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고루 앞에서
호로구루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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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휴가를 더 내 평온하기 이를데없는 나 혼자만의 마지막 연휴. 어제는 아내와 연천 쪽을 다녀왔다. 일정이 있어 진종일 밖에서 쏘다니지는 못했고 코로나 공포로 마스크를 꼭꼭 싸매고 사람 드문 곳을 꼽아 다녔지만 나 같은 사람 역시 하나 둘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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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는 우리 국토의 중심이다. 압록강에서 두만강, 해남 땅끝마을에서 부산 영도 앞바다까지 3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지리적 중심이며 수천 년 동안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진 왕조와 나라들의 각축전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곳이며 천년 이상 이 땅의 수도를 품은 지역으로 문화와 물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하나의 퀴즈. 경기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이 살아 왔던 (또는 그렇다고 고고학적으로 판명된) 지역은 어디일까? 답은 경기도의 최북단에 있는 경기도의 3곳 밖에 없는 군 중의 하나인 연천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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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증명한(?) 사람은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빅터밸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던 그렉 보웬은 학비가 모자라 군에 입대했고 1974년 한국의 동두천 미군 기지에 근무한다. ‘인디언 머리’ 2사단 소속 하사관이었던 그는 연천 일대에서 오래된 충적토 지대를 발견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새로이 사귀게 된 한국인 애인과의 장소도 늘상 한탄강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웬은 산삼 본 심마니처럼 기뻐 날뛰며 부르짖는다. “내가 뭘 찾았는지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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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렇게 정신없이 외칠만 했다. 그건 27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슐리안 석기 형태의 주먹도끼였던 것이다. 그때껏 아슐리안 석기는 아프리카와 유럽에서만 발견됐을 뿐이고 아시아는 ‘미개한’ 대륙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만큼 이 발견은 세계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는 대발견이었다. 당연히 연천군은 전 세계적인 선사유적지로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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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은 그렇듯 선사기대부터 사람이 살아왔던 곳이지만 강원도 평강에서 발원한 한탄강이 임진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요지로서 역사 시대 이래 많은 환난과 사연이 깃든 지역이기도 하다. 연천군은 현재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치한 최전방 지역으로서 지금도 군인들의 주거와 왕래가 번다한 곳이거니와 아득한 옛날 삼국 시대에도 그랬다. 휴전선 이남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고구려 유적 중의 하나인 호로고루성을 비롯한 연천군내 고구려 유적은 치열했던 과거의 흔적을 미세하게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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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성은 연천군 장남면에 위치해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의 성이다. 화산지형에 형성된 천연 절벽을 근간으로 하고 임진강 지류가 흐르면서 낮아진 지역을 성벽으로 보완한 일종의 요새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 호로고루 요새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는 두 차례에 걸쳐 개축해 사용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호로고루 요새 앞에는 배를 타지 않은 채 말을 타고나 도보로 강을 건널 수 있는 첫 번째 여울목이 형성되어 있었다. 즉 강 위로 난 육로인 셈이었고 남진(南進)의 전진기지이자 북진하는 적을 막을 수 있는 최적의 요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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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장수왕 때 장수왕 본인, 또는 고구려군의 총사령관은 이 요새 위에서 임진강을 건너는 3만 대군을 굽어보며 백제의 수도를 향한 총진군을 명령했을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100여년 후 고구려군이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에 의해 쫓겨 갈 때에는 패잔병들을 수습하면서 임진강변에 이른 백제군의 동태를 살피는 최전방 요새였을 터이고. 규모는 작지만 그 어느 곳보다 많이 발견된 고구려 기와는 그 중요성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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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연천군 왕징면의 고구려 요새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유물들 중 일부는 이 일대에 휘날리던 고구려 깃발의 최후를 상상케 한다. 숯이 된 곡식들과 고구려 찰갑옷 상의 한 벌, 갑옷조차 챙겨 입지 못하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질러야 했다면 아마도 기습을 받았을 것이다. 삼국 통일의 마지막 시위를 당기던 김유신의 신라군이 고구려 공략의 첫발을 디딘 곳이 이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 했을 것이다. 호로고루성은 가장 먼저 무력화해야 할 요충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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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은 고구려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최전방이었다. 