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5권(1)
제10편 제7기 작전
제1장 중공군 개입과 피아의 상황
제1절 중공군 개입과 국제정세
제1항 중공군 개입 직전의 제반 정세
6.25 전란 발생 이래 낙동강 전선까지에 취하여진 아군의 지연작전은 적 괴뢰군에게 상당한 출혈을 강요하였고, 동년 9월에 들어서 거듭되는 국련군의 증강과 전선 정리는 전면적인 반격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 만회의 실질적인 근거로서 전세를 중요시하는 화부(華府) 및 자유세계에서는 단기 4283년(1950년) 9월에 개최되는 국련 총회에 결부시켜 한국 문제에 대한 신국면을 타개하고자 하는 것이 당시의 예민한 정객과 군사 평론가들의 일치되는 견해였다.
이에 앞서 동년 8월 30일 에치슨 미 국무장관은 중공군과 38선 돌파 문제에 관하여 극히 주목할 만한 견해를 공표하였는데 이 견해는 동년 8월 31일에 열린 트루만 대통령의 기자단과의 회견과 그리고 동년 9월 1일에 거듭 발표된 노변담화(爐邊談話)에서 명확한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 내용이란 첫째로 미국은 전란이 끝나는 대로 대만에서 미 제7함대를 철수시키는 동시, 대만 문제는 대일 강화의 한계 내에서 서로 같이 해결할 것이며 다른 군대가 한국 전란에 개입하지 않는 한 전면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확언하였고, 둘째로 미중 관계에 언급하여 중공군 개입을 미리 경고하였던 것이며, 38선에 관하여 그 돌파 여부는 국련에 매었다고 언명한 바 있었다. 이 성명은 솔직하게 승전의 자신을 표명하는 동시에 종전기의 국제적 위험에 대하여 외교적 포석을 견고히 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만주 집결설은 국부 계통 통신사에 의하여 일찍부터 세계에 보도된 바 있으며, 동년 8월 26일에는 북경에서 개최된 중소회담(모택동, 모로토프, 데레비양코)에서는 중공의용군의 한국 파견 문제가 결정되었다는 설이 유포되고 있었으며, 9월 2일에는 괴뢰, 중공 합동 참모부가 장춘에 설치되는 한편, 임표 휘하의 5개 군 15만 명이 대기 중에 있다고 보도되었던 것이다.
소위 조중 상호 방위 협정의 존재로 보나 공산측의 중대한 전략적 지반의 상실 방지로 보나 국군 및 국련군의 북진에 따라 중공군 개입의 필지성(必至性)은 농후하여 가고 있었으며, 따라서 9월 10일 미 에치슨 국무장관은 “만약 중공군의 개입은 중공의 멸망을 초래할 뿐이다”라고 경고하였다. 거듭하여 동 16일에는 미 러스크 국무차관보가 “미국은 한국 내에 군사기지를 둘 의사가 없으며 인접국은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여 중공군의 개입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중공은 마침내 암암리에 군대를 입한 시켰으며 이에 대하여 마샬 미 국방장관은 9월 20일 중공군 일부 입한설을 확인함으로써 세계는 새로운 긴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긴장에 9월 15일 국군 및 국련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 작전의 전개는 냉전을 통하여 대치중에 있는 세계 특히 공산 진영에 대하여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거듭되는 추격 작전과 9월 28일 수도 서울 탈환과 전격적인 북진 공격을 둘러싼 국제 외교전은 새로운 각도에서 세기적인 이목을 한국으로 집중하게 하고 있었다. 이처럼 국군과 국련군이 전세를 만회하여 계속 북진 공격을 감행하자 국제간에는 거듭 38선을 둘러싸고 심각한 논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9월 27일에는 국련 총회 미국 대변인은 6월 27일 안보결의에 의하여 이미 그 권한을 국련군 사령관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였고, 7월 17일 “38선은 자동적으로 소멸되었다고”고 성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견해를 다시금 상기시키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