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의미 - 정의란 무엇인가?

in #kr7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armdown 뉴비 철학자입니다.

어제 이재용 2심 재판 결과를 보며 오늘 포스팅 내용을 골라봤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필귀정'이라고 부르는 일, 즉 정의란 존재하는 걸까요?

이 문제에 대한 역사철학적 성찰입니다.

정의의 문제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길더라도 끝까지 보시기 바랍니다.

결론이 끝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 "역사는 역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만인의 것이며, 역사학 역시도 많은 학자들의 작업이다. (...) 사필귀정이 미래의 문제인 한 역사는 여전히 과거의 것으로 남게 될 뿐이며, 사필귀정이 현재의 실천으로 해석되어야만 우리는 역사의 무게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게와 굴레란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에 현재의 우리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자포자기적 생각을 뜻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만 영웅이 되지 않고서도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현재의 역사란 과거의 정치이며 현재의 정치는 곧 미래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역사를 과거의 소관사항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미래의 소관사항으로 만들자는 말과 같다. 그만큼 현재의 실천이 중요하게 된다. 미래의 역사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의 실천을 통해 만들어 감으로써 도래한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의미 - 실천학적 역사관 서설


 사마천이 쓴 "사기 - 열전"의 첫 편인 ‘백이열전’은 역사 서술의 의미에 관한 생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문헌이다.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짧은 글의 각 부분을 차례로 고찰하는 일은 그 노력에 값한다.
 먼저 사마천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관한 공자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공자에 따르면 백이와 숙제는 인(仁)과 덕(德)을 얻었기 때문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굶어 죽기 전에 불렀다는 시를 보니 어찌 이들에게 원한이 없었겠느냐고 사마천은 조심스레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도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캤노라 
  폭력으로 폭력을 보답하고도 
  그 그릇됨을 모르는 무왕 
  신농(神農)・순・우의 호시절은 
  홀연히 사라졌구나 
  이제 우린 어디로 가야 하나, 
  아아 가자, 죽음의 길로  
  쇠잔한 나의 운명이여!"
 이렇게 백이와 숙제가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에서, 사마천은 '천도(天道)'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다. 천도가 있었다면 이들이 원한을 품는 일은 없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옛 말에 따르면 "천도는 공평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전통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뜻을 풀어 읽자면 '일은 반드시 올바른 쪽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또한 '천도'는 것을 오늘의 용어로 번역하면 '정의'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사마천이 의문을 품는 것은 바로 '정의'의 성립 가능성 여부이다.

 사마천이 첫 번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백이 숙제이다. 이들은 인덕을 얻었지만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또한 공자가 극찬해 마지않았던 안연[회(回)]도 학업에만 충실했으나 결국 요절하고 말았다. 반면 사람의 간을 회쳐먹기까지 한 극악무도한 도척(盜跖)은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사마천의 당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니, 이를 보아 어찌 선행이 보상을 받고 악행이 징벌을 받는다고 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사마천은 "천도(天道)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매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듯하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선행이나 악행을 하더라도 당대에 상벌을 받지 못하는 세상일진대 과연 천도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도리와 정의는 무정한 현실 앞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모순의 세상에서 역사가가 할 일은 무엇인가? 사마천은 깊은 회의에 빠진다. 이러한 회의 자체야 말로 사마천의 역사 철학의 가장 훌륭한 부분이라 하겠다.

 사마천은 이 회의의 극한에서 공자를 재발견한다. 공자는 "춘추(春秋)"라는 역사서를 저술함으로써 군자의 덕을 기려 이름을 후세에 빛나게 하는 일을 했다. 바로 역사가는 이러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결론은 이렇다. "암굴(暗窟)에 숨어 사는 덕이 높은 선비가 그 진퇴에 시운이 맞았다 하더라도, 그 이름이 묻혀 칭송되지 못하는 수가 많은 것은 슬픈 일이다. 촌리(村里)에 살면서 행실을 닦고 이름을 떨치고자 하더라도, 공자와 같은 성현의 덕으로 칭송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겠는가."

 사마천의 사관은 결국 역사를 통해 현세의 원한을 후세에라도 벌충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압축된다. 말하자면 선행이 현세의 보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역사 서술을 통해 그 이름이 빛날 수 있고, 악행이 현세의 징벌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 이름에 치욕이 따라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마천의 사필귀정은 성취된다! 역사 서술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역사에 남게 될 이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역사의 심판을 무섭게 여기도록 만든다. 죽은 후에라도 명예를 남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참 의미라고 사마천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냉철한 정신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문제를 제기한다. 사마천의 생각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직 미흡한 것이 아닐까. 혹시 그것은 현실 추수주의 또는 순응주의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보상이나 징벌은 사후(死後, 事後)에나 있게 될 터이니. 정작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지금 당장의 보상과 징벌이 아닐까. 역사는 현실의 행동을 가로막고 현재의 실천을 끝없이 유예시키는 멋진 도피처에 불과한가. 역사 서술은 이 의문에 새로운 답을 마련해줘야 할 것이다.

