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부분과 전체
"난 최근 철학자 말브랑슈의 글을 읽었어. 말브랑슈는 이런 주제를 논하고 있지. 말브랑슈는 표상이 만들어지는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해. 하나는 방금 네 말처럼 대상들이 감각적 인상을 통해 직접적으로 인간의 정신 속에 표상을 만든다는 거야. 하지만 말브랑슈는 이런 견해를 거부해. 감각적 인상들은 사물이나 표상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지. 두 번째 가능성은 인간의 정신 속에 처음부터 표상들이 들어 있거나, 인간의 정신이 최소한 이런 표상들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이런 경우 인간의 정신이 감각적 인상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표상들을 기억해 내거나, 감각적 인상의 자극을 받아 표상들을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하겠지. 하지만 말브랑슈가 가장 옹호하는 가능성은 마지막 세 번째 거야. 즉 인간의 정신이 신의 이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 인간의 정신이 신과 연결되어 있기에, 신으로부터 표상을 만드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거야. 정신에 상이나 표상들이 주어지고, 정신은 이를 이용해 무수한 감각적 인상을 정리하고 개념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거지."
"너희 철학자들은 정말이지 너무 빠르게 신학과 손을 잡아. 일이 어려워지면, 늘 모든 어려움을 저절로 해결하는 위대한 미지의 존재를 등장시키지. 하지만 나는 그런 설명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네가 질문을 제기했으니 말인데 그렇다면 나는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그런 표상에 이르는지를 알고 싶어.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말이야. 정신과 표상은 이 세상에 있는 거잖아. 네가 표상이 경험으로부터 저절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표상이 어떻게 인간 정신에 처음부터 주어질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해. 그러니까, 어린아이들도 이미 그것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표상들, 또는 최소한 표상을 만드는 능력이 타고난 것이라는 거야? 그런 주장은 표상들이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이어진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는 생각에 가까운 것 같은데. 거기서 그것이 현재의 경험이냐, 과거 세대의 경험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
"아냐, 내 생각은 달라. 우선은 학습된 것, 즉 경험이 과연 유전될 수 있는지 극히 의심스럽기 때문이고, 한편으로 말브랑슈의 생각은 신학을 동원하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편이 오늘날의 자연과학에 더 잘 맞겠지. 내가 한번 설명을 해볼게. 말브랑슈의 생각은 다음과 같아. 세계 질서, 자연법칙, 화학 원소의 생성과 그 성질, 결정의 형성, 생명의 탄생 등에 작용하는 질서가 인간 정신의 탄생에도 관여하고, 인간 정신 안에서도 활동한다는 거야. 그런 질서가 사물과 표상을 연결시키고 개념 구분을 가능케 해. 그것이 실재하는 구조를 가능케 하지. 이 구조들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관찰할 때에야 비로소 객관적인 것 - 사물 - 과 주관적인 것 - 표상 -으로 나뉘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말브랑슈의 이런 명제와 표상이 경험에 근거한다는 자연과학의 견해는 표상을 형성하는 능력이 외부세계와 유기체의 관계를 통해 발달해왔다고 본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어. 하지만 말브랑슈는 동시에 이런 연관은 단순히 인과적인 과정을 통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해. 따라서 여기서는, 결정이나 생명의 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형태학적 상부 구조들이 작용하며 그것들은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 쌍으로는 충분하게 파악될 수 없어. 따라서 경험이 표상보다 앞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비슷해.
본래 나는 너희들의 대화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어. 다만 원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단순히 경험만을 논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는 원자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좀 더 기본적인 구조니까 말이야. 그래서 원자와 관련해 표상과 사물을 구분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거야. 물론 네 교과서에 실렸다는 갈고리단추 같은 그림은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 대중적인 문헌에 나오는 원자에 대한 그림들은 다 마찬가지야. 원자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들이 오히려 이해를 방해하는 셈이지. 그건 그렇고 아까 네가 언급한 '원자의 형태'라는 개념은 신중하게 다뤄야 할 거야. '형태'라는 말을 아주 일반적으로 이해하여, 공간 개념으로뿐 아니라, 내가 방금 말했던 '구조'라는 말과 비슷하게 취급할 때만 이런 개념에 조금이나마 친숙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독일의 어느 고등학생들의 대화이다. 무려 고등학생들이다. 한가한 세월을 보내는 현대의 고등학생들이 영어단어와 씨름할 때,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패전국의 고등학생들은 이제 막 드러나진 미지의 세계, 원자의 세계를 바라보며 콜럼버스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고양이는 직접 볼 수 있어. 고양이의 경우에는 감각적 인상을 표상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 고양이와 관련해서는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 즉 대상으로서의 고양이와 표상으로서의 고양이가 있어. 그러나 원자는 달라. 거기서는 표상과 대상이 더 이상 구분되지가 않아. 원자는 더 이상 그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지."
