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쳐 속의 이데올로기 Vol 2. 마블 코믹스 - 시빌 워
마블 코믹스의 시빌 워 타이인은 2006년 여름부터 2007년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타이인이라는 게 뭐냐면, 그 기간 동안 마블 코믹스에서 나오는 여러 종류의 코믹스 모두 동일한 사건에 연관된 이야기를 그린다는 겁니다. 시빌 워 기간 동안 스파이더맨은 뭐했냐, 아이언맨은 뭐했냐, 엑스맨은 뭐했냐 이런 게 각각 다른 만화책에서 나온다는 거죠.
마블 코믹스의 금자탑. 마블은 시빌 워 이후 지금까지도 시빌 워를 뛰어 넘는 기획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마블 코믹스 세계에 뉴 워리어즈라는 애송이 히어로 집단이 있었습니다. 얘들이 유명해지려고 자기네 활동을 TV생중계 하고 그랬는데, 어느날 악당 집단하고 싸우다가 사고가 터진 겁니다. 악당 하나가 자폭해서, 히어로랑 악당 뿐만 아니라 근처 초등학생까지 인명피해가 발생하는데, 그게 TV생방송으로 나가버린 겁니다. 사실 이 사건 전부터 초인등록법안의 입법 활동이 있었습니다. 초능력을 갖는 슈퍼 히어로들을 국가에 실명으로 등록, 활동을 규제하고 지원하기도 하자는 거죠. 슈퍼 히어로가 국가 공무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발적 봉사활동 차원에서 일을 하던 대부분의 히어로들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뉴 워리어즈의 깽판 때문에 여론은 급반전 합니다. 또한, 원래는 법안 반대파였던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도 생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입법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론을 찬성파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그때까지 익명으로만 활동하던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의 정체를 공개하게 하고 자신과 같이 찬성파에 섰다는 것을 천명하게 합니다. 한편 법안이 히어로의 인격과 자유 침해, 그리고 국가 권력에 의한 히어로 활동 왜곡을 일으킨다고 생각해서 완강하게 반대하는 집단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캡틴 아메리카였죠.
주목할 점은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각각 상징하는 바입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코스튬과 이름에서 보이듯 애국심의 상징입니다. 캐릭터의 태생도 2차세계대전 때 미군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죠. 아이언맨은 재벌2세, 부자, 노력보단 타고난 재능, 금수저의 상징입니다. 두 캐릭터는 뚜렷이 다르지만 어쨌건 미국의 보수층의 사회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러나 시빌워에서 이들이 다투는 초인등록법안을 아래와 같이 비틀어 보면, 이 법안의 갈등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라고 거칠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초인 = 초월적 힘을 지닌 거대 자본
등록법안 = 민주적 법안에 의한 자본의 통제, 시장에의 개입과 중재
즉 재벌2세 아이언맨이 민주당이 주장할 법한 좌파적인 법안을 주도한 거죠. 반면 흙수저 퇴역 군인 캡틴 아메리카는 국가의 개입에 결코 반대하는 공화당적인 입장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캡틴 아메리카가 표상하는 바가 단순히 미국이라는 국가의 권위와 애국심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캡틴 아메리카의 캐릭터 특성은 미국인의 전통적인 가치 그 자체에 가깝습니다. 이상적인 미국인은 캡틴 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자유, 평등, 정의를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할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가 자신의 국가관, 정의관을 법안 찬성한 것을 후회하게 된 스파이더맨에게 들려준 연설을 한 번 봅시다. 캡틴아메리카는 자신의 국가관을 마크 트웨인의 기고문을 인용해서 표현하였습니다. (마크 트웨인 소설은 참으로 "미국적"입니다. 나이 들어서 다시 읽어 보면 그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됩니다)
"난 미국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이해했던 때가 기억나네... 애국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난 한 명의 꼬마에 불과했어... 수백 년 전, 가끔 그렇게 느껴지기도 해. 아마 12살이었을 거야. 난 마크 트웨인을 읽고 있었어. 그리고 그는 내 심장을 울리는 뭔가를 썼더군... 너무 강력하고 너무 진실해서 내 인생을 바꿔놓을 것을. 나는 그것을 수백번 반복해서 되뇌일 수 있을만큼 외워버렸네. 그는 이렇게 말했어...
