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선암사의 식객(食客)

in #kr5 years ago (edited)

부지당(不知堂)의 차 이야기 21.

“혹시 선생님이 직접 만든 차가 있습니까?.”
수강생 한 명이 던진 이같은 질문은 나를 충분히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서울에 가보지도 않고 서울 이야기를 신나게 떠드는 촌놈이 아니냐는 질문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솔사에서 스님이 차를 만들 때 그 작업을 함께 해보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차를 만들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나는 차를 가르치는 선생의 자격을 갖추려면 최소한 차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야 된다는 자각(自覺)이 생겼습니다. 차의 색향미(色香味)를 따지면서 그 근본도 알지 못한 체 떠든다면 그야말로 희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강의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 얼렁뚱땅 약속된 강좌를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서울에 올라갈 일이 생겼고, 거기서 ‘한창기’씨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혹시 전통차를 만드는 곳을 소개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는데, 대뜸 선암사(仙巖寺)로 가보라 했습니다. 그곳에 ‘지허’라는 중이 있는데, 그에게 우리 전통차를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하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나의 차 여정이 새롭게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한 사장과의 인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그를 간단히 소개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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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각황전)

한창기(1936~97.2)씨는 젊은 나이에 영국의 유명 백과사전을 판매하는 회사를 꾸려 막대한 판매 실적을 올렸던 사람입니다. 그가 창안한 판매원 교육프로그램은 전설이 되어 영업시장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브리테니커 한국 지사장이 되었고, 자신이 번 돈으로 ‘뿌리깊은나무’라는 잡지를 창간했던 사람입니다.
그 잡지는 당시 파격적인 편집과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한국 문화계를 흔들었는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그의 잡지를 폐간시켜 버립니다. 본인조차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푸념했지만 짐작컨데 그것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되살리 했던 그의 노력이 불순한 행동으로 보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행동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으로 평가했을 것입니다.

어쨋거난 ‘뿌리깊은 나무’의 폐간은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고, 결국 ‘샘이 깊은 물’이라는 잡지를 다시 창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는 1997년 초 60대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는데, 그와의 인연은 요가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차 때문에 다시 얼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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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로 올라가는 길)

결국 거창의 차 선생을 끝내고 모릿재 생활까지 정리한 다음 선암사(仙巖寺)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 절은 전남 순천에 있는 태고종 본사로써 지금도 50년째 조계종단과 소유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분규(紛糾)는 한국 전쟁(戰爭)이 끝난 후 1957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갑자기 한국의 사찰이 대처승때문에 더러워졌다는 폭탄 발언을 하였고, 그 때 부터 전국의 사찰들은 승려들끼리 난투극을 벌리는 무대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을 목격한 민중들은 절에 등을 돌리고 떠나는 사태를 만들어 내었고, 한국 불교는 그 때부터 급격히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장로였던 이승만이 어째서 그같은 짓을 했던 것일까요? 현대사의 이같은 사건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차 이야기가 옆길로 잠시 새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쨋거나 이렇게 하여 난 선암사를 다시 찾게 되었고, 그 때가 1996년 초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인 1976년 겨울에 이미 이곳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효당 스님의 밀지(密旨)를 가지고 이곳에 와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6의 선암사(仙巖寺)의 모습은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록 쇄락했지만 고풍스런 옛 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매화의 아름다움에 취해 미처 깨닫지 못할런지 모르지만 그 곳에는 민족문화의 정취가 오롯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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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교와 강선대. 승선교 및에서 보면 강선대가 함께 보인다.)

