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미소의 미소(微小)화 - 얼굴 있는 여성과 얼굴 없는 여성 사이에의 유니크한 저항.
영화<소공녀> 미소의 미소(微小)화
- 얼굴 있는 여성과 얼굴 없는 여성 사이에의 유니크한 저항.
몇일 전 네이버 뉴스에서 계속 이자율이 오르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거기에 사람들이 남긴 댓글에 이런 말이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빚내서 차사고 집 샀던 인간들 이제 이자폭탄 맞고 정신차리겠지”. 여기서 사람들이 말하는 주제, 자격은 자본으로 등가시 된다. 따라서 자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본을 구축하기 위해 살아야하며, 그 자산의 범위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자신의 주제를 아는 것이라는 것은 상식과 같은 생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된다. 그 자본은 정말 사람의 가치와 등가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의문이 필요한 지점이다.
전고은 감독의 영화<소공녀>는 자본이 없으면 취향과 꿈을 버리고 그저 자본을 구축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역량과 시간을 써야하는가? 하는 물음 조차 사라진 현실 사회에 발랄하고 무심하게 그 질문을 던진다. 이런 무심함은 다른 독립영화들과도 차이를 갖는다. 무거운 독립영화들과 다르게 이런 무심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영화의 질문을 듣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현실상황을 고발하는 독립영화의 경우 비참하고 고루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어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러한 영화들 역시 갖는 효과가 있겠지만 더 많은 대중을 만나기에 이런 무심함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장면과 영화가 이런 상반된 것을 지향함으로 인해서 그런 부조화를 보는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관객들이 새로운 생각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 후, 미소의 청소장면과 함께 나오는 발랄한 음악은 미소가 아주 역동적으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어쩌면 친구의 집을 청소하고 쌀을 얻는 것이 비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영화에 깔리는 음악의 느낌은 그럼에도 미소가 주체적으로 열심히 산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친구가 준 쌀을 흘리고 갈 때 조차 음악은 경쾌하다. 이러한 장면에서 미소가 아무리 주체적으로 노동하고 삶을 꾸린다고해도 오르는 월세와 담뱃값 앞에서는 돈을 모을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우리의 통장 속 월급 같이 말이다.
이런 그녀의 집은 이미 매우 춥고 열악하다. 똑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아랫집 주인님에 의해서 월세를 올린다는 소리를 듣는 동안 방안의 바퀴벌레가 출현한다. 영화의 영어제목인 'micro habitat'의 사전적 의미가 바로 ‘미소(微小)서식환경’인 것과 연관하여 생각해보면 이는 미소가 앞으로 점점 미소화되어 곤충, 미생물과 같이 변해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녀는 존재하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점점 작아져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사라져가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세금, 약, 월세 중에 월세를 포기하기로 마음 먹고 벽장 안에서 대학 시절 밴드활동을 했던 사진을 꺼내본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짐을 싸들고 친구들을 찾아 길을 나선다. 처음 만난 그녀의 친구는 커리어우먼으로 짧은 점심시간동안 미소를 만난다. 그 친구는 과도한 업무로 매우 피곤해져 있으며 사회적 성공을 꿈꾼다. 그리고 미소에게 “너 바람든 거 같다. 너의 삶의 방식이 스탠다드는 아니지.”라고 말하고, 담배는 끊었냐는 질문는 화들짝 놀라며 “내가 언제 폈다고!”라고 속삭이며 주위를 살핀다. 미소의 첫 번째 친구는 대학 졸업 후 완전히 자본주의 체제에 잘 안착해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한 것을 보인다. 그녀가 생각하는 스탠다드란 무엇일까? 이러한 표현은 영화에서 계속 등장한다.
미소는 두 번째로 가난한 집에 시집 간 친구의 집에 간다. 그 친구는 이전 친구와는 정반대로 자기 자신은 하나도 없이 집안일만 하고 있었다. 같이 잠드는 방 안에서 그녀가 치던 키보드를 보며 잠시 감상에 빠지지만 친구는 가사노동으로 지쳐 이미 잠들었다. 이 때 흐르는 피아노의 단선적인 음악은 감정을 자극한다. 이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아침이 오고 아침 식사를 한 그릇을 설거지 하며 신경질적으로 던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 장면에서 그녀의 친구에게는 그런 감정의 사치를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느낄 수가 있다.