"하지만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은 달라요. 물리학에서는 정해진 길을 따르다 보니 - 20년 전 정해진 목표는 전자기 현상의 이해였어요 - 저절로 철학의 기본 입장, 즉 시간과 공간의 구조와 인과율의 유효성이 흔들려 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어요. 물리학에서는 바야흐로 아직 조망할 수 없는 신대륙이 열리고 있어요. 최종적인 답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세대의 물리학자들이 머리를 싸매야 할 거예요. 저는 이런 분야에서 뭔가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와요."
보이는 세계를 해석하는 틀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신대륙은 기존의 관념을 뒤집지 않고서는 바라볼 수조차 없는 미시未視의 세계이다. 독일의 천재 고딩들의 대화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원자의 세계 역시, 무슨 세계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상태였다. 그리고 세상은 전쟁이 뒤덮었고, 청년들 역시 시대정신과 미지의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 했다.
패전과 그에 이은 내전으로 당시 독일의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많은 독일인들이 갈등과 절망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이 시기에 하이젠베르크는 바이에른 지방 중심의 독일 청년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은 바로 이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느 자서전적인 회고록과 달리, 어릴 적 이야기나 가족이 아니라 하이젠베르크 자신이 평생 큰 애정을 지니고 있었던 청년운동 이야기로 시작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하이젠베르크가 다닌 막스 김나지움은 군사예비연합의 바이에른 청년 지부에 속해 있었지만, 당시 바이에른의 젊은이들은 정부가 만든 군사 예비 연합이 아니라 '길을 찾는 사람들 Pfadfider'이라는 조직에 더 끌리고 있었다. 이는 영국에서 시작된 보이스카우트의 독일판으로서 군대식 조직과 청교도적 국제주의 표방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길을 찾는 사람들'의 레겐스부르크 지부를 중심으로 기성세대의 낡은 관념과 수구적인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가치를 추구하는 청년운동이 결성되었다. 이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볼프강 뤼델과 에버하르트 뤼델 형제는 막스 김나지움의 또래 친구들을 모았다. 이 단체는 청소년의 자립적인 활동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볼프강 뤼더는 수학과 음악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많은 학생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지적인 자신감과 준수한 용모에 훌륭한 리더십을 갖춘 선배를 그룹의 지도자로 끌어들이자고 제안했다. 바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중상류층의 보수적 가치관을 내재화하면서 바이마르의 공화주의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낡은 왕정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이 책의 1장에는 전쟁이 끝난 직후의 하이젠베르크의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잘 드러난다. 바이에른의 소비에트 공화주의자들을 진압하는 데 참여한 일이며, 그 와중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던 기억이며, 원자 이론을 설명하는 당시의 과학 교과서를 읽었을 때의 당혹감 들이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
청년운동과 고전 음악에 대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하이젠베르크는 이론 물리학자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하이젠베르크와 고민하던 청년들 중의 일부는 이론 물리학에 자신의 삶을 투신했다. 그들은 양자론의 아버지 닐스 보어를 스승 삼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했던 원자의 세계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계의 미래에 드리운 힘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점점 빠른 가속기가 출시되다 보면 핵물리학을 기술적으로 응용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새로운 화학 원소를 인공적으로 다량 만들어 내거나, 연소에서 화학 결합 에너지를 활용하는 것처럼 핵들의 결합 에너지를 활용해서 말이에요. 영국의 어느 미래 소설을 보면, 정치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자, 한 물리학자가 조국을 위해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데우스 엑스 마키나 처럼 모든 정치적 어려움을 타개해 버리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물론 말도 안 되는 꿈에 불과하겠지만요. 베를린의 물리화학자 네른스트 역시 지구는 사실 화약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당분간은 이 화약고를 폭파시킬 만한 성냥개비가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라고요. 이 또한 사실이에요. 바닷물 속에서 수소 원자핵 네 개가 헬륨 원자핵 하나로 결합될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방출되어 화약고 비유를 훨씬 능가할 수도 있을 겁니다."
최종병기를 만들 수 있는 최종 물질을 이들은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힘과 마주하며 어느 누가 이것을 손에 쥐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손에? 오펜하이머의 손에?
"자네도 '우라늄 클럽'에 들어왔군. 대체 우리가 이 과제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자네도 생각이 많았겠지. 우리의 과제는 우선은 흥미로운 물리학인데 말이야. 지금이 평화로운 시기이고, 연구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면, 우리는 파급 효과가 어마어마한 연구를 하게 된 것을 기뻐했을 거야. 그러나 지금은 전쟁 중이고, 우리가 하는 일들은 우리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어.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해."
2차 대전의 발발로 독일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군대에 징집되었다.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9월 26일 바이츠제커와 함께 베를린 육군 병기국에 도착한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물리학자들과 더불어 원자에너지를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 비공식 이름은 '우라늄 클럽'이었다.
