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과학기술
한국에서 현대적인 과학기술 활동이 싹튼 것은 구한말로서, 이때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후의 중앙공업시험소),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후의 농사시험장)이 일본인에 의해 발족되었다. 이러한 연구기관은 1910년 국권피탈로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면서 점차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규모가 확대되고 내용도 충실해졌다. 일본에 의한 근대적 교육제도의 보급, 산업의 진흥 등 부분적인 근대화 작업의 추진과 더불어 과학기술의 토양이 배양되는 듯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이익을 위한 한국인 회유 방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파행적인 것에 그쳤고, 한국인의 과학기술 연구 활동의 기회는 철저하게 제한되어 결국 한국인 자체의 과학기술 능력개발에는 그다지 큰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
1945년 8·15광복 직전에는 과학기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이공학부와 의학부,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의학전문·수원고등농업학교·광산전문 등이 있었고, 연구기관으로는 조선총독부 중앙공업시험소·농사시험장·중앙지질조사소 등이 존재했었다.
8·15광복으로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대한민국의 연구 활동은 한동안 공백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후(戰後)의 혼란, 국토의 분단, 훈련된 과학기술자의 부족과 시설 미비 등으로 시험·연구 활동은 부진을 거듭할 뿐이었으며 과학기술 교육도 심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독자적인 운영의 기틀이 잡혀가고 우리 손으로 교육된 젊은 과학기술 학도들이 교육을 마치고 과학기술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할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6·25전쟁으로 막대한 연구·실험 시설의 파괴와 인적자원의 손실을 입어 또 다시 과학기술 활동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활발한 복구사업에 주력하였고 미국 원조기관의 도움도 있어, 1950년대 후반부터는 그 동안 관계기관에서 양성된 많은 과학기술자의 등장과 함께 외국원조에 의한 기재의 도입 이용으로 점차 연구활동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연구시설도 확충되어 전쟁 전의 상태보다 훨씬 나아진 것은 물론, 의학·화학 등 몇 분야에서는 주목할 만한 연구 활동이 진행되었고, 아울러 원자력(原子力)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세계적 추세에 따라 초보적이기는 하나 원자력 사업도 진행되었다. 국립 연구기관은 원자력연구소를 비롯하여 23개에 이르렀는데, 이 연구소들의 관장업무는 산업기술 향상을 위한 연구, 공통적 기초업무의 연구, 국민의 보건·복지의 연구, 국가발전에 관한 연구 등으로 나눌 수 있었으나, 그중 대부분이 생산품 시험에 그쳤을 뿐 연구·실험 분야에는 손을 대지 못한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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