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기해년2 - 대마도 정벌에서 고종의 반동까지

in #kr6 years ago (edited)

1418년 무술년 8월, 고려와 조선을 잇는 역사의 풍운아 태종 이방원이 세자에게 왕좌를 물려준다. 번번이 말썽을 부리던 장남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몰아내고 셋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지 두 달 밖에 안됐을 때였다. 신하들은 또 시작이다 싶었을 것이다. 툭하면 양위한다고 해 놓고 이를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취했던 태종이었다. 자신의 처남들이 자신이 양위한다고 할 때 ‘기쁜 빛을 보였다’면서 몰살시켰던 사람 아니던가. 신하들은 목청껏 부르짖었다. “아니되옵니다.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나 이번에는 태종의 분위기가 달랐다. “호랑이 등을 탄 것이 18년이면 됐다.” 면서 양위를 종묘에 고하고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정치 9단이었던 태종은 세종을 서둘러 왕위에 앉히면서도 끝끝내 군사권은 내주지 않았다. 다음 해인 세종 1년, 1419년 기해년에 대마도의 왜구들이 조선과 명나라를 노략질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태종은 대마도 정벌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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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을 당하기만 한다면 한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했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른바 기해동정(己亥東征)의 시작이었다. 경상ㆍ전라ㆍ충청도 병력 1만7285명과 병선 227척을 동원한 대규모 원정. 사령관격인 도체찰사에 임명된 사람은 이종무(李從茂, 1360~1425)였다. 세종에게도 의미 있는 이름이다. 세종이 형 양녕대군 대신 세자에 책봉될 때 우렁찬 목소리로 그 사실을 종묘에 고했던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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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기해동정은 일종의 ‘빈집털이’ 모양새였다. 대마도 왜구들의 주력은 중국 연안을 노략질하고 있었고 남아 있던 대마도 사람들은 들이닥친 조선 원정군을 자기네 선단이 돌아온 줄로 착각하여 부두에 몰려나와 손을 흔들 정도였다. 조선이란 자기네가 얼마든지 뜯어먹을 수 있는 둔중한 소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대마도 사람들은 급작스레 등장한 대규모 조선 함대와 병력에 기절초풍하도록 놀랐다. 대항할 여지도 없었다. 어설프게 칼을 휘두르고 나선 이들은 목이 떨어졌고 대개는 대마도에 지천으로 많은 산 속으로 숨었다. 사로잡혀 있던 중국인들과 조선인들도 적잖이 구출했다. 기해동정이 끝난 후 대마도주의 형식적 굴복도 받아냈으며 향후 100여년 간 대마도 왜구의 침입이 사라질 만큼 정치적인 성공을 거둔 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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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6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소장 안병한)가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군사전략을 분석해 발간한 ‘조선의 군사 전략’ 편에서는 이 대마도 원정을 ‘군사 전략 측면에서는 실패한 전쟁’이라고 규정한다. 대군을 동원하여 작심하고 치른 원정이지만 대마도를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직접 지배 체제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 장기적 전략의 실패라면 대마도 상륙작전에서 보여 준 졸렬함은 군사 전술상의 실패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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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언급했듯 대마도 왜구의 주력은 명나라로 약탈을 나간 상황이었다. 1만7천명의 대군을 상륙시켜 섬 안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65일분의 식량까지 챙겨갔으니 장기전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이종무를 위시한 조선 장수들은 초전의 승리 이후 본격적으로 대군을 상륙시키기를 꺼린다. 굳이 군대를 상륙시켜 산으로 도망간 왜구를 소탕한다면 누군가 죽어야 했고, 또 그랬다가 칼 잘쓰는 왜구들에게 당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이미 휘황한 성과를 거두었고 이대로 돌아가도 주상 전하께 칭찬받을 텐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총사령관 이종무도 난감했으리라. ‘빈집털이’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인 전투 한 번 치르지도 않고 뱃머리를 돌리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전군 하선하여 산으로 올라간다! 고 하면 부하장수들이 일치단결하여 아니되오를 부르짖을 것이고, 전략적으로도 옳지 않은 선택이다. 병력 일부를 산으로 보내 소탕전을 전개하고 나머지는 배후를 지키다가 응원해 주는 것이 싸움의 기본이었다. 문제는 누가 가느냐였다.

