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 강상중

in #kr7 years ago (edited)

작가 강상중은 학부 때부터 따르던 석사 지도교수님께서 추천해주셔서 처음 알게 된 분이다.
'고민하는 힘' 을 이후로 다시 접하게 된 저자의 책이다. 그 이유는 20대 초반의 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미를 어렴풋하게만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 책이 그렇게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완벽하게 와닿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때보다는 나은 내가 되었기에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 볼 의향이 생긴 것 같다.

이번 서평은 지난 서평들과는 조금 다르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필사한 것이 지난 서평들의 특징이었다면, 이번에는 책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나만의 방식에 의해 요약해보았다. 실제로도 책은 그리 두껍지 않고 오목조목, 강상중 작가의 어투로 쉽게 읽히게 적혔지만 다루고 있는 범위는 결코 쉬운 영역의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든 부분들이 많았다.

톨스토이를 다시 읽었을 때도, 빈센트의 영혼의 편지를 다시 읽었을 때도, 강상중의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읽을 때도 책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핵심은 '타인'과 '사랑'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역시 많은 개인화가 이뤄졌고 개개인이 악을 저지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 앞에서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된다. 2014년 꽃피우기도 전에 사그라진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그리고 2016년 말 겨울의 광화문 광장이 그랬듯이 우리는 아직 연대의 힘을 갖고 있다.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은 심오하면서도 단순하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는 결국 이거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등한시하는 것들 중에는 그래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우리 안에 있는 악>

가해자는 근성부터 나쁘다.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귀축으로서 악을 저질렀다면 그는 인간이 아닌데 인간으로 치부하여 재판을 받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가해자는 성인과 동등한 수준의 책임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의 범죄 행위는 자기 의지에 의한 것이다.
그렇기에 악은 자유가 있을 때만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의 인격은 주변 환경이나 인간관계와는 무관한가?

의료사고의 경우 주관적 악의가 없었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가? 개인적 악의는 없었을지라도 조직 안에서 배태된 악은 없는가? 부작위로 인해 조직악이 형성되지는 않았는가?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가진 가해자 또는 종교적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믿는 IS와 같은 집단의 원리주의적 행동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가?

악이란 사기, 강도, 치정, 원한 등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다. 어느 정도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동정의 감정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목적이나 계획이 없는 상식 밖의 악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악이 어떤 형태건 인간이 자유로운한 악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악의 기쁨>

"샤텐프로이데(Schudenfreudo)", "꼴좋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규칙을 어길 때 느끼는 쾌감이나 내가 싫어하는 혹은 꺼려 하는 타인이 우스운 꼴을 당했을 때 느끼는 일종의 '악의 환희'다.
선(善)은 구체적 습관이나 실천적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즉, 죽음의 충동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방법인 '사는 법'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신체성의 결여(공허함)을 느끼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불안함을 느끼며 그 허무를 메우기 위해 악을 저지른다.