세 번째로는 이혼한 남자 후배 집에 가게 된다. 여기서 후배는 집을 구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한다. 사랑의 가치 또한 자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느껴졌고 미소가 간다는 말에 “이래서 여자는 집에 들이는게 아니랬는데”라는 전근대적인 말을 한다. 여성 폄하적인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부분이 거북하다.
이런 거북한 상황은 네 번째로 가게되는 선배의 집에서 더 극대화 된다. 식사 장면에서 선배의 어머니와 하는 대화에서 그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직업을 묻자 미소가 “가사도우미요”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순간 놀라시더니 “그래 여자는 다른거 잘 할 필요없어. 집안일만 잘하면 되지” 라고 말한다. 그리고 ‘천상여자’를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식사를 마치고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음악와 함께 선배의 가족이 노래하는 장면은 살짝 오싹하기도 할만큼 (무맥락적으로 한 여성을 가족화하려는) 부담스러운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음악이 삽입되면서 장면은 공포보다 웃음으로 나아간다. 이런 부조화는 기존 문화에 대한 풍자로 느껴지며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이 음악은 고추방의 등장과 함께 딱! 끊긴다. 고추방의 계략은 미소와 자신의 아들을 한 방에서 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미소는 선배의 방 앞에서 들어가기를 망설인다. 그러자 선배는 “전립선이 안좋아서 아무것도 못해 그냥 들어와” 라고 한다. 이런 장면에서 왠지 불편해하는 미소를 이상하게 만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상황은 남성이 여성을 밀실로 어떻게 유인하는가 그리고 유인한 뒤 여성의 지위를 어떻게 더 취약하게 만드는가 하는 지점을 일깨워준다. 미소와 한 방에서 자게된 그 선배는 점점 더 선을 넘는다. 미소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자 미소가 “폭력적이야!”라고 말을 한다. 그러자 선배는 “별개다 폭력적이다”라고 말하며 “나랑 결혼할래?”라고 묻는다. 미소는 남자친구도 있고 취향도 있다고 말했지만 선배는 계속해서 어차피 갈데도 없는데 그냥 간소하게 결혼하고 들어와서 살면되겠구만 이라며 자기 편한대로 말을 한다. 그 선배의 말에는 ‘집도 없으면서 취향을 챙길 정신은 있나보지?’ 하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선배의 집은 엄청 넓었다. 돈많은 집안으로 시집 간 선배 역시 대학시절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미소는 계속해서 친구들의 집에 갈 때 계란 한 판을 사가지고 가는데 이것은 대학시절과는 다른 30대의 인생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30살이 되면 사람들은 ‘이제 너도 나이가 계란 한 판인데 정신차리고 살아야지’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정신차리고 산다는 의미는 아마도 꿈을 쫒는 철없는 행동보다는 사회체제와 분위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지배적인 흐름에 합류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나이가 계란 한 판이 되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보다는 사람들과 원만히 지낼 수 있는 새로운 가면을 마련하여 쓰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소가 선배의 남편에게 “학창 시절의 선배는 뜨거운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선배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숨기고 싶은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사건으로 미소는 선배에게 “염치없다”라는 소리를 듣고 집을 나오게 된다.
