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ria 의 영화 리뷰 # 고백(Confessions, 2010)

in #kr7 years ago


[생명에 대하여]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것.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연 모두가 이 의견에 동의할까요? 어쩌면 누군가에게 생명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일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기, 그러한 이에게 냉혹한 진실을 알려줌으로써 응징하려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영화 <고백>입니다.

[가장 잔인하게 복수하는 방법]

중학교 담임교사인 유코는 교직을 떠나는 날 학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자신의 딸을 죽인 슈야와 나오키의 만행을 간접적으로 공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신 우유에 HIV 바이러스 혈액을 넣었다고 말하죠.
그녀가 선택한 복수 방법은 그들을 죽이는 것도, 학교에서 쫓아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바이러스, 즉 기피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었죠.
동급생들은 그들이 살인자라는 사실과 동시에 몸에 성병 바이러스가 있다는 것까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슈야와 나오키는 학생들에게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나이는 중학교 2학년, 학창생활을 끝내기까지 아직 한참 많이 남았습니다. 심지어 봄방학이 지나고 2학기가 되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동급생들과 함께 지내야하죠. 설령 전학을 간다 해도 금세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이즈는 발병하기까지 일정 년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동안 병원에 가지도,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사회 속에 던져져서 살아야 하죠. 이렇게 그들의 인생에는 ‘살인자’와 ‘에이즈 환자’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붙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코가 선택한 가장 잔인한 복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죄는 같아도 죄책감은 다르다]

유코의 딸 마나미가 죽었을 때, 슈야는 태연했지만 나오키는 당황하고 불안해했습니다. 2학기가 된 후, 나오키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지만 슈야는 당당하게 등교합니다. 나오키는 자신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을 닦고, 엄마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하지만 슈야는 아무것도 조심하지 않은 채 학교에 다니죠.
이들은 똑같이 살인자가 되었고 HIV 바이러스를 갖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너무도 다릅니다. 나오키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스스로를 영원히 방에 가둬버리는 벌을 내리죠. 그러나 슈야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아 합니다. 이렇게 같은 죄를 지어도 느끼는 죄책감의 무게는 다릅니다.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아무런 죄책감 없는 ‘뻔뻔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야기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죄인을 응징하기 시작하죠.

[따돌림 : 대상만 달라지는 것]

유코의 고백 이후 아이들의 괴롭힘 대상은 가해자 중 하나인 슈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 담임에게 슈야의 왕따 사실을 폭로했다는 누명을 쓴 미즈키 또한 따돌림을 당하게 되죠.
영화의 오프닝에서 그들의 학급 2학년 B반에는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대상이 달라진 지금, 그 아이는 더 이상 따돌림을 당하지 않죠. 유코가 슈야와 나오키의 이야기를 폭로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 아이는 계속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따돌림의 속성입니다. 반드시 누구하나는 ‘희생’해야 한다는 것. 이 대상은 언제 누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항상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따돌림에 가담하거나, 방관하죠. 조금이라도 튀는 행동을 보였다간 금세 아이들의 눈 밖에 날 수 있습니다. 미즈키처럼 말이죠. 미즈키는 새 담임과 함께 나오키의 집을 찾아가면서 아이들과 다른 입장에서 교실을 바라보았고, 벌점 또한 0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행동이 지켜보던 아이들의 타겟이 된 것입니다.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아이들 사이에 따돌림은 새 담임 베르테르의 눈을 피해 일어납니다. 유코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몰래 한 친구를 불러내서 공을 던진다거나, 교실에서 장난을 치는 척 하면서 폭력을 휘둘렀죠. 그러나 그녀가 떠나고 나서 아이들의 수법은 더욱 교묘해졌습니다. 슈야의 교과서에 ‘살인자’라는 말로 도배를 해놓거나 체육 시간에 일부로 그에게 공을 던지는 식이었죠. 가장 경악스러운 것은 나오키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전에 일어난 사건을 모르는 베르테르는 아이들에게 나오키가 학교에 나올 수 있도록 격려의 메시지를 남기자는 제안을 합니다. 아이들은 흔쾌히 승낙합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우정이 가득해 보이는, 그런 친근한 메시지를 보 내죠. 그러나 이 메시지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바로 각 영상에 등장하는 첫 글자가 ‘진짜 메시지’라는 것이죠. 그들이 보낸 진짜 메시지의 내용은 ‘살인자야’ ‘죽어’였습니다. 베르테르는 절대 눈치 챌 수 없었죠. 그의 눈에 아이들은 친구를 생각하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학생들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아이들의 따돌림은 교사의 눈을 피해 교묘하게 이루어집니다. ‘의욕으로 가득 찬 신입 담임’은 아이들에게 속이기 너무나 좋은 대상이죠. 자신들의 모습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행동하는 것이 교사에게는 ‘첫 인상’이 되니까요. 따라서 아이들은 앞에서는 교사의 지시에 최대한 응하고 호응해줌으로써 좋은 인상을 남긴 뒤, 뒤에서 몰래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를 따돌림 시키는 것이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나오키의 엄마는 아들이 슈야의 협박에 속아 어쩔 수 없이 그의 심부름을 한 것뿐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아는 아들은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나오키를 보며 그가 죽은 유코의 딸을 떠올리며 울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한 사람에 대해 자신이 본 것만 믿고 느낀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호출을 받고 불려간 학교폭력 가해자의 부모는 자신의 자녀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 말합니다. 눈앞에 사실을 설명해줘도 믿지 않으려 하고 무언가 오해가 있다고 생각하죠. 나오키의 엄마 역시 유코가 그의 죄를 하나하나 설명해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그저 그 일에 의해 힘들었을 나오키가 ‘불쌍하다’ 말하죠.
이것은 나오키의 엄마가 아들의 죄를 모두 감싸는 게 아닙니다. 그의 죄를 ‘믿지 않는’ 것이죠. 유코가 이야기하는 나오키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아들의 모습과 너무 다르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유코의 이야기를 거짓으로 판정 지어버립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한 사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깨지게 되면 가장 먼저 그것에 대해 부정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모함으로 치부하고 오직 자신이 직접 겪은 것들만 믿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당사자’에게 진실을 들었을 때이죠. 나오키는 엄마에게 자신이 유코의 딸이 살아있는 걸 알았음에도 수영장에 던졌다고 고백합니다. 유코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죠. 이렇게 믿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진실은, 애써 현실을 부정하고 있던 이를 꿈에서 깨어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가정환경]