승리를 목전에 두고, 압도적인 병력과 물자, 그리고 명백한 주도권을 거머쥔 상황에서 조선군은 기괴한 주저함을 보인다. 최고 사령관이 “누가 갈텐가?” 하면 “소인이 가겠습니다.” “아니오 소장이 가오리다.” 정겨운 싸움이 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서로 무운을 빌어주는 무인(武人)들의 인사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 그림일 텐데 조선군은 그러지 않았다. 누가 갈 것인가의 팽팽한 눈치싸움 끝에 결정된 것은 ‘제비뽑기’였다. 그리고 제비뽑기에 당첨된 사람은 좌군 절제사 박실이었다. 박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휘하 장졸들이 터뜨렸을 한 마디는 수백년이 지나도 짐작이 간다. “아 재수 옴 붙었네.”

제비에 뽑혀 출정하는 부대가 사기왕성하다면 오히려 그쪽이 이상하다. 박실의 좌군은 떠밀리듯 산에 올라갔고 절치부심하고 있던 대마도주 이하 대마도 병력과 충돌, 참담한 패전을 당한다. 허겁지겁 본대가 있는 해안가로 내려왔으나 조선군 중군을 비롯한 본대는 배 안에서 멀뚱멀뚱 구경만 했고 우군(右軍) 일부만 출격하여 적의 추격을 막아 냈을 뿐이었다. 후일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이종무 등은 끝내 수레에 앉아 패망을 관망하였으니 죄는 죽여도 용서할 수 없는데 돌아와서는 벼슬과 상이 먼저 그에게 미쳤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백성에게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어찌 권할 수 있겠는가?”라고 울분을 토할 만도 했다.

비겁함과 졸렬함은 패자들에게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승리를 목전에 둔 강자에게도 여실히 돋아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승리의 달콤함을 누리고자 하는 보신(保身) 본능이 비겁함으로 변하고, 자신의 힘에 대한 과대평가와 적에 대한 주관적인 폄하는 압도적인 전세 속에서도 ‘제비뽑기’로 선봉군을 결정하는 졸렬함으로 드러나고 만 것이다. 어디 그때만이겠는가.

2016년에서 2017년으로 이어지는 겨울,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던 촛불의 바다는 가히 ‘우리가 이겼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른바 적폐 세력들은 산 속에 숨어 전전긍긍하는 듯 보였고 특히 못되게 굴던 이들은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정유년과 무술년을 넘어 기해동정 600주년을 맞는 기해년을 맞아 몇 가지 답 없는 질문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오늘 우리는 ‘제비뽑기’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작심하고 대규모 원정을 단행했으나 그에 걸맞는 군사적 성과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헛발질을 시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소모하고 스스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전투에서 졌다고 전쟁에 지는 것은 아니다. 대마도 사람 수만 명 다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호언했던 태종은 화전(和戰) 양수겸장으로 대마도를 위압했고 마침내 정치적 승리를 거둔다. 대마도주는 형식적으로나마 신속(臣屬)했고 향후 100여 년간 왜구의 위협은 점차 희미해져 갔던 것이다. 한국사를 뒤흔든 대사건의 해에서는 살풋 벗어나 있으나 향후 오래 가는 미래의 향방을 가늠했던 팔자(?)의 해, 기해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적어도 올 기해년도 그러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시간 여행의 속도를 높여서 단번에 19세기의 끝자락으로 건너뛰어 보자. 1899년에도 기해년이 왔다. 1899년은 기실 국가 교과서에도 주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해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을미사변 등등 줄줄이 육십간지들이 등장하지만 그 격동기에 ‘기해’자가 붙은 역사적 대사건은 없다. 오히려 그 전해인 1898년 무술년이 꽤 ‘버라이어티’했다. 인근 청나라에서도 ‘변법자강운동’을 박살내는 서태후 중심의 보수 쿠데타라 할 무술정변(戊戌政變)이 있었지만 대한제국에서는 백성들의 뜨거운 외침으로 점철된 만민공동회가 1898년의 서울을 달구었다.

수천 년간 나랏님 시키는 대로 농사짓고 세금 바치고 부역하고 군대 갔던 양순한 백성들이 자신들의 뜻을 모으고 시위로 정부를 압박하며 나라의 앞길을 열정적으로 토로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1898년 3월10일, 서울 종로 거리는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부산했다. 단발에 양복 입은 개화 신사부터 아직 상투에 갓을 버리지 않은 사람, 머리를 땋은 소년 등 각양각색의 인파가 종로 거리로 몰려들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20만 명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종로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가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인구 1000만명 잡고 50만명이 종로를 뒤덮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모임의 의장은 현덕호라는 쌀장수였다. 젊은 날의 이승만 등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열변을 토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구호를 외치면서 제국의 ‘신민(臣民)’이 아닌 나라의 근본인 인민(人民)이 돼가고 있었다.