임진강을 잃으면 국경은 예성강으로 물러서야 했고 그렇게 되면 평양이 위험해진다. 그래서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 성 등 임진강변에 성을 쌓아 신라군에 대응했고 신라군도 임진강 남안에 성을 쌓고 임진강 맞은편에 눈에 불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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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호로고루 성은 중요했다. 당나라와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던 신라는 호로고루를 요새화했다. 그런데 이 지역을 처음 점령해 본 신라의 석공들은 연천 지역에 흔한 현무암 (화산 지형)을 다룰 줄 몰랐다. 고구려 석공들은 현무암을 능숙하게 다뤄 성을 쌓았고 천오백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축성 공법을 자랑했지만 신라 사람들은 먼 곳에서 편마암을 가지고 와서 성벽을 보강해야 했다. 그래서 호로고루 성벽은 분단(?)돼 있다. 검은 성벽은 고구려것, 흰 성벽은 신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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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충선왕 때다. 오늘날의 영역은 아니었고 오늘날에는 연천에 속해 있는 마전, 삭녕 등은 다른 고을로 분류되기도 했고 연천 자체가 철원, 장단 등 인근의 큰 고을에 포함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개성으로 갈 때 가장 편리한 교통로로 중시된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 환난의 역사는 6.25 때 까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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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당일 개성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의 탱크 부대가 선택한 남침로가 바로 호로고루 앞의 얕은 여울이었다. 1951년 겨울에도 이 일대의 임진강 변에서 중공군과 UN군은 생사를 건 혈전을 치르게 된다. 중공군 역시 고랑포 나루를 건너 공격해 왔고 한국군과 미군은 물론 영국군, 필리핀군, 콜롬비아군, 벨기에군, 태국군 등 형형색색의 UN군들이 이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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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서 전투를 벌인 영국군 한 명은 평생 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했다. 잠들다 문득 깨어 보면 발치에 자신이 총검으로 찔러 죽인 중공군 소년병이 앉아 있는 악몽이 내내 계속된 것이다. 그러던 그가 몇십년 뒤 참전용사 한국 방문 행사에 참석했다. 일단 그는 한국의 변한 모습에 기절할 만큼 놀랐다. 그가 보았던 한국은 그야말로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에 굶어죽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폐허였지만 오늘날의 한국의 모습은 상전벽해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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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갖춰 입은 양복 단추가 떨어져 양복점을 방문했을 때 그는 또 한 번 감격한다. 주인이 참전용사인 것을 알고 연신 감사하다며 비용을 받지 않고 수선을 깔끔하게 해 준 것이다. 그 이후 다시는 중공군의 유령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 유령은 영국군 노병의 죄책감이 빚은 허상이었을 것이다.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널 죽인 게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어.” 하는 생각을 하게 됐을 때, “이 나라가 이렇게 바뀐 데에는 내 덕도 조금 있다고!” 하는 긍지를 갖게 되면서 허상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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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어느 곳, 어느 고을이 그렇지 않을까마는 현재 대한민국의 경기도가 시작되는 땅이자 그 끝인 땅 연천은 그 굽이굽이에 거친 역사의 흉터를 드러내고 있다. 호로고루에서 임진강을 내려다보면 허다한 잡생각이 스쳐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수십만년 전의 까마득한 역사를 품었고 고구려인의 힘찬 구령과 패배의 한탄이 메아리쳤던 곳이며 한국어, 중국어, 영어, 터키어, 프랑스어 등등을 골고루 쓰는 군인들이 격돌하다가 숨져간 전적지 앞에서 어찌 무념무상이 가능하겠는가.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 나왔다. <굽이치는 임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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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이 흐르는 강 어둠에 잠긴 강
피 어린 아픔 안고서 꿈틀대는 강
시퍼런 너의 물결은 전사(戰士)의 원한이련가
잘려진 산하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강
아 분단의 강 붉게 타는 임진강
조국을 하나로 이어 이으며 굽이쳐 흘러가네
아 해방의 그 날을 맞이할
아아 민족의 물줄기여
아아 통일의 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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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오백년 전에도 서로 다른 깃발을 든 병사들이 이 강과 성을 사이에 두고 모질게도 싸웠고 천오백년 뒤에도 그랬다. 물이 줄면 걸어서도 건널 수 있었던 고랑포에는 얼마나 많은 군홧발들이 창과 총을 짚었을 것인가. 아마도 그들의 원혼이 호로구루의 성벽 이끼 하나 하나로 맺여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다시는 이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어느 민족 누구든 원한을 쌓을 일 없기를, 평화롭게 흐르는 임진강처럼 그저 평화하기를. 호로구루성의 성벽을 향해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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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에 다녀 오셨군요
저도 시간 나면 찾는 곳입니다.
호로고루 성에서 남북평화콘서트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