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teem#34]홍익희의 <세 종교 이야기> 더 나은 인간을 위하여
인류 역사 중심에는 언제나 종교가 있었다. 고대 시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은 종교를 중심으로 경제, 문화, 과학, 예술,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비록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성 중심의 사회가 출현하면서 종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발전하였고, 이로 인해 종교에 대한 권위가 과거에 비해 상당 부분 쇠퇴하였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종교에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다. 특히 유일신 사상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들은 다른 종교들에 비해 개인의 삶이 종교적인 가치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 개인의 삶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우선시하며, 모든 원인과 결과는 개인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종교적 믿음을 굳건하게 유지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들 삶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초월적인 모습으로 존재한다.
홍익희의 <세 종교 이야기>는 기원전 2000년 경의 수메르문명의 아브라함에서부터 출발한 세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이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중동 전쟁, IS 테러까지 이어진다. 역사적 사실과 신뢰할 수 있는 신화들이 뒤섞여 읽는 독자로 하여금 종교의 본질적인 모습과 가치에 대한 사유의 확장을 제공함으로써 현재 우리의 모습을 재단하고 삶에 대한 혜안을 제시한다. 삶을 위한 종교인가? 아니면 종교를 위한 삶인가? 그 답은 각자의 믿음에 달려있지만, 이 책을 통해 믿음에 대한 본질을 꿰뚫고 각자가 진리라고 외쳐대는 독선 속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이 발전하면서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도 동시에 발전했다. 고대 시대에는 우상 숭배를 통해 앎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들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한 최초의 종교였다. 유대교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들로 구성된 계약의 종교
로 그 중심에는 율법과 구약성서가 있다. 그들은 베타적이며, 오직 진리는 유일한 하느님이었다. 유대교는 다른 사람들에게 포교나 전도를 하지 않는다. 유대교인들 끼리는 모두 한 형제처럼 서로 도우며 살아가지만, 외부적으로는 철저히 폐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후 로마 시대 콘스탄티누스 대제(313년)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이단으로 시작한 기독교가 세력을 넓혀갔다.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다르게 누구나 기독교로 개종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비로움이 있었다. 이때부터 베타적인 유대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본격적으로 박해를 당하게 된다.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 떠돌게 된 유대교는 그들의 사상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지혜의 경전인 탈무드
다. 유대교는 이동이 용이한 상업과 교역에 집중하면서 부를 축적해 갔으면 훗날 자본주의 시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성경의 접근 방식에 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직접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행위를 장려했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근본적인 노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대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글자를 읽고 쓸 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인 시대에 이것은 실로 엄청난 차이로, 훗날 유대인들의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 성경이 잘못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경을 몰래 읽다 들키면 사형이나 화형에 처해졌다. 기독교는 유대교에 비해 베타적이진 않았지만, 교인들의 사유의 부재와 맹목적 믿음의 강요로 인해 중세 시대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을 일으키는 근본적 이유가 된다. 중세는 모든 것이 쇠퇴한 암흑기로 그 중심에는 기독교의 맹목적 믿음에 의한 폐단이 원흉이었다.
이슬람은 가장 나중에 출현한 종교다. 예언자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그들의 경전인 코란을 신성시한다. 이슬람을 믿는 자들은 무슬림으로 불리며, 이는 복종하는 사람
이란 뜻이다. 이슬람은 가장 나중에 출현했지만, 유대교와 기독교를 공격하면서 입지를 다지는데, 그 주된 이유는 앞선 두 종교가 하느님에 대한 해석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경우 다음과 외치기만 하면 이슬람교에 입교가 가능하다.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임을 증언한다." 참으로 쉽고 간편하다. 한때 이슬람 제국이 막강한 영토와 힘을 갖추게 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유대교는 율법에 의한 구원
을, 기독교는 믿음에 의한 구원
을, 이슬람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세 종교의 뿌리는 갖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매우 다르다. 문제는 자신들이 믿는 것만이 진리라고 외치며 상대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지인 예루살렘을 수차례 피바다로 물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2천 년 동안이나 세 종교는 삶을 위한 종교가 아닌 종교를 위한 삶을 살아왔다. 슬프게도 현대를 사는 우리들 역시 맹목적인 믿음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보다 한 종교인의 믿음으로만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적지않다. 믿음이 강하면 굳게 마련이고 굳어짐은 죽음과 동일하다. 모든 생명의 태어남은 아기처럼 유연하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대 로마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철학자 키케로는 "나는 말을 하더라도 아무것도 단언하지 않을 것이다. 수시로 의심하고 나 자신을 경계하면서 탐구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키케로의 말속에서 사유하는 인간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종교인과 더 나은 인간을 동시에 이뤄낼 수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인간이길 선택해야만 한다. 더 나은 인간과 더 나은 삶을 위한 종교는 언제나 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