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기해년1
1959년 음력 설 이후 태어난 돼지띠, 기해(己亥)생들은 올해로 환갑을 맞는다. 회갑을 두 번 맞을 수도 있을까? 2018년 9월 27일 인천일보는 인천시 허종식 정무경제부시장은 1899년생 이화례 할머니를 방문하여 장수 지팡이를 선물하며 그 장수(長壽)를 축원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데 이화례 할머니는 휠체어를 타고서 외부활동도 하는 등 정정하시다 했으니 기해년을 두 번(출생까지 포함하면 세 번)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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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례 할머니의 경우는 사실 천운(天運)에 해당하고 여느 사람들이라면 생전에 자신이 태어난 간지의 해를 두 번 보게 될 가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세월의 무정한 흐름이 도도한 역사의 강물이 되면 사람들은 물 속 자갈들처럼 밀려가고 부딪치고 부서지다가 사라져 간다. 남는 것은 역사일 뿐. 그리고 돌아오는 육십간지의 한 해와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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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번 호기심을 발동해 본다. 6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기해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기원전(B.C)의 역사는 제하고, 서기 39년 이후 서른 세 번 돌아온 기해년은 어떤 역사를 남겼을까.
남의 나라 이야기긴 하지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219년 기해년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은 분들이라면 아 그때구나! 하고 무릎을 칠만한 해다. 예언가 관로가 조조에게 이런 예언을 하는 대목 기억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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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종횡에 누런 멧돼지가 범을 만나니 정군 남쪽에서 팔다리 같은 명장 한 사람을 잃으시겠습니다.” 삼팔이 이십사, 건안 (한나라 헌제의 연호) 24년이 바로 기해년이었다. 즉 ‘누런 멧돼지’의 해였던 것이다. 그 기해년의 호랑이의 달(寅月), 즉 정월에 조조의 의형제라 할 하후연이 전사한다는 예언이었고 그대로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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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 소설 속에서 219년은 그야말로 다이나믹한 해였다. 하후연 뿐 아니라 삼국지의 가장 유명한 캐릭터라 할 관우가 목이 떨어지고 관우를 잡은 여몽도 죽었으며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으나 경솔했던 양수도 우리가 익히 아는 ‘계륵’의 고사를 남기고 조조에게 죽음을 당했다. 유비는 한중왕에 오르고 조조는 거기에 열받아 한중을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앞니가 다 부러지는 참상을 겪는다. 중국 대륙이 이런 난장판이어서 백제와 신라 고구려 등 우리 조상들에게는 별일이 없었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위ㆍ촉ㆍ오의 삼국이 솥발처럼 서는 전기가 됐던 219년 이후 우리 조상들도 분주하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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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년 즈음,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공손씨 (삼국지연의에서 원소의 아들들을 죽여 조조에게 바치고 그 세력권을 인정받은 가문)의 동연(東燕)과 대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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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이래 한(漢)의 군현들과 피맺힌 투쟁을 벌여 온 고구려로서는 중국의 혼란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고 공손씨는 고구려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는 등 고구려를 압박했다. 후일 오나라의 손권이 위나라 견제를 위해 공손씨와 동맹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공손씨의 수장 공손연은 사신들을 가둬 버렸다. 이때 사신 몇 명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여 고구려로 흘러들어오자 동천왕은 예물과 호위무사까지 곁들여 오나라로 송환시켜 주었다. 감격한 손권이 고구려와 동맹을 청했지만 판세를 지켜보던 고구려는 별안간 태도를 바꿔 오나라 사신의 목을 쳐서 위나라로 보내 버린다. 또 위나라의 공손씨 공격 때에는 군대를 보내 공동작전을 펼쳐 공손씨를 멸망시키지만 그 후 바로 태도를 바꿔 요동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요지 서안평을 공격한다. 고구려의 이런 행동들이 중국인들에게는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은 포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삼국지 위서 동이전)고 보이겠으나 우리는 대륙 세력과의 투쟁 과정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했던 고구려 사람들의 악전고투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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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80년 뒤인 399년의 기해년은 폭풍 전야와도 같았다. 광개토왕비문에 등장하는 399년의 기록이다.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과 저수지를 부수고 노객(奴客, 즉 신라 내물왕)을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은혜롭고 자애로운 태왕은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당시 백제는 왜와 가야와 연결하여 고구려에 맞섰고 왜국은 집요하게 신라를 괴롭히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신라는 거대한 메뚜기떼의 습격까지 받아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내물왕은 생존을 위한 비상 수단을 가동했다. 스스로를 노객(奴客)으로까지 비하하며 고구려에 도움을 청한 것이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빌붙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빌붙음으로 힘을 기르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면 그 빌붙음이란 어떤 용기보다도 낫다. 내물왕은 고구려가 백제와 가야, 왜를 연결하는 일종의 국제적 동맹의 형성을 좌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으리라.