슈야의 엄마는 전자공학 연구자였습니다. 그녀는 다른 엄마들이 동화책을 읽어줄 때 슈야에게 노튼 법칙을 가르쳐주었고, 다른 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 동안 슈야의 앞에서 인형을 분해해 부품을 설명해주었죠. 슈야는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죠.
슈야를 키우느라 연구 직을 포기한 엄마는 아들이 자신의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굳게 믿으며 그 능력을 키우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슈야를 마구 때리고 원망했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그는 ‘관심’을 갈구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상도 받았죠. 그러나 그것은 음식에 약품을 넣어 가족들을 모두 죽인 ‘루나씨’ 사건에 묻혀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슈야는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오키는 늘 혼자였습니다. 그의 엄마는 다정했지만 그와 ‘친구’가 되어주지는 못했죠. 그러던 와중에 슈야가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늘 외톨이였던 그의 삶에 마침내 친구가 생긴 것이죠. 그저 그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에, 나오키는 그가 시키는 모든 일을 따랐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슈야와 나오키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엄연히 살인을 저질렀고 또 그것에 의해 많은 피해자들이 생겨났으니까요. 그러나 유코의 딸을 죽인 범인은 슈야와 나오키 뿐만이 아닙니다. 아들을 자신의 대체물로만 생각한 슈야의 엄마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아들의 모습만 믿었던 나오키의 엄마 모두 유코의 딸을 죽게 한 공범입니다. 그들의 교육방식이 아들을 살인자로 만들었으니까요.
이렇게 한 사람이 자라는 데 있어서 가정교육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냐”고 비난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어둡고 음습한 지하에서만 괴물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자라는 데 필요한 기본적 욕구와 감정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순간, 그 아이가 바로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관심’의 위험성]

사람들은 모두 자극적인 것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슈야가 발명품으로 상을 탄 날, 매스컴의 관심은 오직 루나씨 사건에만 집중되어 있었죠. 슈야에게 필요한 건 무조건적인 ‘관심’이었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살인’이라는 잔혹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범죄를 저지른 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슈야는 나오키에게 자신이 했다고 떠들고 다녀도 좋다 말합니다. 그러나 나오키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기사에는 유코의 딸의 사인이 단순 사고사라고 실리고 맙니다. 그곳에 슈야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죠. 결국 그는 원하던 관심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언제나 자극적인 일에만 관심을 보이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 주인공이 되면 누군가는 반드시 조연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자극적인 일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사건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연예인이 봉사단체에 자신의 돈을 기부했고, 다른 연예인은 음주운전을 저질렀습니다. 이 두 가지 중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에 더 관심을 기울이죠. 전자의 사건이 훨씬 선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안 좋은 일, 더 잔혹한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사람들의 습성이고, 그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슈야가 사람들의 특성에 맞춰 살인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고 만 것입니다.

[유코의 진정한 복수]

유코의 복수는 단순히 슈야와 나오키의 범행을 폭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떠난 후에도 계속 간접적인 복수를 이어가고 있었죠. 그녀의 복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의욕으로 가득 찬 베르테르 선생에게 유코는 일부로 매일 나오키의 집에 찾아가라 말하죠. 그리고 슈야의 왕따 사실을 반 학생에게 들었다 말하라 합니다. 그녀는 학생에 대한 베르테르 선생의 ‘열정’과 ‘책임감’을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양심’과 ‘정의감’을 이용하여 그들이 슈야를 괴롭히고 따돌림 시키게 만들었죠.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어긋나는 순간, 반박을 하고 저항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어긴 사람을 응징하기도 하죠. 베르테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학생들의 대한 마음이었고, 학생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의감과 양심이었죠.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마음은 동시에 모순되기도 합니다.
베르테르는 슈야의 따돌림을 막지 못했으면서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려했고, 반 학생들은 매번 주기적으로 한 아이를 왕따 시키면서 사람을 죽인 슈야와 나오키를 욕했죠.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딸에 대한 복수를 함과 동시에 이렇게 모순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을 응징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파멸로 이끈 것일까요. 이들의 불행은 어디부터 시작된 걸까요. 한없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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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이 영화를 보고 마지막 반전에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 영화의 소재와 아이디어의 참신함은 정말 사람을 충격으로 몰고 갈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영화의 아이디어는 대단하죠^^ 덧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