악의 축>

나치 독일이 특정한 인종,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을 말살하려 한 이유는 아직까지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다. 교묘하고 정확하고 공리적인 수단 전부가 합리적인 목적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방대한 인원과 에너지를 동원했다. IS 역시 활동 근간에 확고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무하마드의 가르침과 이슬람의 규칙을 그저 폭력을 정당화하는 지표로 삼았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상(理想)이나 규범적 원리, 정의나 인권같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 혹은 아닌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회를 지지하던 객관적 가치 기준이 흔들리고 있다. 무엇이든 괜찮다는 식의 세상은 '의미'가 자기 증식해가는 세상이다. 옳은 것과 틀린 것,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 성聖과 속俗이 같아져 의미라는 것에 의미가 없어져 모든 일에 실감이나 보람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텅 빈 곳에 원리주의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모르거나 제대로 된 기준, 가치가 필요한 상황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른다면 공허함 속을 살아갈 방법이 없는 사람들만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선악을 하나의 문제로 파악하고 탐구하다 보면 최종적인 원인이 인간의 자유라는 사실에 다다르게 된다. 살인자에 대해 생각해보면 사회적 조건에 의해? 사람의 근본이라서? 악의 요인이 작용해서? 자유 의지에 의한 것? 인지하는 몇 가지의 선택지가 떠오른다. 악을 자유와 연관 짓다 보면 왜 악이 생기고, 악행을 저지르는가라는 물음에는 답을 할 수 없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원죄' 즉, 인간에게 내재된 죽음의 충동과 파괴 욕망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죽음의 충동과 타협해야만 한다. 사회 속에서 개인은 예견할 수 없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개인의 자유롭고 순수한 행동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각지 못한 결과를 낳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악행이 돼버리기도 한다. 자아가 극단적으로 비대해진 사람들은 한편으로 몹시 희박해진 사람들이다. 그러한 허무를 채우기 위해 죽음의 충동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악은 평범하면서도 결함이 있는 어떤 것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가끔 드라마나 책 속의 악역이 매력 있게 느껴지는 것은 '야비한 환희', 샤텐프로이데(Schudenfreudo)에서 오는 쾌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평범한 모습을 한 악은 사려의 결여이자 상상력의 결여로 '사상 없음'이라는 병의 뿌리가 악을 만연하게 하는 것이다.

왜 악은 번성하는가>

죽음의 충동과 파괴본능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이것은 어떤 시대와 사회에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되는가? 에리히 프롬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지만 본능은 아닌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죽음의 추구)와 바이오필리아biophilia(삶의 추구)라는 인자를 설명한다. 프로이트가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고 설명하는 죽음의 충동, 생의 충동과 대응되는 개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인 '안전, 정의, 자유'에 따라 이 요인의 배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 역시 이 세 요소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강해지거나 약해진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 모든 것들이 일그러져 악으로 퇴행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이고 싶다는 소망 때문에 타락하고, 고난과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과 사회를 향한 혐오와 적개심이 팽배해질수록 자아와 세계 사이의 골에 악이 깃들게 된다. 이것이 살인과 테러, 폭력, 파괴를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무엇이 악을 키우는가>

산업(자본주의)을 번영하게 하는 것은 개인의 이기적인 이익 추구(사치, 탐욕, 허영, 선망 등)이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진다. 괴테의 파우스트나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결국 인간은 최종적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이 깔려있는데 악은 마지막의 해피엔딩을 위한 중간단계라는 사고방식이 18~19세기에 팽배하면서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하나의 원리로 작용했다.

욥기의 물음>

욥기를 시험하는 악마를 부추기는 신, 또는 막을 의지와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고 있던 신이 오히려 악의로 가득 찬 것은 아닐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우리 사회 역시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고 항의해도 악이 만들어낸 고뇌에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욥기에서 욥은 신 앞에 엎드렸지만 이는 자비로움에 탄복한 것이 아니라 '복종'한 것이다. '복종하라, 묻지 마라, 물어도 소용없다.'
여태껏 서술한 내용을 통해 '자신을 세상의 일부로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아와 세계 사이의 골 사이에 악이 깃든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세상이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자신도 사랑할만한 존재인가라는 질문과 답이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내가 세상의 일부이며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다면 그것은 '타인', 즉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책임이란 reponse + ability , 타자에게 응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과 자신 안의 악과 타락을 대면하고서도 세상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절망 속에서도 함께 살아간다는 것>

누구나 크고 작은 공허함을 품고 살아간다. 누구나 어두운 파괴 충동이 있으며 사람을 상처 주거나 멸시하는 데서 오는 어두운 기쁨을 알고 있다. 인간은 그저 이런 세간(世間)의 희로애락 가운데 이어지는 나날, 희비극의 연속에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사회에 절망하면서도 공생의 도덕을 실천하는 것 외에는 악의 시대를 건널 방법이 없다.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뛰어넘는 존재와 내가 이어져있음을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뜻으로 연대되는 감정을 더 지속시켜 결국에는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우리는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이어져 있다는 실감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