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인 척]마이너 언론사 국회기자의 두번째 국감 후반기 소회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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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청 화장실에서 장 속의 적폐를 청산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모 의원실의 모 보좌관. 미공개 국정감사 보도자료를 카톡으로 보내드리면 검토해 줄 수 있냐는 얘기였다. 검토엔 돈이 들지 않지만, 국감 후반기에 이렇게 전화로 요청하는 자료들은 대부분 의원실에 쌓인, 내 장 속의 적폐 같은 것들이다. 전화를 끊기 무섭게 카톡으로 자료가 들어왔다. 제목만 봐도 기사가 안 될 게 뻔하다. 그럼 그렇지.

혹시나 해서 어떻게 각을 세워서 쓸 수 있는 내용이 없을까 찬찬히 보지만, 자료는 국감이 아니라도 의례적으로 나올 수 있는 내용들로 이뤄져 있었다. 지면은 커녕 온라인용 기사도 안될 것 같다. 고민한 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이너 신문에서 일하는 서러움과 무시를 당한 것 같은 약간의 열등감 내지는 피해의식이 고개를 든다.

국감 기간 의원실과 언론사 간의 자료 유통에 관해서는 앞선 글에 쓴 적이 있다. 좋은 자료는 대부분 국감이 시작되기 직전이나 초반에 다 나온다. 실력이 탁월한 특정 의원실과, 그 당에서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언론사의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혹은 끝내주는 아이템을 가진 능력있는 기자들이 개인기로 특정 의원실과 작업을 한다. 이런 자료는 늦어도 20일의 국감 중 7일이 되기 전에 나온다. 주요 피감기관 본청의 국감이 앞쪽에 몰려 있고, 지방청이나 산하기관 국감이 뒤쪽에 몰려 있어서 그런 것도 있다.

오늘과 같은 요청은 대체로 보좌진의 실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남은 자료들을 최대한 세일즈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름 국감 농사가 다 끝났고, 쓸만한 것들은 특정 방송이나 메이저 신문과 작업이 끝났지만 기왕에 부처에 자료를 요청해서 만든 것을 버리기보다는 써줄 것 같은 언론사에 한번 찔러 본 것이라고 생각된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고심했다. 유쾌하지 않은 심기를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와 우리 신문을 띄엄띄엄 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데스크에 말씀드렸는데 저희도 요즘 국감 지면을 줄이고 있어서 지면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보냈다. 반응은 예상대로 쿨했다. '네 괜찮습니다 저히는 그냥 전체 발송해두 됩니다~~^^' 그렇다. 그쪽도 이 자료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냥 뿌리기 전에 한번 세일즈 해 본 것이다.

메이저 언론사에 다녀본 적은 없지만 그들이 실전에서 체득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 능력이 있다. 제보의 옥석을 가려내는 힘이다.

어느새 메이저의 반열에 들어선 JTBC 같은 곳은 한 마디만 들어봐도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제보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들은 그것 중에 취사 선택해서 사실확인만 하면 바로 기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회사는 그런 메이저 언론에서 킬된 제보들이 들어온다. 제보를 가장한 개인적인 민원인 경우가 많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 제보도 많이 온다. 그럴싸해 보인다고 덥썩 물었다가는 사기꾼 vs 사기꾼의 법정 다툼에 이용당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기사가 되는 제보는 반드시 있다. 제보자와 대화 중에 당사자는 전혀 기사가 되는줄 모르고 한 얘기가 '고구마줄기'가 돼서 특종을 만드는 경우도 (나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있다.

화장실을 나오며 국감을 두번째 하니 딱 보면 아는 감이 생겨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옥석을 가려내는 능력치가 +1된 것 같다. 이제 하산할 때가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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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안녕하세요 shiho님, 아 요즘 국감때문에 좀 바쁘셨군요 ㅎㅎ 저는 스팀잇 오류때문에 요 며칠 아주 힘들었네요 ㅋㅋ 어떤 일이든지 경험이라는게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기가막힌 제보자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ㅋㅋ 감사합니다~

ㅋㅋㅋ 기가막힌 제보자 기다리다 정년퇴임할 판입니다. ㅋㅋ

아 ㅎㅎ 그런가요? ㅋㅋ 좋은 밤 되세요^^

하산하시면 이번엔 어디로 가시려구요 ㅎㅎ

문화부? ㅋㅋ 말랑말랑한 부서 한 번 가보고 싶긴 합니다.

보통 기자들은 한 부서에 얼마간 머무르나요?

기간은 정해져있지 않지만 1~2년 주기로 옮겨 다니죠. 그런데 정치부나 법조팀 같이 사람 관계가 중요한 부서는 오래 있을 수록 잘하기 때문에 길게 출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걸 원치 않구요. ㅋㅋ

그동안의 노력이 허사는 아니었군요.
능력치 +1이면 최고지요.
이제 꺼내 쓰시기만 하면 되는것이니까요

ㅋㅋㅋ 종종 쓰고 있지만 테가 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옥석을 가려내는 능력치가 +10은 된 것 같은데요. ^^ 그렇다면 승진에 더 도움이 되는 거 아닌가요? 아직 하산하기에는...

1이라도 됐다면 다행이죠. ㅋㅋㅋ 정치부에 오래오래 있으면 승진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승진하고 싶지도 않고 얼마 남지 않은 청춘을 정치부에 바치고 싶지도 않...

댕기다가 혹여나 좋은 제보꺼리 있으면 후다닥 일러 드리겠습니다. 힘내세요 !!

아이고 정말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ㅋㅋ

옥석을 가려내는 능력치
더하기 1
Good morning~~!

ㅋㅋ 더해졌는지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요. 굿애프터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