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일기] 학생들 앞에서 마약기자라고 설명하다

in #kr4 years ago (edited)

#2018년 6월18일 마약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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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를 찾았다.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생들이 이날 중독문제에 대한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다. 강의를 맡고 있는 윤현준 교수가 날 불렀다. 아직 외부 사람을 만나는 건 이르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제한된 참석자들만 온다 하여 참석을 수락했다. 윤 교수는 청와대 앞에서 진행할 ‘마약퇴치의 날’ 항의행사에도 함께 해달라고 내게 부탁했지만 그건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아 거절했다.

조심스럽게 교실로 들어섰다. 눈이 큼지막하게 잘생긴 어떤 중년의 아저씨가 먼저 와서 앉아계셨다. “허 기자님이시지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쑥스럽게 인사하시는 아저씨. ‘나와 함께 대학원생을 만나러온 중독자 아저씨구나.’ 내가 실물로 맞닥뜨려 인사를 나누는, 내 생애 두 번째 접촉하는 마약중독자다. 중독자들이 이렇게 멀쩡하게 생겼구나. 아니다. 허재현 너 스스로 멀쩡하면서 다른 중독자들이 다 뭔가 병들어있거나 손이라도 떨면서 앉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웃기지 않냐? 중독자인 나 스스로 중독자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

십여명 무리의 학생들이 나와 아저씨를 앞에 두고 빙 둘러 강의실에 앉았다. 중독자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고, 우리 사회복지 체계는 어떻게 발전해야 할까. 최대한 이들에게 뭔가 말해주고 싶다. 나는 중독자의 길을 걸은지 얼마 안됐지만, 가장 고통의 시간을 겪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

아저씨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우리 주변에 정말 마약중독자가 많은데 사람들이 그걸 잘 몰라요. 이미 우리 일상 속으로 마약은 파고들고 있어요. 저는 마약 때문에 20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어요. 수없이 재발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어요. 중독자들을 도와달라고요. 정말 너무나 신기하게도 저는 지금 마약 생각이 조금도 안나요.”

재발. 아저씨는 마약을 다시 하게 된 것을 ‘재발’이란 용어로 표현했다. 재발은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의 단어인 듯 하다. 마약을 다시 하는 것을 우리는 ‘재범’이라고 표현하지 않나. 그런데 재범과 재발은 다르다. 그래. 마약은 범죄다. 그런데 마약중독은 동시에 고통스런 질병이잖나. 범죄의 시각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나도 재발이라는 용어를 써야겠다. ‘허재현! 너는 다시 재발하면 안돼!’

이제 내 차례다. 나는 얼마전 언론보도로 알려진 그 ‘한겨레 마약 기자’임을 사람들 앞에서 밝혔다. 당연히 수치스러운 고백이지만, 어쩐지 견딜만 하다. 이 사람들은 나를 이해해보려고 모인 사람들이어서 그런가. 그냥 용기랄 것도 없이 툭 하고 던지듯 말했다. “제가 그 한겨레 마약기자입니다.”

당연히 나는 범죄자이다. 하지만 뭔가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억울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대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 앞에서 내 체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왜 이 사람들은 나같은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일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지만 나는 이미 사람들 앞에 나섰다.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이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사회복지 영역의 어떤 사각지대에 놓여있는지부터 밝히자.

“얼마전 제가 고용노동부에 실업급여 상담을 하러 갔어요. 마약으로 해고된 사람들은 자기 과실이라면서 실업급여 지급도 안된다고 해요. 생계가 위급해진 노동자를 위해 마련된 법인데 어딘가 사각지대가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이 꼭좀 알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어딘가 후련하다. 나를 비난하는 대중들의 목소리만 먼발치서 듣다가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주장도 꺼낸 것이다. 학생들은 모두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었다. 그래. 까짓 거. 신기한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살면 좀 어때. 원숭이가 이렇게 생겼다는 걸 보여주자. 가까이서 보니까, 좀 안됐고 그래? 나는 그러나 동물원 우리를 탈출한 원숭이다. 동물원 안에서만 살지 않을 거다. 내가 왜 숨어서 살아야 해?

강의가 끝나고 아저씨에게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리운전을 하고 있다고 했다.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자, 삶의 의욕도 솟고 마약 생각도 덜 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내게 대리운전 일을 알려줄테니 함께 하자고 했다. 콜! 당연하지. 부모님만 제대로 봉양할 수 있다면 뭐든 닥치는 대로 할 거다. 갑자기 힘이 솟는다.

※당부의 글.
안녕하세요. 허재현 기자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간 마약 문제에서만큼은 단 한번도 마약 사용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연재글은 마약 사용자들이 어떤 일상을 살며, 어떤 고민들에 부닥치는지 우리 사회에 소개하고자 시작한 것입니다. 마약 사용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아닌,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마약 정책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려는 의도입니다. 마약 사용자들과 우리 사회가 함께 건강한 회복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려는 의도입니다. 이점 널리 혜량해주시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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