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착취적 인간관계
일, 일과 비슷한 것을 진행하다보면 착취적으로 인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착취한다고 해서, 대놓고 "나는 당신을 착취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언제나 이러한 착취는 은근히, 애매모호하게 일어난다. 부탁이나 권유조의 전달이지만, 정말로 상대방이 나를 착취하려 하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는 사실 태도에서 드러난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의 사정을 헤아릴줄 아는지 모르는지는, 실제로 일을 진행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니 말로써 당신을 착취할 것이다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사실 순진한 편에 속한다.)
어떠한 것을 위해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얻기 위함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아주 뻔한 결론이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의 이익은 단지 금전적인 이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좋은 사람들을 알고 싶을 수도 있고, 명성을 쌓고 싶을 수도 있고, 위안과 위로를 얻을 수도 있다. 이렇게 넓은 의미의 이익은 결국 삶을 변화시키기도, 세계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타주의'라고 일컬어 지는 것 또한, 자신의 희생이나 도움을 통해 세계가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마주함으로써,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그만큼 마음의 성취감 같은 것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역시 이익으로 간주하는 편이다.
교묘하게 직조된 소통 사이에서, 이러한 착취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되면, 나는 두 가지 방향을 선택한다.
우선 나 스스로 착취를 당해도 괜찮은지에 관해 스스로 묻는다. 이러한 착취당함을 통해 나 스스로 발전할 수 있거나, 이러한 기회를 통해 평상시 내가 접할 수 없는 다른 기회와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기꺼이 착취를 당하는 편이다. 호의라고 해두는 편이 좋겠다. 따라서 상대방이 착취의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아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누구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상대방의 스타일을 파악해두곤 한다. 사람들마다 착취의 스타일은 다양해서, 조금 알아두면 어떠한 방식으로 언제쯤 착취의 덫을 놓게 될 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내가 착취를 당했을 때 나에게 별 실익이 없는 경우에는 에둘러서 거절하는 편이다. 완곡하게 거절하더라도 계속해서 착취의 제안이 오게되면, 단호하게 끊어내기도 한다. 물론 거절한다고 해서, 생각보다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은 많지 않다. 틀어진다면, 그만큼 상대방이 상당히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역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으며, 틀어지지 않는다면 그 것만으로도 괜찮다. 그러니 상대방과 틀어지든 틀어지지 않든 두 가지 방향 나에게 모두 좋은 것이다.
내가 한번 일을 맡아서 진행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그 것이 약간의 착취적 관계라고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해서는 성심 성의껏 도와주는 편이다. 나는 일의 진행에 있어서 상대방보다 반발짝 정도 앞서 나가는 것을 선호한다. 문제 상황이 있는 경우, 바로 손에 잡힐 수 있는 대안들과 대안들을 추진했을 때의 고려 사항을 같이 제시하곤 한다.
어떻게 보면 좀 더 호의적으로 과도하게 열심히 진행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호구와 진상은 한 세트라고 하는데, 내가 약간의 호구끼가 있는 것처럼 비추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약간의 호구끼를 드러내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세상 살기 어렵게 만들지 않으며, 적을 만들지 않는 데에 중요하다. 백 명의 친구보다 한 사람의 원수가 좀 더 피곤한 법이기도 할테니까. 다만 착취적 관계를 추구하려는 상대방의 '태도'가 선을 넘으면, 그 때에는 더이상의 양해는 없다. 관계는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상대방도 스스로 나에 대해서 착취적 관계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기 때문에, 나에게 더 이상의 할말을 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나는 언제나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항상 '적절한' 거리를 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적절하지 않은 거리는 상대방에게 과도한 부담과 무리를 요구할 수 있고, 나의 의도가 그렇지않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 관계가 '착취적' 관계라고 느낄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누군가에게 어떠한 제안을 할 때, 이러한 행동이 나의 성장과 당신의 성장에 도움될 것을 이야기하고, 당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에게 서슴없이 이야기하라고 말하는 편이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상대방을 오롯이 대할 때, 나와 상대방은 결국 각자 그리고 우리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당신의 이익을 포기하라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 각자의 이익은 존중받아야하므로.)
사람을 강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고, 서로를 존중하며, 배려하는 '태도'는 의외로 갖추기도, 실천하기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나 또한 삶을 살아오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반성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고 당연히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 그 당연함은 결국 누군가의 '당연하지 않음'으로부터 나온다. 당연하지 않음이, 착취로부터 나올 때, 파국의 씨앗이 잉태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파국의 가능성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착취는 도처에 널려있고, 언제나 당신의 이익을, 삶의 균형을 위협하곤 하니까 말이다.
늘 스마트하고, 강인한 이미지 그리고 빈틈없이 살아왔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적만 가득하더라구요. "약간의 호구끼를 갖고 살되, 상대가 선을 넘으면 싸운다." 이 전략 정말 좋은 전략입니다. 다만 그것도 성격이 받쳐줘야 시전할 수 있다능 ㅎㅎ
사실 저도 상당히 자주 정신 수양(?) 중이기는 합니다. 이게 참 균형을 잡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완전히 철벽을 치자니 역시 말씀주신 것처럼 적을 열심히 만들어내는 것 같고, 그렇다고 호구처럼 살자니, 정말로 주위에서 많이 찾아(?) 오시더라고요.
물론 어지간하면 처음 찾아오셔서 같이 일하시는 분들께 최선을 다해서 잘해드리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돌려 받을 것을 계산하면서 살자니 스스로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그냥 제가 해드린 만큼 돌려받지는 못할 것을 가정하고, 만약 운이 좋게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돌려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편입니다.
