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딸랑 한 장] 와인, 로맨틱, 성공적
와인, 로맨틱, 성공적
카메라 성능이 개판이다. 지금은 망해버린 휴대폰 회사가 아직 살아있을 때, 보급형으로 나온 모델인데 제조된지 48개월이 넘었다. 햇빛 아래 야외에서 찍은 사진은 (그나마) 그런대로 볼만하게 나타내주는 편인데, 해가 진 이후로는 좋지 않은쪽으로 의외의 분위기를 묘사해준다. 모든 맛있는 음식을 저승사자의 제삿밥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는 신묘한 폰이다. 따라서, 여기 사진의 피자는 실물이 훨씬 맛있어 보였음을 미리 안내하는 바이다.
금요일 밤, 아이가 좋아하는 이마트에 갔다. 온갖 시식과 눈요깃거리가 가득한 꿈과 환상의 공간이다. 집사람은 아까 주문한 피자를 찾으러 갔고 나 혼자 주류코너를 지나는데 누군가가 내게 제발 와인을 좀 시음해달라고, 한 잔 마시고 지나가시면 앞날의 무궁한 영광이 있을것이라는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한 잔 드셔보세요. 나는 박애주의자라서 얼른 받아 마셨다. 맛있었다. 8병 정도를 꺼내놓고 아무거나, 다른 것도 맛보라고 권하는데 마음속에서 '안되는데 안되는데 되는데'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한 잔을 받아 먹었다.
실수다, 시식코너의 직원이 '너는 지금부터 내게 미안함을 느끼고 한 병 사 가야한다'는 맹수의 눈빛으로 상냥하게 말을 건다. 나는 꼼짝할 수가 없다. 한 잔만 마셨으면 음 맛있네요 하며 지나갔을 터. 두 잔을 마셨지만 그 때 집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면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옆 코너로 날 끌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없는 미안함에 사로잡혀 꼼짝할 수가 없다.
그 때 직원이 결정타를 날린다. 첫 번째 드신 건 000원 밖에 안 하는데 두 번째 드신 것도 000원 정도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 와인잔을 드립니다. 뭐, 드린다고? 내게 무엇인가를 준다고? 공짜라고? 이성이 마비된 채 어느 순간 양쪽 겨드랑이에 와인을 한 병씩 끼고 두 손으로 와인잔을 움켜쥔 우스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직원은 '이제 손에 든 것 가지고 계산대로 꺼져'하는 눈빛을 보낸다.
집에 왔다. 집사람은 A피자를 주문했고 피자 곽에는 A피자라는 스티커와 가격표가 붙어있다. 왠걸, 개봉하니 가격이 더 저렴한 B피자가 들어있다. 그냥 사진찍어놓고 먹은 뒤 전화해서 차액을 환불받으면 될 것 같은데 집사람은 '이 엄청난 사건이 해결되어야 피자를 먹을 수 있다'는 입장에서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는다. 내가 졌다. 제사를 찾아온 조상님이 흠향하듯이 아이와 나는 냄새만 맡고 꼼짝없이 앉아서 기다린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낭보, "그건 그냥 드시고요, 다음에 매장에서 성함과 전화번호를 말씀해주시면 무료로 A피자를 드리겠습니다"
이럴수가, 이건 공짜다. 맛이 120% 증가했다. 와인을 뜯어 축배를 든다. 거실 바닥에 판 째로 깔아놓고 짝도 맞지 않는 잔을 두 개 꺼낸 탓에 영락없는 자취방 술판이다. 그러나 상표도 뭣도 모르지만 오랜만에 뜯은 스파클링 와인은 이 분위기를 신혼여행 때 갔던 식당으로 변신시켰다. 이름이 Felix였나 뭐였나.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뜯기 위해 잠시 미래소년 코난으로 변신하여 맨 발바닥 사이에 와인을 끼우고 오랑우탄처럼 두 손으로 당기는 모습은 그닥 낭만스럽지 않지만 없던 일로 한다)
아이는 아이대로 고기를 낼름낼름 주워먹는 맛에, 우린 우리대로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낭만적인 맛에 취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술기운에 상기된 얼굴, 다소 기대되는 분위기, 얼른 아이부터 재우고..
이날 낮에 교외를 다녀온 덕분에 기대한 대로 아이는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집사람을 힐끔 본다. 성공했다. 둘 다 재웠다. 흐흐흐흐흐흐흐헤헤헤헤헤. 5분만 누웠다가 얼른 컴퓨터 방에 가서 음악들으며 글 써야지. 눈을 감고 글감을 떠올린다. 부처님 오신날도 있고, 성주 생명사랑 축제도 있고, 글 쓸 내용이 많다. 파파야, 듀스, 태사자 등 듣고 싶은 가수들도 떠오른다.
갑자기 누군가가 내 발바닥을 때린다. 이게 뭐지? 아이가 '아빠 일어나' 하며 발바닥을 살짝살짝 치고 있다. 깜짝 놀라 시계를 본다. 아침 아홉시다. 망했다.
Excellent post!
thank you.
미래소년 대구님의 자세가 너무 구체적으로 상상됩니다 ㅎㅎㅎ
그 자세는 잊어주세요. 중요하지 않다...라고 괄호까지 쳐놨는데ㅎㅎ자주 먹진 않지만 와인 뜯을 때마다 취하는 곤혹스런 자세입니다.
어찌 오픈했든 저 오프너로 말끔히 따는 @daegu님은 신공을 소유하셨습니다.
저는 저 오프너로 말끔히 성공해 본 역사가 손에 꼽을 정도에요...;
눈 감고 너무 명상이 기셨군요 안타깝지만 재밌는 해프닝을 손에 넣으셨네요.
코르크 잘 따려면 손바닥이 고생해야합니다. 성공하고 나면 손바닥에 시뻘건 줄이 몇 개 생겨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코르크 없이 음료수처럼 돌려따는 와인을 좋아합니다ㅎㅎ밤 내내 하는 긴 명상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
맛있어..보이네요...진짜로.
ㅋㅋㅋ좋은 폰으로 찍었으면 더 맛있어 보였을걸요.. 진짜로.
짱짱맨 호출에 출동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트와 고객 간에 발생하는 긴장감이 재밌게 표현된 것 같아요ㅋㅋ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번 느끼지만 매번 곤란한 유혹의 순간이죠. 대부분 한개 먹 고 이동하기에 성공하지만 때로 이렇게 실패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