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도가 바라본 JTBC 암호화폐 논쟁] 2) 화폐와 척도
안녕하십니까? @jin90g 입니다. 이번에는 "1) 가치가 변하는 것은 화폐가 아니다?" 에 이어서 화폐와 척도 개념에 대해 다뤄보려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JTBC 토론에서 유시민 작가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검토했습니다. 핵심은 "가치가 변하는 것은 화폐가 아니다" 라는 주장이 "법정화폐는 화폐다"는 유 작가님의 기본 입장과 모순을 일으켜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정화폐들도 가치가 변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상되는 반론에서 "안정적이어서 덜 변하는 것이 화폐고, 크게크게 빨리빨리 변하는 것은 화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검토해봤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더와 덜"이라는 것은 성질이 똑같은 물량 측면의 대상을 다루는 방법이지, "화폐이다 아니다"와 같은 성질의 판별을 내려주거나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저는 유시민 작가께서 주로 말씀하시던 "가치의 척도"라는 것을 가져와 주장을 보강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척도 개념에 대한 탐구입니다.
A. 화폐는 가치의 척도다. 그럼 척도는 무엇인가?
지난 번 글에서 정리했던 유시민 작가님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해봅시다.
- 만약 어떤 것이 가치가 변한다면, 그것은 가치의 척도가 될 수 없다.
- 가치의 척도가 될 수 없다면, 그것은 화폐가 아니다.
- 따라서 가치가 변하는 것은 화폐가 아니다.
이 주장에서 뽑아낼 수 있는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만약 어떤 것이 변한다면, 그것은 척도가 될 수 없다."
척도 : 측정하거나 평가하는 기준 / 다음 어학 사전에서 퍼왔습니다. 말하자면 척도라는 것은 뭔가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상거래에서는 흔히들 사고 파는 물건이 서로 "같은 값"인지 측정한다고들 하죠. 이때 유시민 작가는 값을 측정하는 기준을 화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측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이번에 인터넷을 조사하면서 어린이용 백과사전에서 아주 눈에 확 들어오는 이미지를 찾았습니다. 함께 보시죠.
예를 들어서 가로 3cm, 세로 4cm, 높이 2cm 직육면체의 부피가 24cc 인것을 알수 있으려면 우리에게 1cc 정육면체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때 1cc 정육면체는 일정한 부피를 가진 직육면체를 임의의 기준으로 분할하는 "단위"가 됩니다. 이제 직육면체에 1cc 단위가 몇개 들어가있느냐로 이 직육면체의 부피가 얼마인지, 그리고 다른 것과 모양이 달라도 부피가 같은지 다른지를 측정하게 됩니다.
이때 당연히 1cc 라는 단위가 들쭉날쭉 변하면 A직육면체와 B직육면체가 같은 부피인지 알수 없게 됩니다. 둘다 24cc 직육면체인데 A의 1cc가 B의 1cc보다 크거나 작거나 변하면 비교가 불가능하니까요.
이런 척도 개념을 화폐에 적용하는 것이 유시민 작가의 주장으로 보입니다. 화폐에는 1달러, 1엔, 1원같은 불변하는 단위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 이 사물에 가치 알갱이가 몇개 들어가있냐를 가지고 사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인 거죠. 그리고 암호화폐들은 한창 도입시기라 인기를 끌고 있다보니 1BTC 혹은 여러 화폐의 1코인 단위의 가치가 눈에 쉽게 포착될 만큼 크게 변하고 있으니, 유 작가께서는 화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두 가지 빈틈이 있습니다. 하나는 단위가 불변하려면 상거래에서 완전히 분리돼 이데아의 세계나 하느님의 손에 박제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엔화의 변화, 달러의 변화를 다뤘습니다. 로마 황제들이 은화 하나의 은 함유량을 줄여가는 것도 언급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김치 프리미엄"이라는 것도 직접 겪었습니다. 공급량이 부족하고 수요는 날뛰니 1비트코인이 이 나라에서는 얼마고 저 나라에서는 얼마고 대한민국에서는 세계평균보다 30% 비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짐바브웨나 베네수엘라에서는 한발 앞 서서 세계 시세보다 30% 비싸게 거래되기도 했죠. 일단 신만이 아는 세계에 박제를 해두지 않는다면, 불변하는 가치 단위 알갱이 1원은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빈틈은 바로 척도 개념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윤리교과서에서 주로 다루던 상대적 같음과 절대적 같음, 기하학적 같음과 산술적 같음과 관련돼 있습니다.
