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를 폐지해야 한다 :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교과과정

in Korea • 한국 • KR • KO4 years ago

어차피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기에, 학문적 논의 차원에서라도 얘기거리를 마련하고자 써본다.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지만, 내가 몇십 년 동안 계속 관심을 갖고 풀려고 하는 문제 중 하나는 '교육과정(敎育課程)'을 어떻게 짜야 할까, 하는 문제이다. 이는 다양한 층위와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사교육(입시교육을 뜻하는 게 아님)의 목표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공교육의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교육이란 한 사회가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학습시킬 것인가와 관련된다. 나는 이 글에서 '교육'을 공교육과 호환되는 의미로 사용하되, 다른 의미로 사용하게 되면 밝힐 것이다. 또한 대학교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다른 논의의 장을 마련할 것이다.

나는 '문사철(文史哲)'로 대표되는 인문학을 폐지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또 그 대안으로는 '뉴 리버럴아츠(New Liberal Arts)'를 제안했다. 이른바 문이과와 예술까지 통합하는 교육 방안이다. 물론 여기서 제안한 것은 고등교육의 사안이므로, 더 논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문이과의 통합'은 왜 필요한 걸까? 통합하기 전의 '문과(文科)'는 무엇이고 '이과(理科)'는 무엇인가? 많이 동의할 테지만, 이과 교육의 핵심에는 수학과 자연과학이 있다. 거꾸로 말하면, 문과는 수학과 자연과학을 충분히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게 타당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이치에 닿지 않는다. 실은 많이 배울수록 좋다. 물론 여기서 '충분히' 공부한다는 게 어느 정도까지를 가리키는지는 전문가 합의가 필요한 문제다. 이 문제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한 사회가 개인에게 어디까지 학습할 것을 요구하느냐와 긴밀히 연관되기 때문에, 수학과 자연과학의 분과 전문가뿐 아니라 사회를 설계하는 더 넓은 범위의 전문가까지 참여해야 할 것이다.

만일 한 사회가 미래 세대에서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다면 너무나 무책임한일이다. 그렇다면 '문과'가 정당화될 근거는 무엇인가? 아무리 찾아봐도 그 근거를 찾지 못했다. 이 글은 문과가 꼭 있어야 할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이에게 호소한다. 나에게 좀 가르쳐 달라고.

문과의 특징으로 내세워지는 건 '언어', '역사', 각종 사회과학(지리, 정치, 경제, 법 등)이다. 하지만 첫째, 이들 교과는 이미 이과생에게도 가르치고 있으며, 둘째, 이들 교과 때문에 수학과 자연과학을 조금만 가르쳐야 할 근거는 전혀 없다. 아마도 제한된 시간에 모든 걸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비중을 조절했다는 정도의 변명이 있을 수 있겠다.

냉정하게 말하면, 문과 교육은 이과 교육보다 교육량이 적다. 물론 문과 고유의 과목을 가르치는 시간이 더 많다고는 하지만, 그건 부풀리기에 지나지 않는다. 수학과 자연과학을 가르치지 않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판단된다. 대부분의 이과생은 적어도 언어(한국어와 영어 따위)는 아주 많이 공부한다. 역사와 사회과학은 사실 더 가르쳐야 맞다고 본다.