공화국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지금 안장 위에 올라타 있는 정부인가? 아니,
정부는 임시 하인에 불과하다
.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하는 것은 정부의 특권이 되어서 안 된다. 정부의 기능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고 명령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는 신문인가? 교회 설교단인가? 아니, 그것은 국가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지 국가의 전체는 아니다. 그들에게는 명령권이 없으며 명령권의 아주 일부만 차지할 뿐이다. 군주제에서는 왕과 그의 가족이 곧 국가이다.
공화국에서는 민중의 평범한 목소리가 국가가 된다.
여러분 모두는 자신을 위해, 자기 스스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야한다. 그것은 엄숙하고 무거운 책임감이며 교회, 언론, 정부의 괴롭힘 또는 정치인의 공허한 캐치프레이즈 따위에 가볍게 내던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든 이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떤 길이 애국적인지 어떤 길이 그렇지 않은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해야 한다. 이를 회피하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스스로의 신념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자기 자신과 조국 모두에 자격없고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가 되는 일이고, 사람들이 당신을 그렇게 낙인지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만약 온 나라 전체에서 당신만이 한 방향의 길을 택하면, 그리고 당신의 신념이 그것을 옳은 길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조국에게 임무를 다한 것이다. 머리를 꼿꼿이 들어라. 부끄러워할 게 없다."
(나무위키 번역 - 원대사와 후반부가 다름)
시빌 워에서는 어느 쪽이 악이고 어느 쪽이 선인지 명확하게 가르지 않습니다. 단지 서로 다른 신념의 영웅들끼리 가치관의 차이로 벌이는 갈등으로 묘사합니다. 그런 것 치고는 초인들인 만큼 도시를 신나게 박살내면서 유혈 충돌을 일으키긴 합니다만요. 마치 "악당들" 처럼요. 결국 그 사실에 스스로 놀란 캡틴 아메리카가 항복, 자수함으로써 시빌 워 소란은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이후 캡틴 아메리카는 악당 레드 스컬에게 저격을 받아 사망하게 됩니다. (미국 코믹스에서 사망=나중에 다시 살아난다는 뜻) 아이언맨은 캡틴의 시체 앞에서 허탈하게 한 마디 합니다.
"이게 뭐하자는 짓이었지? (It wasn't worth it.)"
시빌 워는 현대 미국의 혼란스러운 이데올로기 상황이 반영된 작품입니다. 전통적 자유의지주의와, 현대적인 사민주의의 갈등이죠. 코믹스의 묘사는 되도록 중립을 지키려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중간중간 작가들이 표현한 방법론에 있어서, 그래도 캡틴 아메리카가 보다 정의로운 것으로 무게 추가 쏠립니다. 코믹스 팬의 여론도 캡틴 아메리카가 짱 멋있고 아이언맨은 더러운 악당 놈 취급이었습니다. ^^;;; 아무래도 법과 정부라는 권위와 힘을 업은 아이언맨 측보다 캡틴 쪽이 약자였으니 그렇게 보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근간에는 미국인의 전통적인 정부 불신, 개인의 자유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법안보다 숭고한 개인의 도덕성이 보다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미국의 전통적인 자유의지주의 가치 말입니다.
코믹스 시빌 워 타이인의 엄청난 상업적 성공은 당연히 여러가지 미디어 믹스로 변주됩니다. DC와 워너 브로스 따위와는 다르게 마블과 디즈니는 굉장히 뛰어난 영화, 캡틴 아메리카3 : 시빌 워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세계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인터넷 세계에서는 벼라별 이유로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을 싸움 붙이는 놀이(=meme)가 유행하였습니다.
그런 거 가지고 전쟁하지 마 -_-
재밌는 점은 영화에서는 원작에서 갈등의 촛점이었던 초인 등록법안 = 소코비아 협정은 간단하게 언급만 하는 수준에서 끝났다는 겁니다. 사실 이데올로기의 갈등, 그로 인한 활동 방법론의 갈등이 주먹다짐으로 번지는 건 비현실적이죠. 그것도 정의의 히어로들끼리는 더욱더. 그래서 작품의 주된 갈등 구조를 윈터 솔저라는 가치 평가가 엇갈리는 캐릭터를 두고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사적인 갈등이 벌어지는 것으로 변경합니다. 한정된 영화 상영 시간 속에서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이후의 마블 영화의 행보에서 코믹스 시빌 워에서 화두를 던진 사회적 진보 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어 조금 아쉽긴 하네요.
