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 시간 탐험대 2ㅡ.by 황혜영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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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시간여행의 임무를 알려주마. 알다시피 너희는 조선 정조 임금의 시대로 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훌륭한 통치로 조선을 다시 일으켰지. 정조 임금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화성을 지었단다. "

"1795년 봄, 정조 임금은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열기 위해 화성으로 떠나게 된다. 너희의 임무는 바로 이 8일간의 화성행차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정조 임금의 화성행차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첫 시간 여행에서 세종대왕을 만나 한글 반포 대작전을 펼쳤던 지오, 찬, 은솔이가 다시 만나

두번째 시간여행 정조 임금의 화성행차를 성공적으로 돕고 오라는 미션을 받게 된다.

시간의 터널을 건너 1795년 봄 조선의 한양으로 고고고~

정조대왕의 꿈이었던 수원화성.

아버지의 죽음과 이것저것 얽혀 있는 한양이 싫었던 정조는 풍수지리사를 불러 최고의 명당을 찾으라고 명한다.

풍수지리사 왈,

"원이 최고의 명당입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리하여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 묘지를 이장하여 융릉이라 칭하고

이장하자 마자 오 ~ 아들이 생기니 그가 바로 순조되시겠다.

그런데 손주의 생일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생일이 또 같다.

신기하다 신기해.

아 이 모든것이 다 수원의 지덕때문이니

1804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70이 되고 아들 순조가 15살 성인이 되는 해에 자신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으로 가서 살려고 계획을 한다.

화성에서 자신의 이상 세계를 펼치면서 전국적으로 잘 살수 있게 시범을 보이고자 했던 정조.

서울에서 수원까지는 행차 거리가 110리 정도 였다고 하니 60킬로 미터쯤.

정조 임금의 시대에는 무려 이틀을 꼬박 걸어야 했고, 수레와 말에 짐을 모두 나누어 싣고, 높으신 분을 가마나 말에 태우고, 풍악을 울리며, 열을 지어 깃발을 들고 행차했을 그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p.46 행렬은 웅장했고, 사람들은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특히나 이번 화성행차는 일찍 세상을 떠난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 정조 임금의 아버지로 왕이 되지 못한 채 스물여덟 살에 뒤주에 갇혀 죽는다-의 묘를 찾아뵙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예순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했지요.

임금님의 행차는 조선의 역사적인 축제였습니다.

p.67 윤 2월 12일

오늘 새벽 제일 먼저 할 일은 정조 임금의 아버지이자, 혜경궁 마마의 남편인 사도세자의 무덤에 가는 것이었지요. 임금은 왕이 된 지 13년 만에 아버지의 무덤을 좋은 곳으로 옮겼습니다. 무덤을 옮긴 곳은 명당이라고 소문이 난 수원의 화산이란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현륭원이라 이름 붙이고, 근처에 성곽을 쌓아 화성을 하나의 이상적인 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꿈을 키웠습니다.

p. 69 "오늘 나는 32년 만에 남편을 만나러 간단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린 열 살 동갑내기였지......"

"열 다섯에 성인식을 치르고, 열여섯에는 첫 아들을 낳았단다. 그런데 우리 아기는 세 살 때 그만 죽고 말았어."

"첫 아기는 잃었지만, 같은 해 둘째 아들을 얻었지. 그 아이가 바로 지금의 임금이시다."

혜경궁 마마는 실타래를 풀어내듯 가만가만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아들은 몸시 총명했단다. 속이 깊은 아이였지. 난 열 살 나이에 그립던 부모님 품을 떠나 삭막한 궁궐에서 살았어. 궁에는 마음 붙일 사람 하나 없었다. 선대왕 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조금도 어여삐 보지 않고 늘 매섭게 다그쳤단다. 내 남편은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점점 눈 밖에 나는 짓만 골라했지. 난 친정 식구들과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에 끼어서 숨조차 쉬지 못했어. 그 피바람 속에서도 아들을 지켜내야 했고...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이었다. 마침내 내 아들이 열한 살이 되었을 때..."

p.72 "나는 남편을, 내 아들은 아버지를 잃었단다. 선대왕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 명령했지. 그분이 뒤조 속에 갇혀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어. 숨이 끊어지는 데 8일이나 걸렸단다."

은솔이가 혜경궁 홍씨를 수행하면서 혜경궁 홍씨가 은솔이를 친애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해주는 부분인데

조선 시대 가장 불우한 여인이 아니었나 싶다 ㅠ

80세까지 살았지만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보다도 15년을 더 살았으니 이건 완전 같은 여자 입장에서 박복하기 그지 없어 보인다 ㅠ

교과서를 통해서, 국사 선생님의 사관대로 문제 유형대로만 만나왔던 정조대왕의 꿈을 찾아

나 역시 시간탐험대원이 된 듯한 착각과 재미를 느꼈다.