모든 학생에게 수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해 동일한 필수과목을 가르치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가장 쉽고도 좋은 방법은 교과목으로서의 '국어'를 없애는 것이다. 왜 국어가 독립 과목으로 있어야 하는가? 국어교사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국어를 없애되, '문학' 과목이 현재의 국어를 반쯤 대체하고, 역사와 개별 사회과학, 그리고 과학사와 교양과학이 기존 '국어'의 나머지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본다. 이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의 언어 능력은 아마 지금보다는 향상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면 왜 이런 문이과 분리가 지속되는 걸까? 두 가지 정도로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수천년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수백년 간 이어온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적폐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사(士)'의 우위를 포기하지 못하는 세력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라는 판단이다. 그러나 아,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시대착오적이다. 둘째, 현 교육 시스템에 내장되어 있는 '생활 기득권'을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중등교사의 현행 분포를 쉽게 바꾸지 못하는 행정적 문제가 있다. 문과 교과를 맡는 교사를 갑자기 축소할 수도 없고, 수학과 자연과학 교사를 갑자기 늘리기도 어렵다. 따라서 중등교사를 양성하고 재교육하는 시스템이 전면 개편되어야 하는데, 교육 당국이 이 문제에 손을 대기란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쥐 노릇하기보다 어렵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도 기존 교육 시스템을 고수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 정도 얘기하면 꼭 끼어드는 게 '대학입시' 문제이다. 입시제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대통령을 탄핵하기보다 어렵다. 입시에 관한 한 누구라도 직간접 당사자이며, 따라서 전문가를 자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교육기관이 공교육 전문가인 양 개입하며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한다. 입시 문제 앞에서 중등교육 개혁은 요원하다. 그러나 나의 문과를 폐지해야 한다는 나의 제안이 입시 문제 때문에 좌우될 이유는 없다. 모든 학생이 모든 과목을 똑같이 배우자는 게 내 아이디어의 핵심이다. 입시는 그 후에 고려해도 좋다.

오히려 대학의 각 학과가 어떤 학생을 원하는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중등교육 교과과정을 둘러싼 논쟁이 고등교육과 긴밀히 연결되는 건 이 때문이다. 대학에서의 교양교육과 전공교육을 둘러싼 쟁점도 있다. 즉, 대학 학부과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뉴 리버럴아츠'를 제안하면서 어느 정도 생각해 보았는데, 학부과정(3년 정도가 좋아 보인다)은 뉴 리버럴아츠를 중심으로 교육하고, 대학원에서 구체적인 전공에 진입해도 충분하다. 이런 고등교육 방안을 제안하는 이유는, 첫째, 현재의 대학 교과과정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나 어울리는 것이었는데 너무 오래 잔존해왔으며, 둘째, 그 당시의 선진국한테 배워왔으면서 동시에 '기존 지식을 빨리 따라잡기(fast follow)'에 적합했고, 셋째, 이미 선진국인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 새로운 고등교육 교과과정의 모델을 선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선례 없는 상황'에서의 교육에 대한 나의 다른 글에서 조금 더 깊게 다룬 바 있다.)

나는 고등학교까지의 중등교육 교과과정이 문과를 폐지하고 수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해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내용을 가르쳐야 하고, 대학 학부에서의 고등교육은 뉴 리버럴아츠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전문지식과 기능은 대학원에서 떠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오고 있다. 이는 비단 대한민국에 국한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대학이 어찌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무도 내놓고 있지 못하다. 대학은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학의 역할이 인재 공급일까? 인문사회과학을 비롯해 기초학문은 대학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인문사회과학 연구자 및 교수자는 어떻게 육성해야 할까? 인문사회과학이 이공계를 포함한 인재 양성과 인성 배양에 어떤 기여를 해야 할까? 또한 문화예술 영역은?

긴 물음이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고등학교에서 문과를 폐지하자. 진정한 문이과 통합의 방향은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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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는 바를 잘 정리 해주신 것 같습니다. 제가 문과 출신이지만 제가 선택한 한국지리나 경제 같은 선택과목을 보면 과학적인 사실을 알아야지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는데 굳이 문과 선택 과목이라고 할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리는 문과이고 지구와학은 이과이고 이렇게 구분할 이유도 딱히 없을 것 같구요.

그리고 사실 제가 수능을 보기 전만해도 모든 학생들이 문과 이과 과목을 모두 수능에서 봐야 했는데 7차 교육 과정에서 문과 이과 완전 분리가 되었죠. 22년부터 수능에서는 문과 이과 구분을 다시 없앤다고 하니 기대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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