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의 아침묵상 / 2017. 11. 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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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의 아침묵상 / 2017. 11. 11 (토)

■ 에베소서 5:1-7

[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

사랑받는 자녀는 기꺼이 아버지를 존경하고 본받습니다. 조건없는 사랑으로 살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자녀된 우리가 본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1). 아버지를 본받는 다는 것은 그 사랑을 보고 듣고 체험하며 깨닫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고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실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본받는 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길을 따르며 그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2).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몸된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그 분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기만하고 거역하며 배반하는 것은 패륜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 속에서 구원함을 입었고 법적인 양자로 인정받아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사도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증거하였습니다(롬8:12-15). 사도바울의 이와같은 증거를 토대로 본다면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란 육신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의 본질적인 모습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그렇게 살도록 성령을 통해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실천에 대한 기준을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서 결정합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내가 마음에 든 사람에게만 사랑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육체적인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알고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받은 우리가 행해야 할 사랑의 기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6:35). 이는 사랑의 기준을 제시해준 것과 동시에 세상에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며, 사랑의 실천이 우리의 주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모든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에 따른 기준이어야 한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사도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이며, 삶의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향기로운 제물'이 되시고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2). 향기롭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실만한 제사를 의미합니다.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신 후에, 노아가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창8:20-21). 이와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향기로운 제물이 곧 '여호와를 위한 정결한 제사'이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러한 향기로운 제물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시되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셨고, 자신을 못박은 자들까지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역에는 어떠한 사심도 없이 오직 하나님을 위한 정결한 제사였습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 이와같이 사심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며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됩니다. 제물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향기로운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자기 속의 분노와 미움과 욕심 등 모든 것들을 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원수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그렇게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패역하고 망령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도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죽어도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조건이 붙으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자발적인 제물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설득 되는 것같지만 실제로 사람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행하고, 설득 된다하여도 설득의 의로움이 완전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내 속에 있는 생각들을 쳐서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제물을 받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드리는 삶이어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내가 먼저 용서와 배려의 마음을 주는 것이며,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은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버리는 것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사도바울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고 말합니다(3). 음행과 더러운 것, 탐욕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을 버리는 것은 내가 받아들이 수 없는 사람이 내 속에 들어와 사랑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며,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 속에 품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 속에 품을 수 있는 심령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는 지극히 위선적인 종교생활을 하였음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말합니다(5).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음행이나 우상숭배나 탐욕이나 헛된 말로 속이는 자의 미혹이 자리잡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4-6). 빛이 없는 자리는 당연히 어둠이 짙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음행과 우상숭배와 탐욕과 속이는 말로 미혹 받은 자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6). 아말렉과의 전쟁 후, 승리에 도취된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노략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을 안 사무엘 선지자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삼상15:23).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빌리면 불순종은 곧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는 곧 불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진 자들과 함께 하지 말라고 사도바울은 권면합니다. 그것은 불신자들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위를 따라가지 말라는 강력한 권고인 것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을 따라 행하는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은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심어주었던 '결여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즉, 나에게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탐욕을 불러 일으키고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4). 감사가 내 속에 탐욕을 몰아내고 참 기쁨과 평안으로 서로 사랑 안에서 하나될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 나의 기도
    하나님, 서로 사랑하되, 내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롭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던 주님의 사랑만이 돌아선 형제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음을 기억하며, 먼저 내 속에 더러운 것들을 버리고 죽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