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962년 이후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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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962년 이후 과학기술
박정희 정부는 1962년 경제개발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개발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추진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년)을 기점으로 하여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과학기술은 이러한 경제개발을 어떻게 지원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국가발전 계획의 일부로서 조직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는 준비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기간에 과학기술 발전의 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기술진흥법(科學技術振興法)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1967년 과학기술 정책 수립 및 조정지원 담당 중앙관서로서 과학기술처(科學技術處)가 발족하였다.

이보다 1년 먼저 1966년에 이미 산업기술 개발의 핵심체로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종래의 국립연구소들의 단점을 개선한 새로운 운영방식의 현대적 연구소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뚜렷한 목적의식과 종합적인 실천방안이 제시된 것은 1971년에 들어서서 1970년대의 과학기술 정책 방향이 설정된 때라고 볼 수 있다. 즉, 1970년대에 들어와서 1970년대 과학기술 개발 방향을 ①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구축, ②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 ③ 과학기술 풍토조성에 두고 제3~5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 중의 과학기술 개발사업을 전개시켜 온 것이다. 발전기반의 구축으로서는 과학기술처의 발족 이래 기술개발촉진법(1972), 기술용역육성법(1972), 특정연구기관육성법(1973), 국가기술자격법(1973) 등이 제정 공포되어 과학기술 발전의 기초를 구축하였으며, KIST의 설립으로 연구개발 체제의 정비에 하나의 전환점을 만들어 놓았다.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취약점의 하나는 과학기술 인력의 양적 부족과 질적 미흡에 있는데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0년대의 공업화 과정에서 그 수요가 급증하는 과학자·기술자·기능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부는 장기 인력 수급 계획의 수립, 해외 두뇌의 유치, 특수 이공계 대학원인 한국과학원(韓國科學院)의 설립, 이공계 대학교육의 진흥, 실업교육과 직업훈련의 확충, 국가기술자격 제도의 창설, 기능대학의 설립 등, 종합적인 인력개발 체제를 갖추고 다각적인 인력 양성과 활용 시책을 펼쳐나갔다. 한편, 이 기간에 국제 기술협력 활동도 크게 강화되었다.

과학기술처는 국제 기술협력의 총괄청의 위치에 서서 국제연합(UN), 국제개발처(AID), 콜롬보계획, 여러 나라와의 기술협력 등을 강화하여 왔으며 나아가서 아프리카·동남아시아 국가 등 개발도상국가들에 대한 기술제공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한국은 1950년 초부터 1960년대까지 약 1억 6,000만 달러의 기술원조를 받아왔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1972년에는 보다 효율적으로 급변하는 기술 수요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제기술협력 5개년계획을 입안하였다.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이라는 면에서 살펴보면 1960년대는 공업화의 시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는 생산시설과 기술을 거의 전적으로 선진국에 의존하면서 일부 전략적 수입대체산업(에너지·비료·시멘트 등)과 수출지향적 경공업을 육성하였다. 이 기간에 과학기술 부문 활동의 특색은 주로 도입된 선진기술이 한국기업의 생산과정에 적용될 때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현장 문제해결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는 성장단계라 할 수 있다. 이 기간에는 더 선택된 전략산업(기계·철강·화공·조선·전자 등)을 육성함으로써 산업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데 주력하였다. 이 기간의 과학기술 부문 활동의 특색은 종래와 같은 당면문제 해결 역할 외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거나 선진국에서 도입한 기술의 개량 향상에 힘쓰는 일이었다. 1980년대에는 이와 같은 1960~1970년대에 이룩한 공업화를 기반으로 하여 선진공업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자주개발(自主開發) 단계로 들어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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