다음 해인 400년, 광개토왕은 그 치세 중 가장 거대한 5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로 출동시킨다. 그 결과는 당시 삼국 정세의 급변이었다. “남거성(男居城)에서부터 신라성(新羅城-경주)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官軍)이 도착하니 왜군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곧 항복하였다...... 그때껏 신라 매금(寐錦-마립간, 즉 신라 왕)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명을 받든 적이 없었는데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조공(朝貢)하였다.”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가야연맹을 이끌던 금관가야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그 주도권을 대가야로 넘어갔고 신라는 (광개토왕비문에 따르면) 왕이 직접 고구려를 찾아 조공을 하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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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라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왕은 고구려의 후원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라의 충신 박제상을 보내 막강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동생 복호를 데려왔고 철천지원수라 할 왜에 인질로 가 있던 또 다른 동생 미사흔을 탈출케 한다. 또 399년 기해년의 내물왕의 원병 요청 이후 신라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 고구려인 중 하나가 신라인에게 “너희는 곧 우리에게 망한다.”고 어깃장을 놓고 이것이 왕에게 보고되자 신라 왕(눌지왕으로 추정)은 단호하게 대응하여 고구려 주둔군을 습격, 전멸시켰다.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고구려의 변경 장수를 습격해 죽이는 등 신라는 호시탐탐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쳤고, 459년의 기해년쯤 되면 신라는 나제동맹을 견고하게 형성,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고 있었다.
579년 삼국통일 기틀을 닦은 신라 진평왕 등극
579년의 기해년. 신라는 새 임금을 맞는다.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 유역을 확보한 진흥왕의 아들 진지왕은 무능하고 음란하여 폐위되는 운명을 맞았고 (삼국유사 기록) 그 조카인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진평왕은 무려 53년이라는 신라 역사상 최장기 재위 기록을 수립하며 격동의 삼국 투쟁사의 전면에 선다. 온달 장군이 전사했던 것도, 서동요의 주인공 백제 무왕과 사투를 벌인 것도, 화랑도에 세속오계가 등장하고 임전무퇴(臨戰無退)의 화랑들이 각지에서 전공을 세우는 가운데 명장 김유신이 등장하는 것도 진평왕의 치세에 해당한다. 진평왕은 국력을 회복한 백제와 북방의 고구려와 수없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내실을 다지고 국력을 키워내 후일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는다.
639년 기해년은 동북아시아를 뒤흔드는 대전(大戰)의 먹장구름이 몰려오던 때였다. 당 태종은 북쪽의 골칫거리였던 돌궐을 제압한 후 서역 나라들에게 칼날을 들이댔다. 당나라의 세력이 밀려들자 오늘날 투르판 분지에 자리잡은 고창국은 당나라에 저항했고 당 태종은 토고창조(討高昌詔), 즉 고창을 토벌한다는 선포를 내린 뒤 639년 기해년, 고창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이제 급해진 것은 동쪽의 고구려였다. 고창국 멸망이 고구려에 어떤 충격파를 던졌는지는 후일 고구려에 파견된 사신 진대덕의 보고를 보면 안다. “고창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알고 크게 두려워해 관리들이 부지런한 것이 보통 때보다 배가 되었습니다.” 온 나라가 고창국의 멸망 소식에 비상이 걸렸다는 뜻이다. 영류왕은 다음 해(640)에 세자 환권을 당나라에 입조시키는 초유의 선택을 한다. 필시 기해년 내내 고구려 안에서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논쟁이 치열했을 것이고 천리장성 공사 감독을 하고 있던 연개소문은 세자 환권의 입조 소식에 이를 갈아붙였을 것이다.
