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스토리: 킹키부츠 (Kinky Boots)

in #kr7 years ago

'킹키(kinky)'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한 분들을 위해 영어사전을 검색해보니 1)(성적으로)특이한, 2)여성용 긴 부츠 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 저 단어를 쓴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다 담고 싶어서가 아닐까.

내겐 한 친구가 있다. (엄밀히 나이로 따지면 아니지만 그냥 친구라고 하기로) 모두가 흔히 생각하는 '남자'의 의미에서 살짝 벗어난, 저 위 1번의 의미에서 '킹키한' 남자다. A군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A군이 다소 여성스러운 것은 전부터 느끼고 있었으나 정말로 내 눈을 의심한 날이 있었으니. 바로 뉴욕에 놀러온 A군과 함께 타임스스퀘어에 갔을 때다. 빨간 계단 위에서 화려한 전광판 아래 웃고 떠들고 있는 우리에게 외국인 남자 둘이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당연히 우리 둘을 찍어주는 줄 알고 나란히 서서 포즈를 잡는데, 갑자기 나보고 저리가란다. 옆으로 비키라고. 너 말고, 쟤만 찍겠다고. 그 때 거부당한 충격이란...

여튼 그렇게 A군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아직도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는 것은, 자기가 가장 믿고 가깝게 느꼈던 사람에게 조심스레 자신의 '킹키함'을 오픈했을 때 그 사람이 놀랐을 뿐 아니라 질타했다는 것.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냈는데 난도질 당한 것. 그것도 가장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로부터.

지금은 마음이 많이 건강하고 튼튼해져서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A군이지만, 그 때 받았던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비난하기 이전에 품어주었으면 어떠했을까.

킹키부츠는 아버지의 신발 공장 사업을 물려받은 찰리 프라이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소개한다. 하향 곡선을 그리는 사업을 살리기 위해 '니치 마켓'을 찾던 중 우연히 드랙퀸(Drag Queen.남장 여자) 롤라를 만나게 된 찰리는 여기서 힌트를 얻는다. 남성용 구두가 아니라 화려한 부츠를 만들기로 하고 남다른 롤라의 감각을 부츠에 불어넣도록 디자이너로 롤라를 고용한다.

킹키부츠에 등장하는 찰리와 롤라는 '아픈' 사람들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싸안고 살아가는 어른들이다. '남성다움'을 요구했던 아버지에게 눌려 지내던 어린 롤라(사이먼)는 하이힐을 신었을 때 상쾌한 공기를, 자유를 맛보았다고 말한다. 한편 찰리는 아버지의 기대에 항상 미치지 못해 주눅들고 좌절한다. 이 상처와 아픔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게되고 '상대방의 신발을 신어보았을 때'에, 상대방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다. 모두가 화려한 부츠를 신고 등장하는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이 이를 잘 말해준다.

뮤지컬

이 뮤지컬을 논하면서 '음악'을 뺄 수 없다. '타임 애프터 타임'의 신디 로퍼가 공연의 음악을 맡아 여성 최초로 토니상 작곡상을 거머쥐었기 때문. 팝발라드, 록발라드, 디스코 음악 등 신디 로퍼만의 감각이 돋보이는 음악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와 잘 맞게끔 재단됐다. 찰리(앤디 켈소)와 롤라(빌리 포터) 두 주인공의 진솔한 고백이 돋보이는 'Not My Father's Son' 'Soul of a Man'이라는 곡을 통한 메세지 전달도 탁월하게 완성해 냈다. 1막과 2막 마지막에 등장하는 노래는 관객 모두가 파티에 참여하게끔 만들어 흥이 절로 나게 한다.

이 음악 위에 연출 겸 안무를 맡은 제리 미첼(헤어스프레이 리걸리 블론드 등 연출)의 손길이 더해져 완성도를 높였다. 롤라와 엔젤스(드랙퀸 댄서들)의 과격하고 화려한 댄스는 눈을 사로잡는다. '과연 이들이 남자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섹시하고 현란하다. 신발 공장의 컨베이어벨트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펼쳐지는 안무 또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장면. 무대 위 에너지가 컨베이어벨트와 함께 달려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안무 역시 토니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롤라'역의 빌리 포터가 없었더라면 누가 이 역할을 살릴 수 있었을지. 지금은 다른 배우가 열연중이지만 빌리 포터야말로 최고의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

뮤지컬에서 빌리 포터가 극을 이끌어간다면 영화에서 롤라 역할을 담당하는 배우는 치웨텔 에지오포. 영화 '노예 12년'으로 각종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르고 수상까지 한 배우다. 뮤지컬처럼 화려한 안무는 없을지라도 진솔한 내면 연기와 의외의 노래 실력으로 관람객을 스크린 속으로 집중시킨다. 에지오포의 연기력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영화다.

2005년 만들어진 이 영화는 실제 일어났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이다. 제인 오스틴의 이야기를 다룬 '비커밍 제인(Becoming Jane 2007)' 등 영화를 연출한 영국인 감독 줄리안 자롤드가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가 뮤지컬의 원작이기에 내용이나 전개는 상당 부분 비슷하다. 다만 뮤지컬에서 슬로 모션으로 다룬 롤라와 돈의 권투 대결 장면은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대신 긴장 넘치는 팔씨름 대결이 펼쳐진다. 롤라가 이기려는 찰나에 돈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이 장면을 통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메세지를 강력하게 전달한다. 영화는 실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노스햄튼 신발 공장에서 촬영해 화제를 낳았다.

이 작품을 두 번 정도 본 것 같은데, 볼 때마다 A군 생각이 많이 났다. 뮤지컬 오리지널 캐스트 주인공이었던 빌리 포터도 마찬가지지만, 킹키한 남자들에게는 유독 억압당하고 상처로 얼룩진 기억을 가슴 깊이 담은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 마음 속 한을 경쾌하게 풀어내는 게 바로 이 뮤지컬이 아니었던가 싶다. 참고로 원작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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