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PXsociety의 거꾸로 읽는 세상_#9] 좀 더 나은 노예가 되는 게 꿈인 사회
오늘은 황석영 선생님의 단편집 <돼지꿈>을 중심으로 좀 더 나은 노예가 되는 게 꿈이 되버린 현대 사회의 이면을 들춰보겠습니다. 말투도 한번 바꿔봤어요. 평소에 너무 단정적이고, 선동적이고, 잘난체 하는 투가 많아 읽는 분들이 언짢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거든요. 해보니 저에게도 부드럽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시도는 늘 좋은 겁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뭔가를 배울 수 있으니까요.
황석영 선생님의 <돼지꿈>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125번째 작품입니다. 살아있는 한국 작가로서 민음사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사람은 단 두명 뿐입니다. 바로 이문열과 황석영. 균형을 맞추기 위한 민음사의 배려였나요? 이문열 작가가 대한민국의 우측을 대표하는 소설가라면 황석영 선생님은 골수 좌파입니다. 문학에서 벌어지는 이념의 충돌!
혁명은 실패했고 복지는 물건너갔으며 국민은 패배한 현실에서, 앞으로 길이길이 남아 문명을 떨칠 사람은 황석영이 아니라 이문열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문학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문열 작가가 그 잘나빠진 삼국지 '평역'의 성공에 취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사이 선생님은 끊임없이 신작을 발표하며 여전히, 자신의 문학을 살고 계신 살아있는 작가니까요.
소설가에게 이념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다면 응당 자신의 문학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쓰지않으면 죽은 겁니다. 소설가라는건 그런 직업이에요.
선생님의 소설은 흔히 리얼리즘 문학으로 분류됩니다. 소설이 흐리멍텅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현실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거나 비판하는 고발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라카미 류는 소설 <69>에서 "평화로운 일상에 냉혹한 현실이 숨어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걸 자각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나는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처럼 살고 싶다" 고 했습니다. 물론 그런 삶 또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겠죠. 그러나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다면, 그래서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부와 행복을 분배하는 구조라면, 우리 무력한 개인들은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는 커녕 압력 밥솥의 밥 익는 소리도 못 듣고 살아가게 될 겁니다.
우리가 지금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60, 70년대의 노동자들은 어땠을까요? 어둡고 꽉 막힌 공장에서 하루 18시간씩 미싱기를 돌리다 진폐증에 걸려 죽는 사람들. 안전의식이 전무한 노동 현장에서 날품을 팔다 온 몸이 박살나는 사람들. 헌법이 제정된지 몇 십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지주와 소작농, 종과 머슴의 관계로 착취 당하는 농부들. 소설 <돼지꿈>에는 모두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억눌린 사람들의 무기력한 일상을 볼 것으로 예상했다면, 천만에요! 소설은 작렬하는 태양 밑에 옴짝달싹 못하고 늘러붙은 찌꺼기 같은 인생을 그리지 않습니다. 소설은 칼날같은 바람이 불어오는 황무지위에 날카롭게 솟은 바위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기개를 드러냅니다. 주인공들은 화를내고 싸움을하고 마음껏 욕을하죠. 살기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는 겁니다.
소설은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고 선명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들의 삶 속에 섞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나를 발견하게되죠. 작품이 이토록 생생한 현실감을 갖는 이유는 이 모든 상황과 인물이 선생님의 삶을 빚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 리얼함을 천박하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중요한건 욕이 아니라 우리가 욕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세상에 살고있는 주제에 혼자만 깔끔한척 점잖빼고 살면 어디 세상이 자기 스스로 변해 준답니까?
시대가 구리구리하면 소설은 거친 황무지위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문학을 통해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평생 묶여 자란 개가 사슬을 풀어줘도 사슬 밖 세상을 밟아볼 엄두를 내지 않는 것처럼, 억압에 길들여진 인간은 어느새 그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수록된 소설 <종노>는 이같은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해줍니다. 주인공 동이 노인은 평생을 소작농으로 살아온 말 잘듣는 머슴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노예 근성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갈 정도였죠. 지주는 최근들어 소작농들을 더 값싼 일용직 노동자로 대체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작농들은 이 소문을 듣고도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묵묵히, 흉흉한 소문이 그저 소문이기를 기도할 뿐이었죠. 사단이 난 그 날도 사람들은 지주 가문의 명절 음식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날이었습니다. 그 날 밤 한 젊은이가 지주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합니다.
"야, 이 도둑놈들아. 느이들이 무슨 양반이야.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구 이 망할 놈들아, 느이 맘대루 해 처먹고 쫓아낼라구 그래."
소작농들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십니까?
"아니, 저 놈이 뉘집 새끼야."
"혼찌검이 나야 해."
그러고는 여럿이 달려나가 그 젊은이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동이 노인은 자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합니다. 그리고는 아랫배에서부터 힘을 모아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놈들아! 죽을 때까지 남의 종살이나 해 처먹어라!"