B. 성질이 다른 것들은 공통된 단위 1 가치 알갱이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앞서 직육면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법을 시연하면서, 유시민 작가의 화폐 가치 척도 이론이 불변하는 가치 알갱이 1원을 지지하는 주장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저는 이런 가치 알갱이 수를 세는 방법이 상당히 물질적인(유물론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드렸습니다. 지난번 글 1) 가치가 변하는 것은 화폐가 아니다? 에서 밝혔듯이, 1알갱이의 개수가 몇개 있냐. 그래서 더 있냐 덜 있냐를 측정하는 것은 성질이 똑같은 것을 대상으로 하는 물량 측정방식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장에서 거래하는 물건이나, 직장인들이 회사에 파는 노동력은 그렇게 성질이 똑같지 않습니다. 변호사의 법률 상담 서비스와 저의 법률 상담 서비스가 성질이 똑같을리가 없고(아 슬프다), 이공계 출신과 문과 출신의 프로그램 코딩 능력이 질적으로 똑같을 수도 없을 뿐더러, 같은 이공계 출신이라해도 주특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질이 다른 것들은 그 자체로 공통된 것을 갖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측정할 공통된 가치 1알갱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것들의 가치 척도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우선은 척도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의 기하학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C. 눈금 없는 자와 콤퍼스로 척도 찾기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 달리 말해 유클리드 기하학은 기본적으로 눈금 없는자와 콤퍼스를 이용합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펴 보시면 첫 1장은 삼각형 장입니다. 거기에는 숫자 1이나 2나 3은 언급도 없고, 점 선 면 블라블라 이렇게 개념으로 나갑니다. 단위는 한참 후에 가서야 공간을 다루면서 하나 둘 찾아내죠.
그럼 의문이 생깁니다. 단위 1 알갱이가 없는데, 이때는 도대체 어떻게 "같음"을 측정하느냐는 겁니다. 상거래를 하려면 주고 받는 물품이 서로에게 있어 값어치가 같아야 거래가 성사될텐데, 어떻게 1 단위 알갱이 없이 측정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유클리드 기하학 1장 삼각형 장을 보면, 크다/작다/같다 이 세 표현만 나올 뿐, 물량 단위 측정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기하학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비례와 논리입니다. 가령 피타고라스의 정리 가운데 3:4:5 비율을 만족하는 직각 삼각형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A 삼각형은 엄청 크고 B 삼각형은 비교적 작습니다. 그럼 우리는 저 둘이 다른 삼각형인가? 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금 없는 자와 콤퍼스로 측정을 합니다. 우리가 명확하고 확실해서 결코 변하지 않고 틀리지 않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저 두 삼각형이 동일한 비율과 각을 갖고 있다는 것 뿐입니다. 크기는 어쩌면 눈의 착각일 수도 있죠. 그러니까 A삼각형과 B삼각형은 본성상 같은 삼각형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물의 형상, 사물의 형태, 물질적 양이 아니라 성질을 기준으로 사물을 정의내리고 평가하는 방식은 단위 1 알갱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질이 서로 다른 것들을 측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1 가치 알갱이가 아니라 이 둘의 성질 사이에 놓이는 관계, 형상들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 거죠.
이렇게 사물의 형상과 성질을 기준으로 서로 관계를 맺게 했을 때 나오는게 상대적인 같음/상대적인 다름이며, 이때는 1가치 알갱이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신만이 아는 세계에 화폐 단위 1 알갱이가 박제될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적/비례적 측정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성질/형태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지 알갱이 1개가 아닌 것이죠.
부피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다 같은 형상을 가진 인형입니다.
D. 화폐, 가치 척도와 교환 매개 수단?
그러나 이런 기하학적인 비례 원리를 이용해 화폐 개념을 이해하려 하는 순간, 극적인 반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화폐가 교환의 매개 수단이다"라는 주장입니다. 이는 유시민 작가가 앞서 첫번째 글에서 언급한 기사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유시민 작가의 주장은 "가치가 변하는 것은 척도가 될 수 없고, 척도가 아닌 것은 교환 매개로 쓰일 수 없다. 교환 매개가 아닌 것은 화폐가 아니다." 이렇게 이어지게 됩니다.
유시민 작가의 말을 살펴보면 상품의 가치, 그리고 화폐의 가치가 교환 개념과 매우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환이 무엇이고 가치와는 무슨 관계여서 화폐가 교환의 매개가 되는가? 이것을 다뤄봐야 합니다.
그래서 1가치 알갱이가 교환에 반드시 필요한지, 아니면 단지 상품들 사이에 교환 비례 관계가 설정될 필요가 있을 뿐인지. 그래서 상품들 사이의 교환 비례 관계는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정리하면 최종적으로 유시민 작가의 JTBC 토론회 주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 "교환" 개념은 제 논문 주제군요.
그럼 여러분 "3부 화폐, 교환의 매개" 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