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3개국 (프랑스, 스위스, 이태리)을 다녀오다!!! – 6편
2018년1월 28일 ~ 2월5일
6일차
5시에 기상했다. 서둘러 식사를 하고 6시40분 바티칸으로 출발했다. 어제처럼 아침에도 비가 내렸다. 차가 로마 시내로 들어서자 오래된 건물들이 속속 눈에 들어 왔고 고목들과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원들이 보였다. 거리는 그다지 정돈 되지는 않았고 오래된 자연스러움이 눈에 띄었다.
바티칸에 도착하자 먼저 온 일행들로 긴 줄이 형성 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혼자 그 줄을 따라서 끝까지 돌아보고 나서 40분에서 1시간 정도 추가 시간이 소요 되겠다 라고 했다. 하지만 성수기 때에는 1시간~ 2시간도 더 걸리므로 오늘 추가 시간은 아주 양호 하다고 했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에 가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근처 상가로 가서 500cc 생수 한 병을 샀다. 0.5유로였다. 기다리는 동안 비는 왔다 개었다를 반복했고 가이드는 바티칸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윽고 바티칸 안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 중 미성년인 학생 4명은 할인을 받기 위해 신분증을 꺼내서 제일 앞에 섰고, 바티칸에서 나눠주는 전용 수신기를 받아 들고 가이드의 뒤를 따랐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과 계속해서 입장되는 사람들로 출입구는 금새 북새통이 되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우리가 제일 먼저 간 곳은 뒤쪽 잔디밭이었다. 잔디 밭에는 천장화인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설명을 돕기 위해 두 그림이 인쇄된 안내판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 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도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와 라이벌인 라파엘로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이 두 작품은 1473~1481년에 세운 바티간 내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로 미켈란젤로의 역작이다. 먼저 천지창조는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을 받아서 그린 것으로 당시 미켈란젤로와 라이벌이었던 최고의 건축가 브라만테는 프레스코는 전혀 그려본 적이 없는 미켈란젤로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고 교황 율리우스에게 추천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이 세계 최고의 불후명작 “천지창조”가 되어 버렸다.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일화를 주제로 한 것으로 천장화를 처음 보면 거대한 작품규모와 신의 경지에 이르는 그의 초인간적 능력에 압도 당한다. 미켈란젤로는 교황과의 마찰을 겪으며 결국 4년만에 자기의 고집대로 대작을 완성하였다. 천장화를 완성시킨 후 피렌체로 돌아가 20여년 동안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천장화를 그린 후유증 - 목 디스크, 시력저하 – 으로 말년을 힘들게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은 천지창조 완성 22년후 교황의 부름을 받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착수하였으나,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로 건강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을 때였다. 하지만 교황의 요구에는 숙명처럼 답하던 그였다. 이 그림은 카톨릭 교리를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는데, 이 작품에는 390명 이상의 인물이 그려지고 200m2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예수를 중심으로 꼭대기의 천상계, 튜바를 부는 천사, 죽은 자의 부활 승천, 지옥으로 부터의 추락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이곳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나체로 그려져 종교 재판에 회부 될 뻔 했다. 이 두 작품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대표 작품들일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예술의 극치로 평가 받고 있다.
이윽고 우리는 바티칸 박물관 안으로 들어 갔는데 벽과 천장에 그려진 작품들을 보고 그 웅장하고 화려하며 엄청난 규모에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바티칸시국에서 일부를 박물관으로 전용하여 1400실에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조각품, 명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세계 최고, 최대라는 찬사가 반드시 따라 다니는 로마 최고의 보물창고이다.
입구에서의 “라오콘상” 등 조각품들과 유물, 회화작품, 그리고 면직물로 한땀 한땀 공들여 만든 작품들까지 모두들 감탄을 자아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 올 때는 꼭 바티칸 박물관을 방문해야 한다는 말이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닌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바티칸에 전시된 작품들과 건물의 규모에서 그 옛날 교황의 권위가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긴 관람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교황청 근위병이 보였다. 여기 근위병 또한 스위스 출신으로만 이루어 지는데, 1572년 로마는 카를5세의 무자비한 독일 용병들의 침략을 받아 함락 당하여 다른 용병들은 모두 도망 갔으나, 스위스 용병은 끝까지 남아 사투를 벌였고 이에 감복한 교황은 스위스인으로만 근위병이 될 수 있게 제도화 했단다.
산 피에트로 광장에는 관람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몇 겹씩 돌아 길게 서 있었다. 광장에서 보여지는 외관의 웅장함에 또 놀라웠다. 우리 일행들은 성당을 배경으로 처음으로 모두 모여 단체 사진을 촬영했다. 첫날부터 오늘까지 여행일정을 소화하고 나니 이젠 나름 친해져서 어색한 것도 많이 사라지고 서로에게 말도 터고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안녕을 기원하며 밝은 얼굴로 촬영했다.
