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말이 안되는 시작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2 years ago (edited)

“큰일이다.”

바들바들거리는 손으로 가까스로 비자 신청 번호와 여권번호를 쳤다.

‘지금 당신의 전자 비자는 발급 진행중입니다. 최대 72시간 안에 비자가 발급됩니다.’

타야 할 비행기의 출발 시간이 1시간 남은 상태에서 받을 적절한 내용은 아니었다. 지금 체크인을 해도 아슬아슬하게 달려서 탈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4일 전에 신청한 비자는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았다고 천연덕스럽게 기다리라는 말이나 지껄이고 있다니. 가슴이 쿵 떨어졌다. 어쩐지 메일이 안 오더라니. 어쩐지 불길하더라니.

“나…비자가 안나왔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춘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똥그랗게 뜨며 아닐 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몇 번을 몇 번을 더 눌러도 똑 같은 말만이 반복되었다.

‘지금 당신의 전자 비자는 발급 진행중입니다. 최대 72시간 안에 비자가 발급됩니다.’
‘지금 당신의 전자 비자는 발급 진행중입니다. 최대 72시간 안에 비자가 발급됩니다.’
‘지금 당신의 전자 비자는 발급 진행중입니다. 최대 72시간 안에 비자가 발급됩니다.’

“난,,,,못가는 거네…너라도 빨리 서둘러서 가.”

인도를 열 번 가까이 갔으면서도 인터넷으로 직접 신청하는 전자 비자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비자 신청서를 들고 가면 현지에서 비자를 받는다는 착각을 했고 둘 다 비자 신청서만을 프린트해서 공항에 도착한 참이었다. 에어인디아 직원은 전자 비자 실물이 필요하다며 우리에게 프린트를 해올 것을 요청했고 프린트를 기다리는 중에 나의 비자가 발급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프린트의 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춘자는 카운터 직원에게 사정사정한 결과 겨우 전자 비자를 출력하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비자 처리하고 바로 오는 거야! 바로 와.”

그렇게 춘자는 인도로 떠나고 나는 공항에 남았다. 몇 분간 아무 말도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정신줄을 놓고 앉아 있었다. 퍼뜩 정신차리니 바리바리 싸온 거대한 짐이 이 눈에 밟혔다. 카페 두레 팝업 스토어에 사용할 모든 식자재가 들어있는 캐리어다. 저 짐 때문에라도 나는 라다크에 가야 만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비자가 발급되지 않아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는 말에 부모님은 오히려 옳타쿠나 좋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인도에 가는 걸 발작적으로 싫어하기에 나는 독립이나 결혼 같은 불편한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인도 카드를 내세워 둘의 입을 막곤 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게 되면 다시 인천 공항으로 가지 못할 게 뻔했다. 최대한 빨리 비자 문제를 처리하고 인천공항에서 출국할 수 있게 나는 인천에 사는 L에게 사정을 말하고 집으로 향했다.

“비자가 나오면 바로 비행기를 탈 거니까, 하루나 이틀 정도만 신세 질게”

혼자 사는 L은 얼마든지 있어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얼마든지 있으라는 얘기는 오히려 악담이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떠날 거라고 말했다. 흐트러진 정신과 호흡을 가다듬고 노트북을 켜고 문제를 재빨리 해결해야 했다. 미리 비자가 나온걸 확인하지 못해 날벼락을 맞았으나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빠르면 반나절 느려도 2일 안에는 무조건 비자를 받는다고 했다. 아직까지도 비자가 나오지 않은 건 분명 누락이 되었거나 신청서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아까의 악몽을 안겨준 비자 확인 창의 메시지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 봤다.

지금 당신의 비자는 발급 진행중입니다. 최대 72시간 안에 비자가 발급됩니다.’ 문제가 있으면 이메일로 연락을 하거나 아래의 번호로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번호와 이메일을 복사해서 카톡 나에게 보내기 창으로 옮겨왔다. 멘탈이 털린 상태에서 영어로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영어 능력자인 S에게 대신 전화를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이메일 보냈다. 이메일을 보내고 한시간쯤 되었을까 답장이 왔다.