1939년 1월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핵분열을 발견했다는 논문을 제출했다. 우라늄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켰더니 바륨 원자핵이 나온 것이었다. 한은 이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결과를 스웨덴으로 망명해 있던 리제 마이트너에게 보냈고, 마이트너와 오토 프리슈는 이것이 연쇄반응이 될 수 있음을 계산하고 실험으로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1939년 4월 독일 제국교육부의 빌헬름 다메스르 중심으로 '우라늄 클럽'이 만들어졌다. 오토 한, 발터 보테, 쿠어트 디프너 등이 주축이 된 1차 모임에서 주된 관심은 '우라늄 기계' 즉 핵반응로를 건설하는 데 있었고, 겉으로는 핵 반응로를 이용하여 막대한 에너지를 얻는 것이 목표라고 내세우고 있었다. 핵무기와는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틀러 치하에서 그의 동료들 중 특히 유대계 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망명을 해야 했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남아야 한다. 누군가는 히틀러를 저지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전쟁 이후의 청춘들을 위해 연구를 이어가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페르미는 하이젠베르크에게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와서 물리학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하이젠베르크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독일에 남아서 과학을 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가르쳐 전쟁이 끝난 뒤에 이들이 독일 과학계를 재건하는 것을 돕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전쟁은 끝이 났다. 최종 병기로 말미암아. 하이젠베르크가 참여한 '우라늄 클럽'이 핵폭탄을 개발하고 있었는지는 논쟁이 분분하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기술과 비용의 문제를 들어 나치 독일의 핵폭탄 개발 계획을 좌초시켰다고 주장한다. 다만 역사적 사실은 나치 독일의 핵 개발이 두려워 대동단결한 '맨해튼'의 동료 학자들이 물량과 인력을 대거 투입해 최종 병기를 기어코 완성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쏘았다.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 개발을 주도했거나 참여했는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동시에 생각해야 할 문제는 바로 연합국 측의 맨해튼 프로젝트이다. 정작 핵폭탄을 개발하고 이를 전쟁에 사용해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죽게 한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또는 더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다면, 그 논의는 어딘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동기 중 하나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명분이었으나, 독일의 핵무기 특히 핵폭탄 개발은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또 하이젠베르크의 주장대로 독일의 핵분열 연구가 잠수함이나 전차의 동력으로 핵 반응로를 이용하려는 데 있었다면, 처음부터 핵폭탄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집중시킨 미국 행정부와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물리학자들은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과학 연구에 아무런 윤리적 성찰도 하지 않은 채 독일이 먼저 개발할지 모른다는 가상의 상황을 상정해 과학을 남용한 셈이 된다.
그 남용은 정작 독일도 미국도 연합국의 땅도 아닌 일본 열도 한복판을 타겟으로 했으니 비겁하고 아이러니한 역사가 아닌가.
어쨌거나 볼 수 없던 미시의 세계를 연 양자론은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는지, 멸망의 시계를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는지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인류는 이 기술을 활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향한 대항해를 시작했고 그것은 말 그대로 '불확정의 세계' 그 자체이다.
맨해튼 물리학자들의 독일의 핵 개발에 관한 측정이 불확실했듯, 측정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핵폭탄을 탄생시켰듯,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세계는 모두 확률과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측정하려는 행위가 대상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이 상호작용은 어떤 것도 전체로 또는 부분으로 확정 지을 수가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지나간 역사가 맺은 상이고 돌아보면 모든 것이 또다시 변화한다. 세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청년의 생각은 전쟁을 거치며 더욱 성숙되었다. 그것은 부분과 전체에 대한 이해이다.
젊은 시절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를 통해 세계라는 전체를 이루는 부분으로서의 원자를 만난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원자물리학을 통해 부분과 전체의 만남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이 '소립자와 플라톤 철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은 하이젠베르크가 은퇴할 무렵에 주목하고 있던 것이 세상을 이루는 원자와 세계 전체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물리적 세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십대 후반 나이에 만난 <티마이오스>의 원자론에서 출발한 이 책은 70이 다 된 나이에 다시 소립자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적 사유로 연결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책을 내기 2년 전인 1967년에 <괴테 연보>에 <괴테의 자연상과 기술-과학적 세계>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서도 <부분과 전체>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주제들이 등장한다. 괴테가 바라보는 자연의 상에서는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분이 사라지며, 안과 밖이 다르지 않으며, 부분들을 단순하게 모아 놓은 것이 전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부분 속에서 전체가 반복된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부분은 전체를 품고 있는 것이다. 100여 년 전 독일의 고등학생들의 대화 속에 인류의 미래가 품어져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리하여, 인류가 원자의 세계를 이루는 양자역학의 대양을 항해 중이라는 것을 이제 안다. 아니 알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받아들인다. 그것이 뭔지는 모르면서 그 작용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마치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인 양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사과는 떨어져 내리니까.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으니 이해하는 척은 하지 않겠다. 다만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그 법칙 위에 살고 있으니 그 방식을 따라 선택하고 세상을 경험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전체를 품고 있는 부분으로서, 서로 상호작용하며 신대륙을 찾아 나서는 인류의 미래로서 말이다.
[위즈덤 레이스 + Book100] 017. 부분과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