점심 식사는 바티칸에서 얼마 멀지 않은 중식당에서 했다. 지난번 스위스에서의 중식당 메뉴에 크게 실망한 일행은 지난번과 다르게 먹을 만한 메뉴에 만족하며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점심 식사후의 일정은 벤츠를 타고 로마 시내를 여행하는 것이었다. 도시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좁은 로마 시내 도로를 큰 버스로 가기에는 힘들고, 걸어서 돌아 다니기엔 한정된 시간에 많은 유적지를 볼 수 없어서 여행사에서는 벤츠 투어를 옵션관광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우리가족은 3명이 온 가족과 한 차를 타고 같이 움직였다. 광주에서 온 가족으로 딸이 하나였는데 내 딸과 같은 대학교 3학년이라고 했다.
처음 들린 곳은 판테온 이었다. 이 거대한 돌덩이 앞에서 나는 숨이 멎는 듯했고 경외로움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기원전 27~25년 “마르쿠스 아그리파”에 의해서 7개 행성의 신들을 경배하기 위해서 세워졌는데 화재로 파손되었다가 다시 재건되기도 했다. 2000년을 이어간 로마제국의 현존하는 건축물 중 가장 보존이 잘되어 있는 건축물로 판테온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는 반구는 우주를 상징하며, 특히 지붕 중간에 뚫린 구멍은 태양을 상징한다. 그리고 건물 내부에 기둥 없이 둥근 천장을 이루기 위해서 아치공법이 적용되었는데 두터운 벽체 안에는 7개의 부수공간을 확보 하고 있다. 천장에 뚫린 구멍 사이로 빛은 내부를 고르게 비춰주고 마치 하늘이 판테온 내부 공간에 스며들어 오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해 성스러운 공간을 연출한다. 이렇게 과학적인 판테온의 탁월한 건축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로마를 대표하는 관광명소, 트래비 분수에 오면 누구나도 트래비 분수의 희고 웅장한 대리석의 아름다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 거대한 작품들은 조각품으로 하나씩 붙여진 것이 아닌 통 대리석을 조각하여 만들었다고 그 당시 그들의 작품에 대한 생각과 규모에 대해 존경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도 트래비 분수 앞에는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것에 비해 규모가 작다는 생각을 했다. ‘트래비 분수에 동전을 한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고, 2번 던지면 연인과 사랑에 빠질 것이며, 마지막으로 3번 던지면 사람마다 말이 다른데, 누구는 연인과 헤어진다고 하고, 누구는 결혼 한다고 하고…’ 하여튼 나는 다시 로마에 다시 올 수 있게 해달라고 동전 한 닢을 던졌다.
그리고 “성 이그나치오 디 로욜라 성당- 예수회의 설립자 로욜라를 기리기 위한 바로크 양식의 성당”과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스페인 광장”을 거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향했다. 이곳은 광장에 오르기 위한 계단이 보이지 않고 경사가 낮아 보이게 착시현상을 이용하여 설계된 곳이라고 가이드는 말해 주었다. 또한 이 광장에는 마르쿠스 황제의 기마상이 있으며, 광장의 바닥은 물이 잘빠지게 배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고 팁으로 말해 주었다.
가이드는 정해진 시간내에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는 욕심으로 우리를 빨리빨리 인도하여 마침내 우리를 “포로 로마노 광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엄청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광장의 모습은 경탄 그 자체였다. 왜 로마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하는지 긴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한 동안 말문이 막혀서 그저 넋을 놓고 바라만 보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댔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공회장으로 신전, 공회당, 기념비 등의 건물들로 구성된 도시 공간으로 공공생활을 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게 되어 나중에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면서 약 1000년동안 로마제국의 심장 역할을 했다. 283년에 화재로 파괴된 후 복구 되긴 했으나 중세 이후로는 이 공회장의 건물들을 헐어 건축 자재로 쓰기도 했다, 그 후 1871년에 발굴작업이 본격화 되었는데, 한때는 막강했던 위엄 있는 건물들이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 옛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로마의 영광을 되세 겨 볼 수 있다.
마치 살이 뜯겨나간 맹수라고나 할까? 그 살이 붙여진다면 용맹스러운 몸짓으로 천하를 포효할 그런 광경이었다. 그 옛날 이 웅장한 건물들을 설계하고 시공할 수 있었던 그들의 건축술에 찬사를 보낸다.