“Your e-visa application is in process, kindly wait for the confirmation.”

“당신의 전자 비자는 발급 진행중입니다. 확인을 위해 친절히 기다려주십시오.”

앵무새같이 반복되는 답변. 이런 상황에서 친절히 기다리라니. 나는 이메일을 인쇄해서 kindly라는 단어를 펜으로 있는 힘껏 그으며 찢어 발기고 싶은 충동을 거세게 느꼈다. 전화 통화를 한 S가 들은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주말에도 계속 비자 서류를 처리하니 승인이 날수도 있다는 말에 클릭 지옥이 시작되었다. 마치 주식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나는 핸드폰을 손에 놓지 못하고 끊임없이 클릭을 하며 비자 신청 상황을 확인했다.

‘지금 당신의 전자 비자는 발급 진행중입니다. 최대 72시간 안에 비자가 발급됩니다.’
‘지금 당신의 전자 비자는 발급 진행중입니다. 최대 72시간 안에 비자가 발급됩니다.’

어쩔 수 없이 지금 시간을 견뎌야 한다면 최대한 즐겁게 보내기 위해 L과 와인도 나누어 마셨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늪 깊숙한 곳에 빠진 느낌이었다. 자꾸 수렁으로 빠지는 지금의 나를 건질 수 있는 건 오직 비자. 비자뿐이었다. 비자가 처리되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기다림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무수한 가정 뿐이다. 만약 이 때 비자가 나온다면, 만약 이 때까지도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무수한 만약을 헤엄쳐 다니며 희망에 가득 찼다가도 지옥으로 뚝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지옥이 있다면 그때의 내 마음이다. 가장 최고의 시나리오는 비자가 빨리 나와 화요일에 델리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다음 날인 수요일에 라다크를 가는 거였다. 가격 면으로나 시간 면으로나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클릭에도 지긋지긋한 메시지는 토시 하나 바뀌지 않고 늘 꿋꿋이 나타나 나를 번번히 좌절시켰다. 하루 꼬박 기다리고, 일요일이 되었다. 마음의 잡념을 없애고 싶어 아침부터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집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 화장실 청소와 물걸레질도 나서서 먼저 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요리를 하며 그 생각에서 벗어나려 하는 건 내 오랜 버릇이다. 하루가 너무 길고 비자를 기다리는 일은 너무너무 지루해서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서류가 잘못되었다면 알려주세요. 수정을 하겠습니다.”
“지금 다시 비자를 신청하고 싶은데 중복으로 신청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나요?”

나는 계속 메일을 보냈으나 인도 비자 센터는 묵묵부답이었다. 일요일 점심이 되자 남들은 다들 하루 만에 비자를 받고 잘도 인도에 가는데 나만 왜 이렇게 마음을 졸이고 고생을 해야 하는지 욕지기가 솟구쳤다.

“싯팔, 인도, 풕킹 인디아”

메슥거리는 마음을 잠재우려고 욕을 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져 분노가 들끓다 이내 통곡이 되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내가 뭘 잘 못했는데!!!!!!!”

울고 불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나에게 L은 차분히 말했다.

“진정해. 울어봤자 바뀌는 건 없어. 모든 일은 순리대로 될 거야.”

이런 엿 같은 시간을 견디는 게 순리라면 순리 따위는 개나 주라고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남의 집에 얹혀있는 처지에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일은 흘러간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왜 이렇게 일이 꼬인 건지 곰곰이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비행기를 놓친 지 3일 째 아침, 인도 비자 센터로부터 직장과 여행 동반자, 인도 전화번호 등의 세부사항을 더 적으라는 메일을 받았다. 12시간 안에 보내지 않으면 비자 발급이 취소된다고 적혀 있었는데 메일을 읽은 시간이 마침 12시간에서 20분 정도 지난 시간이었다. 이것만 작성하면 비자가 드디어 나오겠다는 안도감과 혹시나 취소가 될까하는 불안감에 뒤섞여 추가 정보를 보냈다.

