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핏의 양복 대여료 이야기와 숨겨진 위험

in #kr6 years ago (edited)



300년 된 보험사 런던 로이즈(Lloyd 's of London)는 매년 330억 파운드 이상의 보험료를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그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의 80% 이상이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을 당시, 로이드는 심사 없이 모든 보험금 청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로이즈는 미국 시장에서 큰 믿음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 대형 보험사는 이전 수십 년 동안 위험으로 인식되지 않던 소위 "숨겨진 위험"으로 휘청거리게 됩니다. 세기 초 샌프란시스코 지진 사건 이후, 로이즈는 미국 기업계에 책임 보험을 팔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석면 제조업체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20세기 초의 런던 로이즈>

그로부터 20년 후 석면 공장에서 일하던 수천 명의 직원들이 치명적 폐 질환인 석면증 진단을 받습니다. 1990년대 이 직원들은 전 고용주에게 보상을 청구했고, 전 고용주는 다시 1960년대에 책임 보험에 가입한 로이즈 등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합니다. 로이즈는 미래 위험에 대한 본질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석면증은 "롱-테일(long-tail)" 위험의 전형적인 사례였습니다. 처음 보험 계약 당시에는 몰랐던 위험이 오랜 기간이 지난 후 발생해 보험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로이즈의 보험 계약 중 상당수가 "오픈 페릴(open peril; 보험회사가 계약서에 제한해 놓은 경우 이외의 모든 재난에도 보험금을 지급하는 보험)"이었습니다. 엄청난 실수였던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소프트웨어 보안 분야에서 네트워크 방화벽은 해커 및 악성 프로그램의 시스템 침입을 막기 위한 수단입니다. 네트워크 방화벽의 작동 방식 중 하나는 블랙리스트 대신 화이트리스트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즉, 화이트리스트에 있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접속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만일 블랙리스트를 활용하게 되면, 블랙리스트에 있는 사람의 접속은 차단할 수 있겠지만, 목록에 없는 접속은 그럴 수 없게 됩니다. 로이즈의 오픈 페릴 보험 계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로이즈의 첫 번째 실수가 이거였습니다. 당시 상황만 판단하고, 보험 계약서 상으로 모든 위험이 커버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두 번째 실수는 지금은 모르지만,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예상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보험 전문 용어로, 이런 롱-테일 위험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미보고 발생 손해(Incurred but not reported; IBNR)이라고 합니다.

워런 버핏의 연례 서한이 훌륭한 이유는 기업과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워런 버핏은 1985년 연례 서한에서 숨겨진 롱-테일 위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남자가 해외여행 중에 누이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화였다. 그 남자가 아버지 장례식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누이에게 장례식을 치르고, 청구서는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했다. 이웃집에 돌아와 보니 수천 달러짜리 청구서가 날아와 있었고, 즉시 지불했다. 다음 달이 되자 15달러짜리 청구서가 또 날아왔고, 이 또한 즉시 지불했다. 그 다음 달 또 비슷한 청구서가 날아왔다. 그 다음 달 똑같은 15달러짜리 청구서가 날아오자,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여동생의 대답은 "깜빡 잊고 말을 못 했는데, 아버지를 빌린 양복을 수의로 입혀서 보내드렸어."

버핏은 이 이야기는 보험업의 맥락에서 들려준 것입니다. 이 "양복 대여료" 이야기는 다른 사업이나, 우리 삶에까지도 확대할 수 있습니다.

마틴 파울러는 프로그래머이자 소프트웨어 아키텍처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파울러의 말 중 다음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일을 오늘 끝낼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내일 일을 내일 끝낼 가능성이 없어진다면, 포기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공학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쉽게 관리할 수 있고 확장 가능하도록 코드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생각과 많은 정신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 제작은 기일이 빠듯하기 때문에, 개발자들은 원칙을 무시하고, 날림으로 코드를 작성해 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작동하게 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레고로 자동차를 만든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때, 레고 블록 두 개를 거기에 맞는 레고로 연결하는 대신, 그냥 접착제로 붙여버렸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레고 자동차는 움직일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다음날 블록을 교체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소프트웨어에서는 이를 '기술적 부채'라고 합니다. 기존의 결함들로 인해 새로운 기능을 개발하는데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복 대여료"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숨겨진 롱-테일 위험이 생기는 첫 번째 이유는 아무 생각 없이 불성실하게 일을 대충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행동 만이 아니라 기업의 행동에도 나타납니다. 기업 경영진이 사소한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문제를 숨기는 게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시신을 "빌린 관"에 넣어 묘지에 안장할 준비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기적 이익에는 눈 감고, 단기적 결과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양복 대여료가 될 수 있는 씨앗을 뿌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양복 대여료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예를 들어, 기업 CEO는 R&D와 마케팅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장부상 수익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두둑한 보너스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비용 삭감으로 인한 장기적인 결과가 나타나 골머리를 썩힐 즈음이 되면, 이미 그 CEO는 자리에 없고, 손해는 고스란히 주주들의 몫이 되고 맙니다.

사업과 투자에서 만이 아니라, 양복 대여료 문제는 다른 대부분에서도 생깁니다. 귀찮다는 이유로 운동을 게을리하거나, 식습관을 아무렇게나 하면, 결국 나중에 양복 대여료 청구서가 날아오기 마련입니다. 오늘 번 돈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은 내일 번 돈으로 살자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몸을 원하지만, 운동은 싫어합니다. 우리는 수익을 원하지만, 위험은 싫어합니다. 우리는 호숫가의 집을 원하지만, 겨울에 배관이 얼어 터지는 것은 싫어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중에 버핏의 양복 대여료 처럼 숨겨진 위험으로 미래에 닥쳐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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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를 상수로 코딩 해버린 프로그램처럼 ... ^^; 잘읽었습니다!

그런 일도 있군요 ㅎㅎ 감사합니다^^

예전에 Y2K 대응으로 프로그램 소스를 확인하다보니, ... 쩝^^;

잘 보고 갑니다. 통찰과 재미가 모두 들어있는 이야기네요.

두서없는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글을 정말 논리정연하게 잘 쓰시는 것 같아 부러워요❗️

과찬이십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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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엔 꼭 운동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갑니다.

다짐, 계속 이어가시길 기원합니다 ^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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