1편에서도 느꼈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술술 풀어 쓴 이야기가 정말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살짝 빗겨가는 이야기지만

수원화성은 또 다른 역사의 슬픈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수원 화성의 벽에는 수많은 구멍들이 박혀 있는데 이것은 바로 6.25때의 총알자국이라고 한다.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인데

치열한 교전과 전투로 장안문의 절반이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다고 하니 아 슬프다 ㅠ

수원화성은 조선 후기 건축, 과학기술이 집약된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정조 임금이 실현 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수원화성 하면 *정약용 *거중기 *기기도설 정도가 딱 떠오르는데

​*정약용 -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거중기를 고안하여 백성들이 더욱 편리하게 수원성을 쌓을 수 있게 하였음

*거중기 -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사용하던 재래식 기계로 다산 정약용이 고안하였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수원성 공사에는 왕실에서 직접 제작된 거중기 1대가 사용되었다.

​나는 처음 알았는데 수원화성에도 공사책임자 석비가 있다한다.

각 성문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임감과 성실함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석수 책임자의 이름을 석벽에 새겨놓았다고 하니

요즘에도 건물에 시공자의 이름을 새겨놓는 것이 나는 기념하고 으시대는 건줄 알았는데 책임감과 성실함을 다짐하는 의미가 있음에 새삼스러웠다.

자 그럼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건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수원화성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1804년은 아들 순조가 15세,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70세가 되는 해인데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 와서 살 계획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효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자신은 살아 있으면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고자 했는데 반란이 일어나면 안되니까 성부터 쌓아놨다고 한다.

​-이것은 언젠가 설민석의 강의에서 들은 것 같은 기억이 나서 요약해 보았다.-

정조 임금이 정말 이곳에서 거처 하셨을까?

어릴 때 고모가 이 근처에 사셔서 생각없이 오르락 내리락 했던 기억이 있는데

아,,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정조임금은 사실 비운의 왕일지도 모른다.

11세 나이에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니...

1776년 25세 나이로 왕에 즉위한 정조 임금은 아버지의 원을 풀어줘야 겠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위식에서 한마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아... 울림이 있는 한마디다.

그럼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어떤 분이셨을까.

나는 정조 하면 영화 역린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

정조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할아버지인 영조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영조는 83세를 사신 최장수 왕이시고 재위 기간만 51년 7개월로 엄청 장수 하신 분이다.

영조는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리셨는데 그 중 영빈이씨 사이에서 영조 나이 41세에 아들 '이 선'을 얻는다.

바로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와 결혼하게 되고 앞서 혜경궁 홍씨가 말한 대로 아들 '이 산' 바로 정조를 낳는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부자지간은 음... 비극이었다고 밖에 ㅠㅠ

왜 부자지간에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걸까?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비극적이진 않았다고 한다.

41살에 얻은 아들을 아주 많이 사랑한 영조였지만 너무 엄격했던 영조 때문에 사도세자는 정신병에 걸리게 된다.

시도때도 없이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고 ㅠ 심지어는 아버지인 영조를 죽이겠다는 말까지 하고 다니게 된다.

사도세자가 역적이 되는 순간이 이것이다.

때문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게 된다.

삼복더위에 8일만에 죽는데 이것을 정조가 봤다는 것이다.

아픔을 가슴에 새겼던 이 산이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와 효장세자-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 태어나 10살에 죽은 , 쉽게 말해 정조의 큰아버지-에 입적하여 왕이 된다.

​조선 22대 왕 (1752~1800)

재위기간 :24년 3개월(1776~1800)

​조선 시대 약 12명의 왕이 종기로 고생하거나 사망했는데 정조 역시 한 여름 종기로 인하여 사망하게 된다 ㅠ

자, 그럼 간략히 교과서에서 배웠던 대로 정조의 업적을 요약하면

-탕평책 실시;시파,벽파를 가리지 않고 고루 인재 등용시킴

-규장각 설립;역대 왕들의 글. 글씨등과 어진을 보관하던 왕실 도서관을 설치

-실학 중시;다산 정약용을 비롯 여러 실학자들의 정계 진출을 지원, 중농학파 실학자들 육성

-장용영 설치;왕권강화를 위한 왕실의 친위대 군대 조직을 설치

-서얼의 등용;신분상 정계 진출에 제한이 있었던 서얼에게 기회를 부여

-수원화성의 축조;정약용이 서양의 기구를 본떠 개발한 거중기를 활용

​-신해통공;금난전권을 전면 폐지하여 상업의 자유화, 경제 발전

-초계문신제 실시: 초계를 통해 등용시킨 당하관 등의 관리자를 위한 교육제도 실시

-서적 편찬;<대전통편>, <탁지지>,<규장전운>등 편찬

-공장안 폐지;지방의 관아에 속해있는 공장들의 등록 장부 폐기

아,, 옛날 생각 난다 ㅋㅋ

​모처럼 아이와 함께 읽으며 또 정조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게 된

그냥 아,, 사실 현빈을 알게 된 것 같은 착각을 , ㅠ

무튼 유익한 책이었다.

정리가 잘 된건지 모르겠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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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도 정조덕에 수원의 위상은 거의 준광역시급이죠 : )

어릴 적 그렇게 드나들 던 곳을
설명해주는 이가 없어 가치를 몰랐던 것이 아쉽네요ㅜ
용이 승천하는 형상의 수원이니
그 위상이 여즉 이어지고 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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