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품평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삶에서 단절할 가능성 중 하나를 그냥 다시 펼쳐보는 것에 지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이미 써놓은 와인에 대한 많은 글들 중 신랄한 비판에 대한 것들은 조용히 삭제하였다. 남 괴롭히고 겁박하는 거야 지금 하는 생업으로도 충분하고 내가 비싸게 사마신 것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맛이 형편 없다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어야 한단 말이냐.

근데 이 와인에 대해서 내가 쓴 메모를 보니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내용이 많아서 지우려다가 기왕 쓴 게 아까워서 결국 포스팅을 올려본다. 그래도 각양각색의 비하를 뒤섞은 와인들에 비해서는 괜찮은 와인인데, 너무 심한 비평을 쓴 것들은 다 지우다보니 본의 아니게 이 와인이, 내가 올린 와인들 중 평이 제일 박한 와인이 되었다. 서문이 길었지만 여하간 아래부터는 그에 대한 메모 정리.

이 와인의 이름은 LA 50/50이다.은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업계에서 유명하시다는, 아직 살아계신 분(Anne Gros)과 그 분 남편(Jean-Paul Tollot)이 50퍼센트씩 투자해서 LA 50/50이라고 한다. 공식적인 와인 등급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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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신생 와인인데 공식적 등급은 맹 위인 AOC 등급이다. Minervois AOC라고 적혀있는데, 남프랑스의 Minervois 지역의 AOC 등급 와인 말하는 것. 맞겠지?(아니면 댓글로 가르쳐주시길). 개인적인 평가로는 첫 맛은 훌륭하고 뒷 맛은 좀 약하다. 첫 맛은 투박하고 뒷 맛은 훌륭하다. 도수도 낮지 않다고 생각되고 와인 평론가들의 "스파이시"하다는 맛이 이게 아닐까 생각된다. 첫 맛에 향은 많이 느끼지 못했다. <파리의 심판>에서 프랑스 최고 와인 중 하나라는 몽라셰를 "향이 없으니 미국 와인이다."라고 평한 거물 소믈리에도 있으니 첫 맛에 대단한 향을 못 느꼈다고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돈 주고 사서 마시고, 이름을 기억할 가치가 있는 와인의 마지노 선에는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하듯 그 이하 와인들에 대한 품평들은 다 삭제하였기에 어쩌다보니 남긴 글 중에서는 제일 박한 평이 되었다.

그 동안 싸고 맛있는 와인이 많다거나 또는 라벨을 떼면 구분할 수 없다 이런 글을 써보고 싶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결혼식장에 선물로 주는 와인이나 편의점 와인을 사서 마셔보며 맞춰보기 놀이를 하곤 했다. 블라인딩 테스트가 아니라 블라인드의 이상한 테스트. 다만 비교적 적중률(?)은 높았던 편이다. 그 와인이 정말 비싼 와인인지 아닌지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업계에서 나름 인정 받은 와인인지는 구분할 수 있었다.

싼 와인과 비싼 와인 가격표를 바꾸고 전문가에게 테스트를 요청하는 동영상이다. 더 비싼 와인이 무엇인지 맞추어보라는 유튜버의 질문에 전문가가 답을 하자, 유튜버가 반대로 쓴 가격표를 보여준다, 당신이 틀렸다고. 그러자 전문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당신이 틀렸지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저 가격은 당신이 반대로 적어놓은 것이라고.

<파리의 심판> 같은, 실은 상표를 떼면 무엇이 더 훌륭한지 판단할 수 없다는 그 성찰도 인정한다. 하지만 적어도 거기 올라간 와인들은 미국산 와인이든 프랑스 와인이든 간에, 그 나라를 대표하는 와인들 아니겠는가. 21세기 현대인에게, <시민 케인>과 <기생충>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영화인지는 자기 주관의 영역이겠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나 <용가리>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보다 훌륭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은 주관이 아니라 객관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 음악이란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만 있다는 어떤 격언과도 비슷할지 모른다.

비록 비전문가나 내가 그간 꼬깃꼬깃 적어놓은 수 많은 정체불명 와인들에 대한 혹평과 별도로, 그래도 이 와인은 그 가격대에 아는 와인이 없다면 사 마실 가치가 있다는 평은 꼭 나쁜 평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실 가치가 없는 것들도 많았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 와인을 "좋은 와인"과 "나쁜 와인"의 이분법으로 나누다면, 대중적 와인이라는 것과 별도로 이 와인은 "좋은 와인"이다. 아마추어로서 내 생각은 그렇다.

두서나 주제가 부족하니 나머지는 사진으로 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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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마셨다는 인증샷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다. 실수.

뱀발이지만, 그냥 저 할아버지 전문가의 인생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부럽다. 자질구레한 형식과 이름은 쓰지 않을 것이니 잊어버린다고 하여도 본질을 판단하는 능력은 중요한듯 싶다. 꽃미남이 아니라 소믈리에는 하지 못했고, 죽어서 지옥에 갈 변호사나 하게되었지만 기왕 시작한 거 나도 내 길에서 저렇게 살아야지. 쓸데 없고 아무도 안 읽을 와인 품평이나 하지 말고. 기왕 쓴 게 아까워서 올렸다.

이 와인에 대한 전문가의 수준 높은 글은 아래 링크를 참조.

https://wineys.tistory.com/225

공식적인 홈페이지는 여길 참조.

https://vinocus.co.kr/mall/m_mall_list.php?ps_ctid=10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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