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의 타히티 여행

in #ateu8 years ago (edited)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어딘가로 떠난다. 폴 고갱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위해 타히티를 선택했고, 하멜은 세계 무역을 위해 험난한 바다에 몸을 맡겼다. 메리안은 자신이 좋아하는 곤충을 위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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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이아 오라나 마리아〉

 

떠나는 이유 머무는 이유

폴 고갱의 작품 <이아 오라나 마리아>, 우리말로 ‘당신을 환영합니다, 마리아’는 1891년 도시의 삶을 버리고 타히티로 온 자신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고갱은 어려운 가정 살림 때문에 17세가 되던 해 선원이 됐고 7년간 바다를 누볐다. 그 후 고갱은 주식거래소에서 일하며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갔다. 20대 시절 인상파 화가 피사로와 사귀면서 고갱은 인상주의에 매료됐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갔다. 35세 되던 해(1883년) 고갱은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도구를 가지고 브르타뉴의 퐁타방(Pont Aven)으로 그림 여행을 떠났다. 고갱은 사랑하는 아내와 4남 1녀의 자녀를 외면한 채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나섰다. 고갱은 1888년 10월부터 12월까지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고흐와 함께 작업을 했다. 고흐와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지만 고갱의 존재가치를 한껏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를을 떠나서 파리에서 작업을 하던 고갱은 도시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삶의 권태가 찾아오면서 그림에 대한 열정이 식어 갔다. 고갱은 1891년 4월 문명사회와 단절된 타히티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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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원주민의 모습을 예술로

타히티는 고갱의 그림을 통해 알려진 남태평양의 작은 섬이다. 유럽인들은 이 섬을 지상의 낙원이라고 부른다. 고갱은 타히티가 간직한 태고의 아름다움, 투박하지만 소박한 꿈을 지닌 원주민의 모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전원에 널려 있는 눈부신 모든 것이 나를 눈멀게 만들었다’는 고갱의 말처럼 고갱은 조국 프랑스를 떠나 히바오아 섬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타히티의 자연과 원주민 모습을 화폭에 강렬한 색채로 담아냈다. 실제로 그의 대표작은 모두 타히티에서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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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타히티의 여인들〉

 

고갱은 원주민들과 생활하면서 <나페아 파 이포이포>, <3인의 타히티인> 등의 대작을 그렸다. 2년 후 안정된 타히티 생활을 위해 돈을 마련할 요량으로 잠시 파리에 들렀지만 여전히 파리는 복잡했고, 파리 미술계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그림이 잘 팔릴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사라지고, 그에게 남은 것은 상처받은 자존심뿐이었다. 고갱은 1895년 2월 다시 자신의 안식처이자 예술의 유토피아인 타히티로 돌아왔다. 자신의 그림세계가 파리 미술계에서 무시됐다는 사실에 격분한 고갱은 더욱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에 몰입했다. 6년 뒤인 1901년 고갱은 다시 파리로 돌아와 <타히티 작품 전시회>를 개최했다. 다행히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고갱은 후기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인정받았고, 유럽에서도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고갱은 새로운 자유를 갈망하며 다시 타히티로 떠난다. 그는 그의 모든 예술적 영혼과 열정을 이곳에 바친다. 고갱은 열네 살 어린 파후라와 살면서 그의 대표작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완성시켰다. 이 작품을 완성한 후 고갱은 건강이 나빠졌다. 고갱은 1903년 5월 8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다. 그의 이젤에는 미완성의 <눈 덮인 브르타뉴 마을>이 걸려 있었다. 타히티의 수많은 섬들이 신의 조화로 만들어졌다면, 타히티의 명성은 고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글_최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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