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공항의 우화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2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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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는 늘 심란하다. 한국을 떠나는 내가 공항에서 경험하는 것은 대체로 지루한 기다림 아니면 초조한 서두름, 둘 중 하나다. 둘 다 시간과의 싸움이고, 싸워야 하니 몸도 마음도 피로하다. 누군가는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에서 여유나 낭만을 찾기도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어서 비행기에 올라타서 내 자리를 차지하고 철푸덕 앉고만 싶다. 혼란한 기분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두고 가는 것들이 마음속에서 자꾸 나를 부른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그리움을 미리 마중할 필요도 없는데 덜컥 겁을 먹는다. 원하는 곳에 도착하면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는 사라지고, 두고 온 것이 그리울 틈도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내가 공항에서 느끼는 감정은 오로지 울적함이다. 안도감조차 든 적 없었던 것 같다. 이 울적함은 학습된 것이라 한국에서 예정된 일들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다. 엄청나게 신나고 기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 땅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예외 없이 울적해지고 만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을 생각에 설레는 기분도 잠깐이다.


김연수 작가의 <여행할 권리>는 정말 좋아하는 에세이집이다. 작가는 책의 마지막에서 공항의 우화에 관해 썼는데, 이 이야기를 읽고 내가 공항에서 느끼는 기묘한 기분의 근원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특히 공항이 마치 생을 바꾸는 공간처럼 느껴진다는 그의 말은 처음부터 내 마음속에 있던 말 같았다.

공항에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나 자신 사이의 어떤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 둘은 같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길이다. 내가 망명에 성공한다면, 내게 남는 것은 여권에 나와 있는 그 생물학적인 존재, 단독자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 내게는 이름과 성별과 나이와 국적만이 남을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꿈꾸는 다른 존재다. 공항에서 비행기표와 여권만 들고 출국심사대를 빠져나갈 때마다 나는 거의 다른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은 참으로 감미롭다. 그런 점에서 공항은 환각의 극장이며 착각의 궁전이다. 그리하여 공항은 마침내 삶에 대한 절절한 역설이 되는 셈이다. 맞다. 덧없이 반복적으로 스쳐가는 것들만이 영원하다.

그리고 나 자신, 혹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였던 나는 곧 그 사이의 어떤 것으로 바뀐다. 그 어떤 것은 공항을 빠져나가 바로 집으로 돌아간다. 늘 먹던 반찬으로 밥을 먹고 나면 거기가 집임을 실감할 것이다. 공항에 들어서기 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은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그때는 완전한 타지사람이었고 여행자였다. 공항은 마치 생을 바꾸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며칠 혹은 몇달이 지난 뒤에 우연히 여권을 보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여권에 기재된 바로 그 사람이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물론 타지를 떠돌 때였다. 그럼 집에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원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 그는 다시 공항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질문하고,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 뿐이다. 공항에서 우화는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무례한 타지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덧없이 반복되는 존재일 뿐이다. 공항의 우화에 주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리라.



그래도 공항에서의 낭만을 굳이 찾자면 이것이다. 활주로 위에 펼쳐진 하늘을 시원한 통유리창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뜨는 해도, 지는 해도, 이 창을 통해 바라보면 완전히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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