 사마천의 사관을 보수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름과 명예를 중시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는 현실 상황에 굴하지 말고 뜻하는 바를 꿋꿋하게 밀어붙이는 용기를 요청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개인의 태도와 결단을 강조하는 면이 강하다. 물론 개인윤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역사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더 넓은 관점에서, 즉 사회철학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 서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 필요해진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인 물음을 다시 던져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물음에 대해서는 답변을 유보하고, 단지 사마천의 역사관이 갖는 특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만족하기로 하자.

 사마천은 과거의 잘잘못을 심판하는 위치에서 평가를 내림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기준을 제시하려 했다. 과거의 행동이 현재에 평가를 받듯이 현재의 행동은 미래에 합당한 평가를 받게 되리라. 사마천이 생각한 사필귀정(事必歸正)은 역사가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사필귀정(史筆歸正) 즉 '역사가의 붓을 통해 결국 올바른 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사마천이 생각하는 역사가는 심판관의 자격을 갖고 있다. 일이 벌어진 후에, 사건이 끝난 후에 잘잘못을 따지는 사람. 하지만 이렇게 되면 역사가는 역사의 흐름 바깥에 있는 존재로 설정되기 십상이다. 말하자면 사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 종료 후에 사건에 대해 다시 평가하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거리단절이 개입한다. 주목해야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역사가는 자신이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를 내린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도 있다. 즉 자신의 시대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엇이 중요한지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에 의거해 자신이 다룰 사건을 선별한다. 이런 식으로 역사가는 현재의 사건을 평가하는 안목을 과거에 투영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카(Edward H. Carr)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아주 유명한 대목이니, 알고 계신 분은 인용문을 건너 뛰어도 됩니다.)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나 아주 늙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인간은 환경에 전적으로 휘말리거나 환경에 무조건 복종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도 못하며, 환경에 대한 절대적 지배자도 아니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역사가와 테마와의 관계다. 역사가는 사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사실의 전제군주적인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고 주고받는 관계다. 연구 중의 역사가가 잠시 일을 멈추고 자신을 생각하거나 쓰고 있을 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반성해 본다면 알게 되는 일이지만, 역사가는 그의 해석에 따라 사실을 형성하고 그의 사실에 따라 해석을 형성하는 연속되는 과정에 매달려 있다. 한쪽을 다른 한쪽의 우위에 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 선별과 잠정적 해석을 갖고서 시작하는데, 이 해석에 비추어서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잠정적 선별을 하는 것이다. 일이 진행됨에 따라 해석과 사실의 선별 및 정리는 모두 쌍방의 상호작용을 통해 미묘한 어쩌면 반쯤은 무의식적인 변화를 겪는다. 또한 역사가는 현재의 한 부분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의 상호성이 포함되어 있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 꼭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으며, 따라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고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나의 최초의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상호작용의 연속되는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역사란 무엇인가"의 제1장 '역사가와 사실')
 카의 이러한 논의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하나의 전제를 깔고 있다. 즉 현재와 과거의 거리, 또는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의 단절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역사가가 다루는 대상은 과거에 속한다는 점 때문에 역사 서술은 모종의 단절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말하자면 일단 현재와 과거를 분리한 후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채 대화의 노력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무시무시한 시간의 율법, 즉 '과거(Es war)는 돌이킬 수 없다'는 법칙이 여기에서도 도도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시간의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관점에 섰을 때 올바른 역사가란 누구인가? 바로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1957)(무척 재미있으니 꼭 보세요!)의 주인공(헨리 폰다)과 같은 사람이다. 흥미진진한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이미 일어난 사건을 여러 정황 증거를 통해 재구성하고 평가한다. 그는 오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의심하고 검토한다. 그는 진실의 현장 밖에서 그렇게 하고, 또 진실의 현장 밖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역사가를 심판관이라고 한 것은 역사가가 진실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발견하는 자일 수밖에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물론 기존의 진실과 다른 진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진실을 만드는 것에 비견할 만한 훌륭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발견이지 발명은 아니다.