물론,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가 되는줄 아시는 분도 계시기는 하지만요. 그러면 진짜로, 제가 외려 둘리가 되기도 합니다. 보통 이 때쯤 되면, 제가 일의 주도권을 가져온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판을 더 흥하게 하기는 어려워도, 판을 깨기는 쉬운 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ㅅ-)
altruism도 남을 위한 것이라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고양감을 주는 것...동감합니다.
동감하는 2인입니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 일종의 승화(sublimation)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익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다양하고, 그래서 사회가 굴러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이 역시 동감합니다.
요즘 고민하는 부분 입니다.
서로가 성장을 돕는 관계가 중요한데.. 어렵더라구요..
네.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상대방에서 어떠한 성장을 원하는지 묻기도 하고, 그렇게 물어봐주는 상대방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의 성장은, "따로 또 같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아무래도 파국을 맞게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이 때에, 저는 능동적인 액션으로서의 파국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물론 언제나 어려운 문제이지요.
고개 끄덕이고 갑니다.
결국 착취나 착취 비스무레한 것은 이러한 적절한 거리를 침탈해 들어오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상대방에 대해 생각하는 거리보다, 상대방에 저에 대해 생각하는 거리가 더 가까울 때 그렇고, 특히나 그 거리에 높낮이를 부여하고자 할 때 그런 것 같습니다.
호구끼도 때에 따라 전략이 될 수 있군요..ㅎㅎ 그런데 넘지 말아야 될 선이 어디인지 항상 헷갈립니다.. 나이가 들 수록 여우가 되어야 하는데 자꾸 곰이 되는 기분입니다.
사람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역치가 다르기에, 선 또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는 이러한 착취의 관계에서, (정확히 이야기하면 일종의 착취 당하는 관계에서) 제가 더이상 얻을 것이 없거나 제 삶의 균형을 깨어놓을 경우가 됩니다. 물론 그 사이에 제가 틈틈히 상대방에게 신호를 주곤 합니다. 그걸 알아차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더군요.
사실 저는 곰을 지지합니다. 곰과 곰의 연대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곰을 부리려는 사람들이 참 많죠. 정작 본인들은 아무것도 없으면서요.
실리가 있다면, 호구짓을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요새 회사 일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ㅋㅋㅋㅋ 미약하나마 보팅과 리스팀해갑니다 :)
단기적으로 보면 호구처럼 일을 하는 것이 사실 손해를 상당히보는 느낌인데, 장기적으로 보면 (특히나 그래서 어떠한 것을 취할 부분이 분명히 보인다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적절한 완급 조절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성인의 경우 그러한 착취를 세련된 혹은 가장된 방식 취하지만 아이들의 경우 노골적인, 직접적인, 투박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중재자 혹은 조정자로 어떻게 개입하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어떻게 관계개선을 시켜야 할지 고민이 많을 때가 많습니다. 이전엔 그러한 것에 분개하며 옳지 못하다 강요하기도 했는데 소용없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어쩌면 제가 저의 삶에서 느끼는 모종의 피해의식이 발현되었던 것이리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글에서 말한 선을 넘지 않는 호구끼에 대해 공감하며 그를 실천함에 아이들이 그 선을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호혜를 익히길 바랄 뿐입니다. 마지막 단락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려와 존중 그리고 함께하는 공동체에 대해 고민이 많은데 결국 이 모두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관계 속에서 어떻게 서로의 이익(견해 혹은 입지라고 봐도 될 거 같습니다.)을 지켜나갈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머리 속이 복잡함에 글을 곡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듭니다.
학창시절에 배워야하는 감각들이 어떤 것이 있을까 곰곰히 고민해보게 됩니다. 밖의 사회에서 착취가 일어나는데, 학교 안에서 착취라는 것은 없다고 한들 실제로는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보니, 오히려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며 투박한 방식의 착취가 아이들에게 일종의 예방주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급진적인 관점이기는 하지만요. 학교 안에서 접하지 않은 방식의 관계에 대해, 사회에서 갑자기 마주치게 되면 오히려 당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착취의 관계를 권장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착취와 착취가 아닌 선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데에 그나마 학교가 제일 낫다는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특히나 선생님들과 같은 개입자가 존재하니까요.) 어쩌면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노고가 소비되는 방식, 아르바이트 같은 것들, 이러한 부분에서 착취를 고착화하고 내재화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정말로 은근하지만 단단히 직조되어 있는 방식으로요.
저는 언제나 다양한 방식의 시선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곡해에 대한 염려는 접어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호구와 쓸만한 녀석의 차이는 착취를 당하더라도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착취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지만 내가 참아주는 것이다' 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 시켜주는 데에서 온다라고 생각하는데요,
같은 착취를 당하더라도 쓸만한 녀석이 돼야지 호구가 되면 절대 절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호구는 단물 쪽쪽 빨리고도 상대방에게 '어쩌라고 이 호구 ㅅㅋ야'라는 말이나 듣고 댕기기 십상이거든요...ㅠㅠ
매우 적절한 관점인 것 같습니다. 항상 그러한 신호를 주고, 상대방이 또한 그러한 신호를 알아차려야하겠지요. 확실한 "인지"가 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쓸만한 녀석"이라는 방향을 지지합니다.
정말로 괜찮은 "쓸만한 녀석"은 착취를 당하면서, 서서히 일의 주도권 - 특히 실무를 가져옵니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기도 하지요. 호구로서 대체불가능한 게 아니라, 일의 진행 관점에서 대체 불가능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전세가 역전 되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마음이 아프군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