세상에서 가장 효과적인 통치 전략이 뭔지 아십니까? 그건 피지배계급을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를,
좀 더 나은 노예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좀 더 나은 노예는 이제 일반 노예들을 억압하고 감시하기 시작합니다. 노예들의 꿈은 더 이상 해방이 아니죠. 그들의 꿈은 좀 더 나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옳은 말을 하는 젊은이를 흠씬 두들겨 패면 지주에대한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래서 대대적인 소작농 정리 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자기만큼은 쫓겨나지 않고 계속해서 소작을 부쳐먹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동이 노인입니까? 아니면 소작농입니까?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그들의 노예 근성을 경멸하고 혐오합니다. 그러다 문득 그 소작농들의 모습이, 사실은 거울에 비춰진 우리였다는걸 깨닫게 되죠. 리얼리즘 문학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아 정말 많은 생각을 갖게하는 글이에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생각을 할수록 세상은 참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왜 책 표지커버가 '삼포가는길' 스틸이지?? 했는데, 돼지꿈 단편집에 수록되어있군요..
삼포가는 길 말씀을 하시니 눈 앞에 아른거리네요. 아마 하루만에 쓴 소설이라고 하죠. 고등학생 때 등단을 하신걸로 아는데 정말로 천재신것 같습니다.
기왕 노예가 될 거라면
가장 빛나고 무거운 쇠사슬을 갖고 싶습니다. -_- bbbbbb
ㅎㅎㅎ
저... 저는 황금 쇠사슬로
지금 벌어지는 부조리들도 모두 인지는 하고 있지만 "짤리지 않기 위해 " "먹고 살기 위해" 알면서도 다수가 침묵해야 하고 자발적 노예가 되는 현실 ...
그래서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야하는거죠.
꼭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를 짚어주신거 같아요.
이 문제는 인류의 '숙적' 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도 'Baker의 난' 이라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혹시 아실지 모르지만, 이 문제랑 너무 비슷해서 적어요. 여기 오시는 분들이 deadpxsociety 님의 글과 함께 읽을 수 있게요. 17세기 미국에 온 영국인들이 동부쪽 땅을 다 차지하고 나중에 온 유럽인들은 얻을 땅이 없게 되자, 아팔라치안 산맥을 넘어가려 합니다. 그런데 당시 정부에선 그 산맥을 못 넘게 하죠.(산맥 넘어엔 인디언들이 살고 있으니 넘어가면 전쟁이죠) 그러자 상류층 백인과 하류층(당시엔 잡부로 온 백인과 노예로 온 흑인 모두 하류층을 형성)이 팽팽하게 맞서게 되는데요.. 그때 잡부백인중에 베이커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키고, 산맥을 넘죠. 그런데 그 이후에, 정부가 내놓은 안이, 백인에게 인센티브를 줘서 하류층을 형성하고 있는 백인과 흑인을 갈라놓기 시작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더라고요... 그 인센티브를 받고 자신을 흑인과 다른 계급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백인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같은 일을 한게 언제냐는듯...
21세기에도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죠. 박근혜 전대통령이 구치소에서 호사스럽게 지냈다는 얘기도 그렇고,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감옥에서 어떤 일년을 보냈을까요?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는 사람들 때문에 잘못이 있어도 뉘우칠 새가 없는거 같아요. 이렇게 알아서 기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지만,,, 제가 생각하는 결론은 항상,,, 딸린 부양가족이 많아서,,, 라는 결론이 나네요. 내가 돈을 못벌면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밥을 굶게 되니까...
그래서 삼포세대가 이해가 되고, 그들의 결정을 지금은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더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알아서 기는 건 자기가 약자라는걸 본능적으로 인지하는건데, 약자들이 모여 한 목소리를 낸다면 우리에게도 믿는 구석이 생기는거죠.
가장 무서운 노예화 전략은, 스스로 주인이라고 느끼게 하는 전략인 듯 합니다. 리스팀합니다.
무섭죠. 노예가 스스로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니. 리스팀 고맙습니다.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듭니다. 저도 황석영 소설을 꼭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안에 잠재되있는 노예근성을 없애고 싶습니다. 리스티마겠습니다!
황석영 선생님 소설은 후회할게 거의 없습니다. 초기작부터 찬찬히 훑어가시길 추천드립니다.
민음사의 한수네요. 그래서 민음사를 좋아합니다. 저도 지금 황석영 선생님 책 읽고 있는데 ㅎㅎ
깨지지 않은 사슬이 세습되는 사회구조는 자발적 노예를 불러일으키죠. 스스로 자각하고 깨부수지 않는한 현실은 더 옥죄어 올 뿐이고.
새로운 시도 좋아요! 전 둘다 좋은데요 ㅎㅎㅎ
근데 저는 손발이 오그라들어요 ㅋㅋ
오래전 소문에 서울대 졸업생이 쓴 글이라고 해서 알려진 내용이 생각나네요. 이 이야기를 주변에 전했더니 아주 수구적인 지인들도 글 중에 언급된 표현 '고급 노예'를 지향하는 삶의 노선에 수긍하더군요.
찾아보니 그 원본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키트리가 담아 놓은 흔적의 서두가 그 글과 거의 일치하네요.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05774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현상을 봉급 부르주아 계급의 탄생이라고 부르더군요. 나중에 한번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여러 차원이 관계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농담 반 진담으로 스스로 무거운 사슬을 원하는 사람도 있고, 제 지인들 중에도 스스로 인정하는 솔직한 고급 노예도 있지요.
삼포 가는 길, 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초록물고기>를 비롯 지금도 우리 삶에서 변주 되는....하여 우리 시대의 신화 혹은 상징 혹은...
삼포가는 길은 정말 불후의 명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