선암사는 입구부터 다른 절과 다름니다. 사천왕 대신 ‘장승’이 서 있고, 길을 따라 가다보면 신선(神仙)이 올라간다는 승선교(乘仙橋), 다음에는 신선이 하강하는 강선대(降仙臺)가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조금 더 절 쪽으로 오르면 삼인당(三印塘)이라는 연못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나무가 세구루가 서있고 연못 가운데 알 모양의 작은 섬이 있습니다.
앞서 있었던 조형물들의 이름과 형태는 불교 사찰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특히 ‘삼인당’은 불교의 교리에서 나온 말 같지만 그곳은 민족 문화의 내용을 함축시킨 선암사 최고의 명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 신화에 나오는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연못가의 세 구루의 큰 나무로 상징하고, 하늘을 뜻하는 연못에 ‘알’모양의 작은 섬을 만들어 한민족의 근원을 상징하고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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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삼인당(三印塘)의 모습.)

이같은 추론은 앞서 선암사를 찾아 오르는 과정에서 만났던 장승과 신선교, 그리고 강선대의 배치 때문입니다. 또한 선암사 경내의 구조를 살펴보면 나의 심증은 더욱 확신을 갖도록 만듭니다.
선암사의 가람 배치는 일반 사찰 구조와 완전히 다릅니다. 삼인당을 지나 산을 오르면서 지어진 건물들은 지형의 높이에 따라 돌로 축조하고 거기에 터를 만들어 건물을 짓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담을 쌓아 법당이 만들어지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만들어진 법당들은 마당에 꽃나무를 심어 가꾸어 지고, 각자의 영역(領域)으로 구분되어 경내는 마치 한옥집으로 만들어진 마을로 들어간 느낌을 갖기 됩니다.

어쨋건 이같은 선암사 경내에 들어가자 당시 주지였던 지허 스님이 날 맞았습니다. 그는 한 사장에게서 연락을 받았다면서 차(茶)를 내어 왔습니다. 그가 대접하는 차 맛을 보면서 효당의 반야로와 다른 독특한 차 맛에 감탄했습니다.
“이 차는 효당 스님의 반야로 차와 맛이 다르군요.”
“반야로는 증차(蒸茶)입니다. 덖음차와 다른 것은 당연하지요. 선암사 차는 전통방식의 덖음차입니다.”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질문하지 않고, 그가 안내해 주는 방에 등짐을 내려놓았습니다. 난 그렇게 20여년 만에 절 생활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절 주변에 널려있는 차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어서 싹이 올라와 전통차를 만드는 법을 배워 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찻잎들이 무수히 올라오고 있었음에도 차를 만들려는 낌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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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덖는 곳으로 알려진 선암사 부엌)

“어째서 차를 시작하지 않지요?”
“중들이 게을러서 차를 잘 만들지 않아요.”
주지의 답변이 황당했습니다. 도데체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차 만드는 일이 자신들의 공부와 무관한 일이라 보고 나서지 않는 것이라 짐작했지만, 이를 위해 남도 끝자락까지 달려온 내 입장에서는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표정을 본 주지가 말했습니다.
“기회가 올 것이니 걱정말고 부처님께 기도나 열심히 하시지요.”
‘뭐야, 이놈이 지금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것인가?’
속으로 투덜대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공짜 밥을 얻어먹는 신세였는지라 화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별 수 없이 다른 중들과 법당에서 염불이나 외워야 하는 처사(處士)신세로 지낼 수밖에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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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에서 처사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모리거사)

그렇게 가을이 되었을 때, 어느날 주지로 부터 한창기 사장이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난 한달음에 서울로 달려갔을 때 그는 병실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보자 대뜸 선암사에서 내 목적을 달성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처 엉덩이에 절만 하고 있습니다.“
나의 대답에 그는 허허롭게 웃었습니다.
“그 기도가 효험이 있을 것 같네요. 거기에 내 숟가락도 하나 얹어 주소.”

암 말기 투병중인 그가 보여준 여유러움은 병실을 나오는 내 발걸음을 더 쓸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선암사로 돌아온 나는 한달도 되지 않아 그의 부고(訃告)를 들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그처럼 빨리 가게될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떠나간 사람이 나의 차 공부를 도와주게 될지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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