 이런 문제는 역사를 과거의 사안으로 만들 때 항상 생겨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역사를 현재의 사안으로 만들어야 이런 오류 또는 오류의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대한 평가나 발언은 그것이 현재의 사안에 직접 적용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글을 인용하거나 언급할 때 그것은 현재의 글에 적용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치를 갖는다. 과거의 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며, 특히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건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오해의 소지를 미리 없애기 위해 말하자면, 과거의 사건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자는 주장은 아니다. 나아가 학문, 특히 인문학이 현재에 대한 발언에 집착하여 그 본연의 작업 방식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주장은 더더욱 아니다. (어제 포스팅 '패스트푸드 철학'에서 강조한 내용입니다.) 인문학은 나름의 탐구 방법을 가지며, 그 고유의 문헌학적 방법은 다른 학문이 범접할 수 없는 장점을 구축한다. 그러나 인문학도 사람이 하는 일이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떨어져서 작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인문학은 사람을 매개로 하여 현재에 관여한다. 즉 인문학자 자신의 실존 곧 인문학이 현재의 사안에 직접 적용되는 매개자이며, 이를 도외시한다면 인문학은 존재 의의를 상실한다. 인문학은 동서고금의 고전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의 몸과 맘, 자신의 삶, 즉 자신의 실존과 자신이 사는 사회를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의미를 다시 규정하고자 한다. 그것은 사마천이 암시한 것처럼 '일은 반드시 올바른 쪽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일은 반드시 올바른 쪽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나는 '필(必)'을강하게, 실천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그것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당연한 사태가 아니라 물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것과 같은 인위적인 사태이다. 그것은 의도를 담은 의식적 실천이다(나는 다른 곳에서 무위(無爲) 사상의 허구성에 대해 비판해보려 한다). 역사는 필연적인 법칙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당위적인 방향으로 흐르지도 않는다. 정의(正義)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만들어내야만 한다. 나는 이성복의 시에서 그 강렬한 표현을 본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장 더러운 진창과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정결한 나무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들이 모두 다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께 있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그것들 사이에 찾아야 할 길이 있고 시간이 있다"('산' 전문, 시집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수록)
이 구절에서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 가슴을 찌른다. 그것은 일부러 만들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만들어야 하는 길, 그것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 이것이 역사의 시간이리라.

 내 비평의 대상은 사실 역사가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무감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고고한 인문학자들이 문제이다. 인문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문학자는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자신이 하는 작업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문학은 어떤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가? 인문학의 위기가 거론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적절한 답을 인문학자 스스로가 마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정당성의 상실이야말로 위기의 본질이자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이다. 세상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을진대, 그 어느 인문학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지 못할 것인가? 실존적 삶과 사회적 삶의 일치, 그것이야말로 인문학자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이 아니던가.

 역사는 역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만인의 것이며, 역사학 역시도 많은 학자들의 작업이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역사학 역시도 하나의 재료이다. 그러나 그것은 독특한 재료로서, 사람은 그 재료의 산물이자 그 재료를 다루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필귀정이 미래의 문제인 한 역사는 여전히 과거의 것으로 남게 될 뿐이며, 사필귀정이 현재의 실천으로 해석되어야만 우리는 역사의 무게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게와 굴레란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에 현재의 우리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자포자기적 생각을 뜻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만 영웅이 되지 않고서도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현재의 역사란 과거의 정치이며 현재의 정치는 곧 미래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역사를 과거의 소관사항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미래의 소관사항으로 만들자는 말과 같다. 그만큼 현재의 실천이 중요하게 된다. 미래의 역사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의 실천을 통해 만들어 감으로써 도래한다. 이 사실은 거듭 강조되어야 하며, 실천학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실천학은 인식 또는 발견의 문제보다 실천 또는 창조의 문제를 앞에 놓는다. 실천 후에 존재가 있게 되고 그것이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이치.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것을 만들 것인가에 있게 되고, 거기에 '사필귀정'의 '정(正)'이 관련을 맺게 된다. 여기서 '정'이란 '옳음'이요 '정의'이며 이와 관련한 가치판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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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의 실천적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정' 즉 옳음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 많은 생각으로 이어지네요. 실천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하지 않고 미래를 기다리기만 하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기도 합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것 역시 인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마련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에도 절실히 공감하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논평도요 ^^

"현재의 실천이 중요하게 된다. 미래의 역사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의 실천을 통해 만들어 감으로써 도래한다"

맞는 말 같습니다. 현재의 토대가 결국 다가올 미래의 바탕이 되는 것이겠죠. 그래서인지 중국의 역사서에선 감(鑑)이란 글자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서술하거나 그 사건이 벌어질 당시엔 현재였지만 이제는 과거가 된 그 역사를 돌아보고, 그걸 읽는 현 시간엔 미래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라는 의미로 넣은 글자라고 볼 수 있죠.

'거울' - 좋은 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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