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앨리스 먼로 - 디어 라이프steemCreated with Sketch.

in #alicemunro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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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꿈들이 있다. 내게 있어 그런 꿈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아끼던 친구가 등장했던 경우다. 그녀는 예의 그 무심하고 미련 없는 표정으로 몇몇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먼발치에서 바라보다 꿈에서 깨었다. 꿈속에서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깨고 나서야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몰아쳐 적잖이 놀랐다. 여하튼, 그런 종류의 꿈들이 있다. 사라지지 않고 꿈에서 깬 나와 관계를 맺는 꿈. 그런 꿈은 일종의 상징이나 암시, 미련일 수도 있겠지만 그 종류가 무엇이건 간에, 어떤 내밀한 신호와도 같다. 과거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신호. 아직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에도 주름을 남기고 있다는 신호. 잊은 줄 알았던 일들은 아직 거기에 있다. 다만 지금의 내가 잊은 줄 알 뿐이다.

지금은 거의 모든 정보시스템이 앱을 통해 구현되고 로그인을 통해 그곳에 접속할 권한을 얻지만, 한때는 전화번호부가 있었고, 조금 더 지나서는 배달음식점을 모아놓은 쿠폰북이 한참을 돌아다녔다. 어릴 때의 나는 그런 책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책이었기 때문에 보았다. 무수한 가게가 있었다. 치킨, 피자, 치킨과 피자, 족발, 보쌈, 냉면, 닭발과 오돌뼈 등을 파는 야식집까지. 내게는 그 명단이 삶의 박람회처럼 보였다. 각각의 가게에서 열심히 불을 지피고 튀기고 굽는 사장님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눈치를 주는 모습도, 몰래 재료를 덜어내는 모습도, 잠깐 가게 밖에 나와 쭈그려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상상했다. 실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에 얼마나 가게가 많을까, 그 가게들은 다 어떻게 먹고 살까. 하루에 얼마를 벌고, 아르바이트생에게 어떻게 급여를 주고, 혹시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거나 세금을 조금씩 덜 내진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었다. 삶의 모습들에 대한 호기심일 뿐이었다. 지금쯤 그 숱한 가게들의 사장님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직 그곳에 있을까. 쿠폰북에 상호를 올리는 대신 배달 앱 알림을 받아 가며. 아니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생업에 지쳐 문을 닫았을까. 그 모든 생리. 내가 이름을 모르는 무수한 이들의 의사소통과 감정의 소모와 육체의 버둥거림이 다 없었던 일처럼 느껴지는 이 시기. 그리고 나는 앨리스 먼로를 읽었다.

일일이 살피기엔 번거롭고, 눈대중으로 훑기에는 실패만 하게 될 일. 그래서 그 일을 하겠다 나서는 사람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영역이다. 잊히지 않는 꿈과 쿠폰북을 살피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지나치는 법이 없다. 무릎을 꿇어 책상의 아래를 더듬고 살피듯이 먼로는 잊힌 줄 알았던 일과 잊고 싶었던 일을 굳이 꺼내어 그 사소하고 별 볼일 없는 사건들의 인과를 가지런하게 정리한다. 이 작업을 통해 독자는 우리가 우리의 날에 벌어졌던 사건들의 매듭을 풀지 않고 잘라버린 뒤 구석에 쌓아놓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구석에 쌓아놓는다는 것은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잊고 산다는 것이다. 우리만이 아니었다. 먼로 역시 그랬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도, 캐나다의 옛 시절을 살아온 그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결국 분모는 같았다.

잊은 줄로 알고 지내온 것은 스스로를, 혹은 다른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단편집의 마지막 문장을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라고 끝맺는 것일 테다. 먼로의 단편은 서정으로 쓰인 면죄부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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