그 다음의 기해년, 699년이 왔을 때는 이미 거대한 격랑이 동북아시아를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당나라와 고구려의 혈전, 신라와 백제의 사생결단 와중에 긴박한 외교전이 펼쳐졌고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신라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와 또 한 번 죽기 아니면 살기의 전쟁을 벌여 대동강 원산만을 잇는 국경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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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9년 기해년은 신라의 당나라 축출(676)로부터도 23년이 흐른 뒤였다. 무릇 한 역사의 끝이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일 뿐이다. 고구려 수도 평양에 설치됐던 안동도호부는 만주 지역으로 쫓겨나 곳곳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699년 안동도독부로 격하됐고 새로운 도독을 맞는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의 후손 고덕무였다. 그는 소고구려(정식 국명이 아니라 고구려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를 세워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의 깃발을 이어가지만 멸망한 왕조의 후예는 이미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아니었다. 고덕무가 안동도독으로 요동에 도착할 즈음,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이 이미 진국(辰國). 즉 발해의 깃발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1119년 '형제의 예' 요구한 금나라에 맞서 천리장성 증축
여기서 잠깐 시간여행을 멈추고 반추해 보자면, 역사 속 ‘황금돼지해’ -기해년(己亥年)의 기(己)는 노란색을 상징-들은 한국사를 뒤흔든 대사건들로부터 살풋 벗어나 있다. 상대적으로 다른 해에 비해서는 황금돼지는 우리 조상들에게 온건(?)했다고나 할까. 이 복잡하고도 다이나믹한 땅에서 다사다난(多事多難)의 혐의를 피할 수 있는 해가 어디 있을까만, 황금돼지의 해는 주로 역사적 사건의 전조를 유력하게 드러나거나 대사건이 종료된 후 기진맥진을 추스르고 새 출발을 모색하는 시기와 많이 연결됐다.
한때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형제의 예’를 강요(1117년)해 온 이후 고려에는 일대 논란이 일었다. 왕년에는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족속들이 갑자기 형님 대접을 하라니 그럴 밖에. 고려는 일단 이 요청을 무시했는데 1119년 기해년 2월, 금 태조 아골타는 다시 자신들이 이룬 성과를 나열하며 (알아서 기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말 한 필을 보낸다. 이에 8월 예종은 답서를 보냈는데 금나라는 국서 수령을 거부했다. 고려의 국서에 “당신들(彼) 근원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었다(彼源發乎吾土)”라는 뾰족한 구절이 담겨 있었던 탓이다. 이에 예종은 천리장성 증축 공사를 시작한다. 성벽의 높이를 3척 올리는 공사였다. 당연히 국경을 예의주시하던 금나라 관리가 발끈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요? 당장 중지하시오.” 그러나 고려는 공사를 강행했다. 금나라 태조 아골타도 보고를 받았지만 오히려 자제령을 내린다. “침범하여 괜한 일을 만들지 말고, 다만 군영과 보루를 견고히 하고 정찰이나 강화하라.”
이 사건은 여러 의미가 있다. 아골타는 그로부터 15년 전 고려의 17만 대군이 대대적으로 여진을 공략하고 동북9성을 세웠을 때 형 오아속이 동북 9성 지역 반환을 애걸하며 “고려 쪽으로는 기왓장 한 장 던지지 않겠습니다.”고 고려에 애걸복걸했던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비록 금나라가 강대해졌다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고려와 충돌하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이 대 고려 외교 기조는 금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다.
한편 고려로서도 뻣뻣하게 나가기는 했으되 이미 금나라는 고려와 아웅다웅했던 왕년의 여진족들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 가게 된다. 1119년의 기해년은 그 정중동(靜中動)의 흐름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후로도 기해년의 팔자(?)는 계속 그랬다.
무신의 난의 리더였던 정중부가 피살되고 젊은 장군 경대승이 1179년 기해년에 정권을 잡았으나 그 이후에는 더욱 강력한 무신 정권이 등장한다. 그 60년 뒤 1239년에는 작심을 하고 쳐들어와 무려 4년 동안 전 고려를 쑥밭으로 만들었던 몽골의 3차 침공이 가까스로 마무리됐다. 1359년 기해년에는 한족의 부흥을 외치며 몽골과 싸우던 홍건적들이 고려로 몰려왔다가 격퇴됐지만 다음 해 홍건적은 다시 대규모로 몰려와 개경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15세기의 첫 기해년 1419년에는 특이한 사건 하나가 벌어졌다. 새롭게 개창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닦은 태종 이방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으되 병권만은 틀어쥐고 있던 그가 대마도 정벌령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