한 번 자신의 위력을 인식한 대중만큼 용감한 존재도 드물다. 서울 시민들은 연일 토론회를 열며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자주독립의 미래를 열변에 실었다. 초기에는 독립협회가 주도했으나 이미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몇 달에 걸쳐 집회가 이어졌고 급기야 10월 1일에는 철야 시위가 시작됐다. 근대적 법 제도의 실시와 간신배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였다. 무려 12일 동안 시민들은 덕수궁 앞에서 철야하면서 황제에게 탄원한다. 나무꾼들이 나무를 장작으로 기부하고 열정적인 시민들은 한뎃잠을 자며 그 시위를 지켰다. “일반 농민, 나무꾼, 종로의 시전 상인들, 기생과 찬양회를 중심으로 한 여성, 심지어 걸인과 아이까지” (한국문화콘텐츠닷컴)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다. 실로 촛불시위의 원형이었다고나 할까. 결국 정부가 또 한 번 굴복한다. 박정양, 민영환 등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내각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래도 만민공동회는 끝나지 않았다. 근대적 의회 설립과 간신배 축출 요구는 지속됐고 점차 격화됐다. 박정양 등 관료들까지 참여한 관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그 개막 연설자는 뜻밖에도 백정이었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백정이 대신과 나란히 연단에 올라 토해 낸 부르짖음은 이러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몽매한 자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편하게 하는 길은 관민이 합심한 이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만일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그 힘은 매우 튼튼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관리와 백성이 힘을 합하여 우리 대황제의 훌륭한 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황제’는 그렇게 훌륭한 덕의 보유자가 아니었다. 만민공동회에 모여든 시민들만큼도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권력을 오래 오래 대대손손 유지하고픈, 그리고 그 권력이 ‘민의’(民意)에 의해 제한받거나 깎여나가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군주였다. ‘헌의 6조(관민공동회에서 결의된 6개 항의 국정개혁안)’니 뭐니 하면서 자신이 누려온 임금으로서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고종의 신경은 꽤 날카로웠다. 그런 마당에 백성들이 공화국을 세우고 아무개 대신을 대통령으로 삼으려 한다는 헛소문까지 들려왔다. 이제 고종의 비장의 무기 황국협회가 출동할 차례였다.

황국협회는 물건을 이고 지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장사하던 ‘장돌뱅이’, 즉 보부상들의 조직이었어. 보부상들은 정부의 통제하에 움직이는 대가로 활동상 특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황국협회가 조직될 때 황태자(이후의 순종)가 돈 1000원을 보내 격려한 것을 보면 그들은 그 단체 명 그대로 ‘황국 신민’이었고, 황제는 그들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군대에 비견될 만큼 단결력과 조직력이 뛰어난 조직 보부상들이 마치 전쟁을 하듯 물푸레 방망이를 들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한다. 대한제국의 희망이 가장 거세게 타올랐던 순간에 황제가 거센 찬물을 뿌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는 밥과 국물을 하사해서 관제 폭력배로 전락한 보부상들의 배를 채워주었다. 황실이 보부상들에게 은밀하게 쥐여준 은덩이는 집요하게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는 ‘군자금’ 노릇을 했다. 이런 보부상들의 난동에 더하여 황제는 군대까지 동원한다. 고종 황제는 각국 공사관에 “이놈들(만민공동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질의했는데 가장 열렬하게 “군대를 동원해서 본때를 보여주시라.”라고 외쳤던 이는 한반도에 큰 야욕을 가졌던 일본의 공사 가토 마스오였다.

1898년 무술년의 크리스마스(대한제국의 크리스마스는 별 의미가 없었겠으나)는 처참했다. 군대와 보부상은 만민공동회를 잔인하게 공격했고 고종은 독립협회를 영구히 불법화하는 칙령을 내린다. 그 지경에서 1899년 기해년은 어김없이 왔다. 그로부터 300년 전인 1598년 무술년에는 지긋지긋한 7년간의 조일전쟁이 끝났고 1599년 평화의 기해년이 왔는데, 1899년의 기해년은 한 해 동안 끓어올랐던, 아니 그 이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돼 온 대한제국의 개혁과 자강(自强)의 요구가 싹쓸이된 뒤에 암울하게 등장한다. 1899년 기해년 새해를 맞은 고종의 구상은 곧 수면에 떠오르게 된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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