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 이야기(5)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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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어서...

마오가 자신의 아들을 사지로 까지 보내면서 얻으려고 했던 것은 '사회주의적 생산력 향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은 마오를 대놓고 조롱했죠. 거기다 이 사회주의적 생산력 증대라는 것의 상당부분은 허상이었죠. 중앙당이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니, 모두가 조금씩 더 보태서 한 사람을 인민영웅으로 포장해버렸던 노동영웅 스타하로프 같은 사례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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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가 바랬던 것은 1947년부터 4년간 현재 가치로 1357억달러, 146조를 서유럽에 부어넣었던 미국의 마셜플랜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146조도 전쟁으로 폐허가 되긴 했지만 당대의 공업선진국들에 뿌렸던 겁니다. 회복하는 속도는 엄청났죠. 하지만 중국은 애초에 그런 산업 기반 같은 것도 없었던 국가고 숙련된 기술자 같은 이들도 얼마 없었던 사회입니다. 그러니 돈을 부어넣었다고 하더라도 마오가 원했던 결과물을 만들어낼 방법은 없었죠.

그런데 당장 자신의 기반이나 다름없는 농민들의 봉기가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상황. 마오의 대약진운동은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긴박함 때문에 벌어졌던 겁니다.

여기다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첫 번째 중국공산당사는 소총들고 봉기한 농민들의 지도자가 산업시설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의 지도자를 이기는 과정이었습니다. 산업이라는 것이 맨땅에다가 뭐 하나 짓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모르는 이들이 권력을 잡았던거에요.

두 번째로, 마오는 붉은 중국의 탄생 직후 중국의 지주계급을 청소합니다. 아예 할당해서 죽여버렸죠.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3부작의 첫 번째 저작인 '해방의 비극(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열린책들)에선 1945년부터 1957년까지 이 시대는 간첩·반혁명분자·지주 등으로 몰려 500만 명이 살해된 '야만의 시대'였다고 고발합니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20/2016082000621.html

마오쩌둥은 아예 천 명당 한 명을 죽이라고 '할당'했고, 지역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할당량을 초과'합니다. 그런데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과학기술자들과 학자들이 지주의 아들이었을까요? 농민의 아들이었을까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오는 1959년부터 대거 중국의 지식인들을 '하방'이라고 깡촌으로 쫓아버립니다. 뭐 이해는 됩니다. '당장 급해 죽겠는데 이걸 하기 위해선 저걸 해야 하고, 저걸 하기 위해선 저어기 저걸 해야 하니 몇 십년 걸립니다' 같은 '한가한 이야기'를 하는 먹물들이 미웠겠죠.

그리고 정황으로 놓고보면 이 즈음의 마오는 스타하로프 같은 인민영웅들이 짝퉁이라는 것도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방식으로 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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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기간동안 중국의 전통적인 괴철로를 이용해 철제 무기를 만들어봤던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토법고로(土法高爐)를 대거 만들게 합니다. 농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목표를 과도하게 내려주다보니 있던 농기구까지 집어넣어서 생산량을 맞춰야 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의 포스코는 한일수교 이후 일본이 배상금이라고 줬던 걸 갖고 만들었던 겁니다. 건물 제대로 못 지었다고 TNT가져다가 터트리면서 말이죠. 농민들도 만들 수 있는 쇠를 왜 그 소중한 돈을 써서 만들었던 걸까요...? 쓸만한 강철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튼, 이렇게 농기구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이라는 걸 벌이죠. 네 가지 해로운 것을 제거하는 운동이라고 "중국의 모든 지방에서 쥐, 참새, 파리, 모기를 소멸시킨다."는 것이 목적인 운동이었는데... 참새는 42~43년 중국 대기근의 원인이 되었던 메뚜기를 참 많이 먹는 새였거든요. 참새가 없어지니 메뚜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죠.

이외에도 '창의적인 마오 주석의 현장지도'들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지요. 그 결과 1958년 ~ 1961년 사이에 중국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이 발생, 4500만에서 60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로 죽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보가 없었던 것도 아니에요. 펑더화이(彭德懷)는 이미 1959년 여름에 마오에게 대약진운동의 결과는 참상이라고 지적하는 편지를 썼고, 1962년 1월 당 지도부가 모인 자리에서 류사오치(劉少奇)가 대약진운동은 '인재'라고 이야기했죠. 이런 흐름 속에 결국 마오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에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는 사설이 실리게 됩니다. 문화대혁명의 시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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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부작용이네요

재미있는 역사 잘봤습니다. 팔로우 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