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일기
또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생각에 다른 이유를 떠올려도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잠에서 깨어난 건 그 모든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수도, 아니면 내가 결코 떠올리지 못 한 어떤 이유로 인한 것인지 모른다. 그 이유들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곱씹는 과정은 나에게 스트레스만 줄 것이 분명하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깨어났고 다시 잠들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만을 침대에 내려놓고 나는 일어났다.
쓰고 있던 글이 있다. 아무리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도저히 내 마음에 들도록 고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있겠다고 다짐한 글이 있다. 그 글은 내 안에서 오래 머물다 이제서야 조금씩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지만, 이미 시기를 놓쳐버려 나에게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을 더 많이 안겨주고 있다. 적당한 시기를 놓치면 아이에게도, 산모에게도 좋지 않다. 그리고 아이는 산모의 상태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내가 괴롭다면 그 글에서도 괴로움이 묻어날거란 생각에 산통은 길어진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그 흐름을 이어가고 싶지 않아서 그 글은 데스크탑에 두고 랩탑을 가지고 길을 나섰다.
카페에 도착해서 생각해보니 평소보다 훨씬 빨리 카페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느긋하게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오늘 이토록 발을 부지런히 놀린 이유는 그만큼 내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증거일까? 나는 그냥 날씨가 추워져서라고 생각한다. 그냥 실내로 들어오고 싶었을 뿐이다. 카페에는 매번 올 때마다 사람이 이전보다 많다. 처음에는 나처럼 랩탑을 앞에 둔 사람만 몇 있었는데, 이제는 혼자 온 사람이 없고 다들 무리를 지어서 웅성거리고 있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은건 아니라 다행이라며 자리에 앉았다. 웅성거림에 섞이지 않고 튀어나오는 취객의 함성은 견디기 힘들지만 단순한 웅성거림은 거슬리지 않는다.
요즘은 근처의 길거리를 다니면 서글프다. 동쪽을 걸으며 보면 예전에는 불이 꺼지지 않던 길들이 이제는 어둡다. 십수년을 자리를 지키던 간판들이 사라졌다. 반대로 서쪽은 번창한다. 새로 닦은 길, 새로 지은 건물들이 늘어서있다. 결국 동쪽이고 서쪽이고 예전과는 다르다. 시간이 흐르며 번창하고 쇠퇴하는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지만, 그 변화가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어디에 새로 도로를 놓는다거나 터널을 낸다거나 하는 이유로 찾아온다는건 서글프다.
지난 주에는 생일이었다. 특별하진 않았다. 친구를 만나긴 했지만, 생일이라 만난건 아니고 그 친구는 그 날이 내 생일이라는 것도 몰랐다. 내가 생일에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연락하지도 않았고, 그냥 술을 마시자기에 나갔을 뿐이다. 그 친구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있었다. 매일 연락하고 자주 만나다가, 언젠가부터 연락도 자주 하지 않고 나를 피한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나와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고 했다. 나와 친하지 않아서, 어려워서 내가 만나자고 하면 만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서운함이 생겼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친구가 나중에 이야기 하길, 나와 그는 친했다고 한다. 그냥 그렇게 말한 것이라 한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여름이라면 이 시간이면 밝아오기 시작했겠지만 밤이 길어진 지금은 아직 어둡다. 카페에서 일출을 참 많이도 보았지만, 오늘은 일출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밝게 빛나는 태양이 아니라 희뿌연 먼지가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을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이만 내려놓고 태양이 보이지 않는 내 방으로 돌아가려 한다.
오늘도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그냥 일기를 남긴다.
한 편의 수필이나 소설의 한 장면을 묘사하듯 써내려가는 글이라 확실히 글 솜씨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네요 ㅋ 가즈앗!!!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친구는 만들기도, 계속 유지하기도, 연을 끊기도 어렵네요.
감사합니다. 만들려고 만들어지는 것도, 억지로 이으려고 이어지는 것도, 끊으려고 끊어지는 것도 아닌게 친구인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