그런데 사실 더 큰 아쉬움은 영화보다는 이후의 마블 코믹스의 행보에 있습니다. 최근 이 녀석들이 저지른 만행은...
캡틴이 하이드라라니!!!
2016년에 시작된 마블 코믹스의 타이인은 캡틴 아메리카가 사실은 하이드라의 스파이였고, 세계 독재를 꾀하는 캡틴 하이드라(...)를 모든 마블 히어로가 막는다는 전개로 진행되었습니다. 뭐, 나중에 가면 저 괴악한 캡틴은 우주적인 아이템이 역사를 조작해서 만든 가짜 캡틴이었다는 게 드러나지만요. 20세기 내내 빌드업 하고 시빌워와 영화판으로 세계적인 자유의 아이콘이 된 캡틴 아메리카의 캐릭터성을 이렇게 망가뜨려도 되나 싶은 기획이었습니다. 나중에 갈등이 해결된 카타르시스도 영 별로였어요. 시빌 워 이후 마블 놈들은 스파이더맨=피터파커를 죽여버리곤 닥터 옥토퍼스가 그 몸을 차지한다는 기획을 질질 끌기도 하고, 사이클롭스를 천하의 악당으로 바꿔버리기도 하는 등 영~~~~ 별로입니다. 이 놈들은 빌드 업 해 놓은 캐릭터가 갖는 가치관이라는 걸 소중히할 줄을 몰라!!
스탠 리는 독자를 매료시키는 비결은 "반전"이라고 말해왔죠. 본인도 스토리가 지지부진해질 때면 항상 반전카드를 꺼내서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제 생각에 마블은 더이상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거나 히어로 세계를 융합시키는 방법으로는 한계를 느낀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다 지나치게 과격한 카드를 꺼내든게 아닐까... 바로 "반전"이죠. 캡틴아메리카가 악당이었다는... 이건 거의 드래곤볼의 손오공이 사실 인간이었다는 소리잖아요? 개연성없는 반전은 막장이되는거죠...
마블의 열혈팬이었지만, 요즘들어 시들해지는 1인입니다. 최근에 개봉할 블랙팬서 같은 영화도 끌리지 않더군요. 특별히 마블 스튜디오 X맨 시리즈 광팬입니다. "로건"은 X맨 시리즈를 종영하는 최고의 명작이었죠. 만일 구캐릭터의 종언을 위한 반전이 필요했다면 "로건"같은 형식이 좋았죠. 한시대를 풍미했던 히어로의 쓸쓸한 말로... 개연성있는 반전입니다. 캡틴이 히드라였다니... 문재인이 사실 자유한국당이었다는 소리네요. -.-
앞으로 X맨 시리즈는 새로 만든다고 해도 보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의 이번 생애 X맨 시리즈는 끝났으니까요 ㅠㅠ
그래도 아직 어벤져스와 가드언즈 오브 갤럭시 때문에, 아직 정을 붙이고 있는데... 타노스가 제발 제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가요~^^
히어로가 사실은 나쁜 놈이었다는 반전, 사실 기나긴 아메리칸 코믹스의 역사에서는 이제 반전의 축에도 못 듭니다. 유명했던 걸로 DC 그린 랜턴의 할 조던에 알고 보니 패럴랙스가 붙어 있어서 악당이 됐던 케이스가 있죠. 그런데 그런 반전이 있더라도 캐릭터 본연의 가치를 되짚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악당이 된 히어로에게 예전의 초심을 되살려 주는 것 같은 그런 전개 말이에요.
버뜨 이번 캡틴 하이드라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주적 아티펙트의 장난질로 끝났습니다. 캡틴 아메리카 본연의 가치는 개뿔, 그냥 대우주의 기적 앞의 미생물 같았어요...
답글에 내공이 느껴지네요 ㅎㅎ 캡틴의 경우는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습니다.
시빌워 제가 좋아 했던 작품 중 하나 였지요ㅎㅎ
스파이더맨이 고통받는 부분과 아이언맨의 충돌...스파이더맨은 정말 불쌍한 히어로ㅠ
작가들이 작정하고 괴롭힐려고 만든 캐릭터죠. ㅠㅠ
스탠 리 나빠요.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세요~
(PO.영업.WER)
팔롱했으니 피드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