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함께 생일이 온다

in #kr-pen7 years ago (edited)

1 꽃과 함께 생일이 온다

한 전시공간에 다녀왔다. 전시는 그냥 빙 둘러보다시피 했고 그보다 긴 시간 방명록을 펼쳐보았다. 방명록에는 많은 이름과 함께 짧은 글이 쓰여 있기도 했다. 그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한 문장이 있었는데 글씨체로 봐선 어린아이가 쓴 것 같았다.

꽃과 함께 생일이 온다

정확히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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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써 놓은 대로 가만히 읽어 보았다. 꽃 과 함 께, 생일이 온다. 생일이 꽃과 함께 오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인지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꽃과 함께, 오늘이 당신의 생일입니다, 하며 생일이 온다면 언제고 기쁜 마음으로 한 살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꽃과 함께 생일이 온다. 이 한 문장에 마음이 끌려 내가 한 일은, 고작 스마트폰으로 포털 사이트에 이 문장을 검색해 본 거였다. 너무 좋은 문장인데? 아이가 뭘 보고 베껴 쓴 걸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꽃과 함께 생일이 온다, 같은 문장은 검색되지 않았다.
그 문장을 쓴 아이에게 어느 날, 정말 꽃과 함께 생일이 왔던 것이다. 어쩌면 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걸지도 몰랐다. 자신의 생일은 꽃과 함께 올 것이라고.
마음이 어찌나 말랑해져 있었는지, 몇 번이나 그 문장을 곱씹었다. 생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2 생일 전날의 호밀밭의 파수꾼

고등학생 시절 나는 한동안 <호밀밭의 파수꾼>을 끼고 살았다. 왜 이 소설을 좋아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가방 속에 자주 넣고 다니며 네 귀퉁이가 닳았다는 것, 오랜 시간 갖고 있던 탓에 색이 바랬다는 것만이 확실한 기억이다.
얼마 전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내가 왜 그렇게 이 소설에 빠져들었을지 더듬어보았다. 짐작건대 그 시절 나는, 자신과 세상을 조롱하는 주인공 홀든의 투덜거리는 모습이 나와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내게 해방구 같은 소설이었다. 읽을 때면 마음이 후련해졌고 내가 뭔가 멋지게 비뚤어지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상하게도 예전에 읽었던 것만큼 반항적이지 않았고 해방감을 주지도 않았다. 대신에 나는 슬퍼졌다. 홀든은 세상에서 도망치고 있던 게 아니라 세상의 온갖 따뜻하고 순수한 것을 움켜 쥐고 있었다. 어렸을 적엔 읽을 수 없던 부분이다.
그 시절 나도 홀든처럼,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을 헤아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훗날 어른이 된 내가 그때를 그리워하게 될 거란 것도 어렴풋하게나마 알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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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있는 <호밀밭의 파수꾼>은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것인데, 표지에 홀든으로 보이는 소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책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책의 윗부분엔 두 글자가 써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 내가 지은 필명이다. 언젠가 글을 쓰게 된다면 쓸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 그 이름을 쓸 필요가 없게 됐다. 그러니 이 글에서도 (오글거리지만) 밝힐 수 있다. '오하'다. 이상처럼 두 글자 이름을 갖고 싶었던 것 같고 (그 시절 내가 그러지를 못했기 때문에) 밝고 산뜻한 느낌의 이름을 동경했던 것 같다. 오하, 부르면 맑은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책의 아랫부분에는 서점에서 찍어 둔 날짜 표시가 푸르스름한 보랏빛으로 희미해져 있었다. 년도는 없었고 몇 월 며칠인지만 찍혀 있었다. 내 생일 딱 하루 전날이었다. 그해 생일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그리 나쁘지 않은 날로 보냈겠구나,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더는 생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됐을 때, 아마 나는 어른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매일 비슷하게 하루가 흐르고 어떤 날도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얼마나 다행이고 소중한 일인지. 부디 살면서 맞이하는 모든 생일을 그 전날과 비슷한 날로, 한 해 전의 그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날로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도 생일이 꽃과 함께 온다면 좋은 일일 거라고, 한 번쯤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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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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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인
호밀밭의 파수꾼을 갖고 있어요...
다른 책들은 시간이 지나도 새책처럼 뽀얀데
유난히 이 책은 너덜너덜...
홀든 콜필드의 심리 상태처럼요^^

홀든과 피비가 너무 좋은데
저는 홀든처럼 할 용기도 없고
피비의 순수함도 그다지 없는 것 같고요..ㅎㅎ
애플포스트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 책을 펼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바보들아 잘들 자거라!!

저도 홀든 피비를 정말 많이 좋아했었어요. 언제부터인가 잊기 시작했지만요. 그래도 한 번 좋아했던 것들은 다시 마주할 때도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옛날이 생각나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호밀밭의 파수꾼을 좋아하셨다니 반가워요. 한 번쯤, 강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같은 생각도 해 보신 적 있겠죠. ㅎ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꽃과 생일이 정말로 찰싹 붙어있고 싶었나봅니다. 방명록 사진의 "함께*가 줄바꿈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그렇게 읽어보곤 합니다. (시의 관점일까요?)