다음으로 간 곳은 거대한 경기장의 유적지로 영화 ”벤허”에서 전차 경기로 유명한 “치르코 마시모” 경기장이었다. 아주 넓다란 벌판으로 기원전 7세기에 완성한 것으로 그 당시 로마 인구가 약 100만명이었는데 25만명을 수용할 만큼 규모가 큰 경기장이었단다. 지금은 당시의 건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한쪽에 일부만 옹색하게 남아있어 그때의 영광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은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으로 6세기 헤라클레스 신전 폐허 위에 세워 졌는데, 1118~1123년에 재 건축하면서 7층 종탑을 추가로 증축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성당 그 자체보다도 성당 내에 있는 “진실의 입”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 펙이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마치 손이 삼켜져 버린 것처럼 연기하여 오드리 햅번이 깜짝 놀라는 명장면 때문에 그 진실의 입에 손을 넣기 위해 사람들은 긴 줄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간 곳은 로마를 하나의 사진으로 대표할 수 있는 유적지. 바로 “콜로세움” 이었다. 로마를 대표하는 유적지가 어디 콜로세움 하나뿐인가? 포로 로마노 부터 바티칸시국, 판테온 신전 등 여러 건축물이 있었으나 그 옛날 로마의 그 찬란했던 영광과 흥망성쇠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콜로세움이 가장 대표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금방이라도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의 거친 숨결과 창들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군중들의 거대한 함성이 들릴 것만 같았다. 변변한 장비와 건축자재도 없이 저토록 웅장한 건축물을 지어야 했던 그들의 운명은 무엇 이었을까? 그리고 저토록 아름답고 과학적인 건축술은 어떻게 전수 되었을까? 그리고…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세우기 시작해 80년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성시킨 4층의 원형 경기장이다, 지름은 긴 쪽이 187m, 짧은 쪽이 155m, 둘레 527m, 높이는 48m의 타원형 건물로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각층마다 양식을 달리 했으며 외벽은 80개의 아치가 둘러 싸고 있다. 신분에 따라 앉는 위치가 달랐고 한번에 5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니 실로 엄청나지 않은가? 여기서는 알다시피 검투사들의 격투시합이 있었고, 맹수와의 목숨을 검 시합, 그리고 모의 해전을 위해 바닥에 물을 채우고 해상 전투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217년 화재, 442년에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그 후에는 성당이나 귀족들의 저택을 짓기 위해 많은 건축 자재들이 뜯겨 나갔다고 한다. 콜로세움은 오랜 기간 내전을 마치고 황제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가 민심을 얻기 위해 네로 황제의 개인 궁전인 황금궁전을 헐고 그 자리에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만들었다. 또한 경기장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자금은 다른 나라에서 약탈한 보물로 충당 했다고 하니 시민들로부터 호응은 좋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후에 그 많던 건축자재들이 다시 약탈되어 뜯겨 나갔다고 하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나는 콜로세움 전망이 가장 좋다는 도로 위 육교에서부터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콜로세움을 한 바퀴 돌았다. 가까이에서 보는 콜로세움은 더욱 더 웅장했고 일정상 안으로 들어 갈 수는 없었으나 내부에 보여주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을 거슬러 갈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옆에 콜로세움 때문에 규모가 작게 보이는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의 라이벌인 막센티우스 황제를 물리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높이 21m, 폭 25.7m의 흰 대리석 건축물로 3개의 아치로 구성된 로마에서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문이다. 훗날 나폴레옹이 모방해서 파리에 개선문을 설치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로마의 관광은 여기까지…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수박 겉 핥기식 이었지만 나는 방금 보아왔던 그 유적지의 강한 인상이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고 마치 기분 좋게 술에 취한 사람처럼 행복했다. 만약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로마를 긴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하나씩 돌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까 트래비 분수에서 동전을 하나를 던졌던 것일까? ㅎㅎ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발싸믹 식초와 올리브 식용유를 판매하는 쇼핑가게에 정차했다. 다소 출출했던 나는 발싸믹 식초와 올리브 식용유에 찍어주던 식빵이 아주 맛있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가이드는 국내와의 가격차이와 효능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했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쇼핑을 했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식당에서 오늘의 메뉴인 닭조림을 먹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 갔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약간은 들 떠 있는 것 같았다. 8시15분에 인솔자의 호출이 있었다. 각 조의 대표자들을 1층 로비에 모이게 했는데 그 이유는 내일 선택관광인 “카프리 섬 투어”가 파도가 커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일 날씨는 맑지만 파도는 다소 세기에 모든 여행사들의 일정이 취소 되어서 환불하거나 아니면 쏘렌토 기차관광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었다. 의논 끝에 7명이 취소했고 나머지는 쏘렌토 기차 관광을 하기로 했다.
벌써 한쪽에서는 와인 파티를 위해 슈퍼에 장보러 가는 사람들, 다른 쪽에서는 주위 맛 집을 찾아 간다는 등 어수선했다. 우리 가족도 슈퍼에 가서 와인과 초콜릿. 과자, 치즈 등을 사왔는데 결국 아내와 딸은 와인파티 하는 쪽으로 합세해 버렸다. 물론 사온 먹거리도 포함해서 … 그렇게 유럽여행의의 마지막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 7편에서 계속 >
져도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 두번던졌었는데.. 1년넘게 소식이없네요..ㅋㅋㅋㅋㅋ
얘기는 얘기일 뿐이죠~ㅎㅎ
@홍보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