“후우”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됐다. 이제 됐다. 정말 됐다. 하지만, 된 게아니었다. 마침 새벽 비행기를 타고 라다크로 간 춘자가 초모를 통해 마지막으로 비자 센터에 재촉을 하다가 내가 인도 입국 날짜를 출국 날짜로 잘 못 적은 걸 알게 된 것이다. 초모가 플리즈를 외치며 수정을 요청했지만 보안상 수정은 안된다고 직원은 단호하게 말했다고 했다. 만약에 틀린 날짜로 비자가 나오면 춘자가 라다크에 있는 동안 라다크에 가지 못하니 우리의 프로젝트는 시도도 못하고 끝나고 비자는 무용지물이 되는 거였다.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이 때 공항에서 보다 더 충격을 받았다. 아예 갈 수 없다는 선택지는 내겐 없었는데 그럴 상황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혹시라도 비자가 발급될까봐 일분 일초가 시급한 상황이라 이메일로 즉시 비자 발급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고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정확히 20번의 전화를 걸고 인도 비자 센터의 직원과 통화할 수 있었다. 구린 음질과 인도식 억양에 우리는 의사 소통을 명확하게 하지 못했고 비자 신청 번호를 10번쯤 반복해서 말한 다음에야 그는 가능한한 빨리 처리해서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무사히 비자 신청을 할 수 있었지만, 비자 날짜는 원하는 날짜보다 한참 늦어져 원래 계획된 2주의 라다크 일정 중 1주만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비자를 기다리고 있다.

분명 나는 꼼꼼히 비자 신청을 했는데, 왜 어째서 저런 기초적인 실수를 한 것일까?. 순간적으로 뭐에 홀린건지 나는 전자 비자 30일 짜리는 발급 즉시 비자가 유효하며 입국과 상관없이 나의 출국 날짜를 필요로 한다고 착각을 했다. 거기에 정보도 미묘하게 잘 못 써서 복합적으로 바로 비자가 나올 수 없는 문제투성이 비자 발급서를 작성한 것이다. 일이 안 되려면 모든 상황이 나를 농락하려고 손에 손을 잡고 짠 것처럼 이상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날짜만 틀렸으면 바로 발급되어 인도에 아예 갈 수 없었을 것을 정보마저 틀려 시간이 지체가 되어 다시 신청할 수 있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2007년부터 거의 대부분의 모든 여행을 함께한 춘자와 나는 서로의 성장을 위해서 홀로서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2019년 우리는 서로 갈라져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세계를 한 바퀴 돌아 한 지점에서 만났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홀로 설 시간이 더 필요했나 보다. 이 사건은 명백한 암시이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한 명은 라다크에서, 한 명은 한국에서 외로움과 괴로움 속에 더 반짝이는 글을 쓰고 우리의 프로젝트를 위한 밑 작업을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만나 손을 잡고 우리가 사랑해 마지 못하던 카페 두레를 새로운 버전으로 구현할 것이다. 우선, 나는 오랫동안 손 놓고 있던 길 위의 술에 집중해야겠다. 글 비수기라며 글 쓰는 것을 소홀했던 나는 채찍을 맞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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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ears ago 

으어.. 아까 일어나서 읽으면서 잠이 확 깼어요. 과연 이번 삶이 줄 선물을 뭐길래 이리 혹독한 채찍질을 할지.
그와중에 젠님의 글이 나온다는 건 기쁩니다 : )ㅋㅋㅋ

 2 years ago 

이제는 모든 일이 해결되었으니 웃을 수 있어요....혹독한 상황과 고난이 닥쳐야 비로소 글을 쓰는 저....이제 본격적으로 라다크 글을 올릴게요 소곤소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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