그녀는 스스로 혼자 지낼 곳을 찾아보지만 자신이 가진 돈에 맞는 집은 찾을 수 없었다. 미소는 창문이 있는 집을 가지고 싶었는데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창문은 매우 작았고 그 창문은 열자마자 담배피는 남성과 눈이 마주치는 곳이었다. 그러자 중개사는 “괜찮아. 여기 문을 딱 잠그고 커튼치면 여기 누가 사는지 모르거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녀는 창문조차 열고 살기 힘들며 살고 있으며 살고 있어도 쥐죽은 듯 없는 사람처럼 살아라는 것이 사회의 명령과 같은 것으로, 묵언적 강요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자본에 맞는 집을 찾으러 가면 갈수록 불도 켜지지 않고 곰팡이가 가득한 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느낌보다는 정말 곰팡이와 같은 미생물, 곤충이 서식하는 곳 일 것만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의지할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견딜 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남자친구 역시 그녀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돈을 벌러 사우디아라비아에 가기로 결정해버렸고, 이러한 사실은 그녀의 얼굴을 점점 더 희미해져 가게 만들었다. 둘의 새벽 이별장면은 푸른 빛이다. 둘의 포옹 장면과 키스장면은 유독 둘의 뒷모습이 강조되는데 이것은 우리 시대의 청춘 커플들의 뒷모습과도 유사하게 보인다. 이 때부터 급격히 미소의 얼굴보다 미소의 뒷모습이 더 강조되었다. 이러한 구도는 배수아 작가의 <푸른사과가 있는 국도>와 느낌과 유사하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도 미소와 비슷하게 큰 욕심 없이 담배 한 대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여성이다. 조건에 따라 결혼하는 여성에게 이질감을 느끼며, 기호로써의 담배를 말한다. 90년대의 소설과 이 영화가 비슷한 국면을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떤 청년들의 불안한 정서와 외로움 큰 야망없이 산다는 것의 패배성은 어느 시대나 보편적으로 청년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일까? 왜 주류로 편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지워지게 만드는 것일까?
이러한 맥락의 확장에서 그녀의 친구들은 미소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묵살한다. 그리고 한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취향을 선택한 결과로 오는 현실의 가혹함을 묵묵히 받아드린다.(공중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핸드드라이기로 말리며 카페에서 날을 샌다) 이런 행위 자체가 그녀에게는 현실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것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노동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좋아하는 술 한 잔 담배 한 대 피우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정도다. 미소를 제외한 사람들은 그냥 사회체제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맞으니 빨리 그 체제에 합류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미소는 그렇게 뛰어들만한 배경도 부족하다. 부모도 없으며 대학도 중퇴했기 때문이다. 보통의 공주스토리라면 백마 탄 왕자가 구원이라도 해주러 오겠지만 미소의 남자친구는 자신의 앞가림도 힘든 처지이다. 따라서 미소의 위치란 여성 안에서도 최하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여성 간의 위계 역시 영화에서 드러나는데 자본과 학벌을 가진 친구는 논문을 쓰며 미소에게 집안일을 맡긴다. 그리고 대학 졸업사진을 가진 직업여성 역시 미소보다 돈이 많으므로 미소에게 일을 맡긴다. 부모도 학벌도 없는 미소는 제일 아래에 위치한다. 이것은 결말에 같은 위스키를 마시고 있지만 얼굴을 가진 여성과 얼굴을 가지지 못하는 미소의 위상은 다르다. 영화 속에서 미소의 얼굴은 사람들에 의해서 점점 지워지다 결국 사라진다.
결혼을 하자던 선배의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밴드 구성원들은 미소를 아름답게만 추억한다. 미소의 노동과 고통을 미화한다. 당사자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타자들에 의해 추억화되며 그녀는 점점 자신의 장소성을 잃게 된다. 그녀는 결국 미생물과 같이 높은 빌딩 옆 습지에 살게된다. 그녀는 기존 사회 질서에 편입할 수 없게되면서, 보이지 않으며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의 끝에서 이런 의문이 든다. 지금 현대 사회에서 빚없이 사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끝까지 자본을 축적할 때까지 자신을 버려야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미소는 빚없이 사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런 삶의 방식 속에서 사람들에 의해 사회에서 점점 배제되어갔다. 사람들은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 빚을 내고 보통 사람, 스탠다드로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미소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유니크해진다. 그녀의 유니크는 가벼운 유니크가 아니다. 자신이 부정되는 사회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삶의 방식이 유니크이며 그것은 하나의 저항이다.
영화 속에 내포된 의미를 이렇게 많이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영화를 봤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하거나 의미를 포착하지 못한 부분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두었던 삶의 가치관과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하며, 나 또한 주인공인 '미소' 처럼 사회에서 배척되더라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네요
열심히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영화라 긍정적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것과 동시에 그만큼 사회가 그런 개인을 배척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현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삶의 방식을 구축하고 기존 질서에 균열을 가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