모든 날이 꽃과 함께 하면 어떨까 하고 바라봅니다. 꽃이 항상 활짝 피어만 있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눈 앞에 당장 꽃이 없더라도 잔향이 그득한 나날들 되기를 빌어봅니다.

아이가 쓴 한 문장을 인용해 놓았더니 시 같은 댓글이 달렸네요.
댓글을 읽고 제 관념 속에서 꽃이란 항상 피어있던 거였단 걸 알게 됐어요. 꽃이 항상 피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니 모든 순간을 꽃과 함께할 수 있단 생각도 드네요. 앞에 당장 꽃이 없더라도 어딘가에 존재할 꽃을 상상할 수 있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제목이 정말 멋져서 감탄하며 글을 눌렀는데 아이가 썼다니 놀랐어요! 정말로 단순히 사실 그대로를 적은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참 예쁜 문장이에요. 오하, 라는 필명도 정말 예뻐요! 저는 작명(주로 소설 등장인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고심해서 잘 지으신 느낌이 들었어요ㅎㅎㅎ 필명으로도 좋고 여주인공 이름으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두기엔 너무 아까운걸요!

정말 예쁜 문장이죠?ㅎ
요즘 여러 인물을 떠올려보고 있는데, 울림이 좋으면서도 지나치게 튀거나 지나치게 투박하거나 세련되지 않은 이름을 짓는 게 어렵더라고요.
언젠가 애플포스트라는 이름을 벗어나(이 이름도 좋지만서도...) 글을 쓰게 된다면 그냥 제 본명으로 쓰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아직은 김칫국 드링킹이지만요ㅎㅎ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꽃과 함께 생일이 오길. 좋은 글귀 감사합니다. 자주 뵈요.

안녕하세요! 제 블로그에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악필인 어른이 쓴 글은 아닐까요? 참고로 저희신랑 필체와 비슷하다는ㅋ 무슨 아이의 생각에서 저런 글귀가 나온단 말입니까~? 글 쓴다고 난린데 저런 글 하루에 하나만 썼으면 좋겠어요~ 저는 대학교때 읽었어여. 호밀밭의 파구꾼. 그리고 최근에 이 곳에서 원서로 사서 읽어 보았는데 대학교때 감성이 아니라 그럼지 확연히 다르게 다가오더군요. 왜 매가 그시절 이책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솔직히 질 모르겠어요...

글씨가 너무 커서 아이가 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네요. 아이의 생각은 정말 순수하고 예쁜 것 같아요.
원서 읽으면서 좋은 시간 보내셨군요.
꽃과 함께 글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

오타투성이 글 잘 읽어주셔 감사합니다ㅜ 수정하려는데 대역폭이 어쩌고ㅜㅜ 이제야 사과말씀ㅜㅜㅜ

잘 먹고 잘 지냈지요?

이마
그 아이가 그리 적은 건
생일날엔 꽃다발을 주는 까닭일 거예요

우리집에서도
내 생일엔 꼭 꽃이 함께 오거든요

저 아이의 집도 그럴 거예요,

아이들은 직관적이라
참 어른들을 깜짝 놀래키는 말을
잘 해요

말씀을 듣고 보니, 아이의 집에서 생일에 꽃을 주고 받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런 일들이 좀 생소해서 마냥 시적인 표현으로 읽었거든요.
글 읽어 주시고 따뜻한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잘 먹고 잘 지냈냐는 말에서 왜 위로를 받는 걸까요.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안녕하세요. 애플포스트님! 저는 20대 초반에 호밀밭의 파수꾼 끼고 살았어요! 제 친구 홀든은 소담 버전이에요! :-) 저는 진짜 심하게 홀든과 제 자신을 동일시해서 평상시에 말할 때도 홀든 말투를 흉내내며 말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고 홀든의 목소리가 너무 쓸쓸하게 들리기 시작했던 순간이 있었어요. 생일이 더이상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을 때 즈음이 아닌가 싶어요. 애플포스트님 글을 읽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홀든이 너무 보고싶고 그 목소리가 그리워요.

책을 읽으며 홀든의 외로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그런 면을 동일시하게 됐네요.
라운드라운드님 반갑습니다^^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럴때가 있죠... 예전에 읽었던 책, 봤던 영화, 세월이 지나보면 다른 느낌, 다른 감정을 느낄때... 사람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기도 하고... 저도 오래된 책을 꺼내봐야겠네요 오늘은 비도 온다고하니^^

지금 비가 내리고 있네요. 오랜만에 비 내리는 풍경을 좀 즐기고 싶은데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네요. 저도 오래된 책을 꺼내 봐야 할까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꽃과 함께 생일이 온다
어린아이에 순수함과 소망 이 느껴지네요
그 아이는 커서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지않을까요 ㅎㅎ
소하 필명도 느낌이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

옐로캣님 안녕하세요^^ 아이가 부디 지금의 순수함 같은 걸 잊지 않고 지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