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나폴레옹 보우응우엔잡

in #kr2 years ago (edited)

붉은 나폴레옹 보우응우엔잡 - 다윗과 골리앗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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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라 일컬어지는 시기로부터 오늘날까지를 통틀어 가장 걸출한 전쟁의 천재라면 역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들 수 있을 거야. 이후 ‘나폴레옹’의 이름은 여러 곳에서 저마다의 군사 지도자를 높이는 경의와 아부의 표현으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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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공산 진영에서도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이가 두 명 있다. 먼저 등장한 ‘붉은 나폴레옹’은 소련군의 젊은 원수 투하체프스키였어. 탁월한 전술로 백군(白軍)즉 구 러시아 제국 재건을 외치는 세력을 족족 무찌른 명장이었지. 그리고 또 하나의 ‘붉은 나폴레옹’이 지구 반대편에서 등장한다. 베트남의 보응우엔잡(1911~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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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방의 ‘붉은 나폴레옹’은 오히려 원조를 넘어서는 위업을 자랑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라는 배경을 두었지만 보응우엔잡은 무장도 국력도 비교가 안되는 나라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이 붉은 나폴레옹은 우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어. 2차대전 중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일본에게 빼앗겼던 프랑스는 종전 이후 다시 베트남을 지배하려 들었지. 이에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은 반발하게 되고 인도차이나 전쟁의 막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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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 지휘부는 베트남 해방군 지역 한복판에 거점들을 마련해 그 심장부를 찌르는 전략을 세웠어. 그 거점으로 선택된 곳이 베트남 서북부의 디엔비엔푸였어.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공중 지원을 믿었다. 베트남에 비행기 따위가 있을리 없고 화력 역시 따라올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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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람들도 일본군이 쓰던 무기부터 한국 전쟁 때 중국이 노획한 미군 105mm 포까지 무기를 끌어모았지. 자주 독립의 의지에 불타는 베트남 사람들은 이 대포들을 정글 속에서 인력으로 옮겼어. “한 번 힘쓸 때마다 3㎝씩, 하루 평균 800m씩” (중앙일보 2011.3.7.) 악착같이 대포 100여 대를 집결시켰는데 별안간 보응우엔잡이 철수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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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측을 살펴보니 임시 막사 같던 진지가 철옹성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대로 공격하면 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공격을 미루면 목숨 걸고 정글 속을 통해 끌고 온 대포 등을 되돌려 은신처로 가져가야 할 처지였다. 많은 이가 수적으로 우세하니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퇴각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나는 철수를 강행했다.”(위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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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그리고 우선시돼야 할 것은 자기의 약함과 상대의 강함을 절감하는 일이야. 하지만 약자는 용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약함을 감추려 들고 상대의 사악함을 근거로 그 강함을 깎아내리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이기지 못할 싸움에 용기를 내다가 영원히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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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붉은 나폴레옹’은 불가능한 싸움은 안하는 게 맞다고 믿었고 그를 실행에 옮겼어. 이후 베트남 사람들은 다시금 더 많은 대포를 끌어와서 디엔비엔푸 포위전을 개시한다. 프랑스군은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 우월한 화력을 과시하는 베트남 해방군에게 두 손을 들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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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프랑스에 이어 미국이 베트남의 앞길을 가로막아. 미국의 개입으로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베트남 공화국이, 북에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섰지. 1960년 북베트남에 동조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1964년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하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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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67년 ‘붉은 나폴레옹’ 보응우엔잡과 국가주석 호치민은 남베트남에 대한 대공세 계획을 수립한다. 우선 북베트남 정규군들이 도시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기만적 공세를 전개하여 미군의 관심을 돌린다. 다음으로 남베트남민족전선 조직원들이 도시 지역으로 잠입해 결정적인 시기 봉기를 일으켜 행정을 마비시키고 도시를 장악하며, 성공시 북베트남군이 전면 공격하여 베트남을 통일한다는 3단계 작전이었어. (<20세기 결전 30장면>,정토웅 저) D데이는 1968년 음력설 다음 날인 1월 3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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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우리와 비슷하게 민족대이동이 일어나는 베트남 특성을 이용하여 대규모 무기와 병력을 도시로 반입시켰지. 마침내 1월 31일 베트남 전역은 공산군의 ‘구정 대공세’로 화염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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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중부의 오래된 고도(古都) 후에가 베트콩에게 떨어졌고 각지에서 세찬 공격이 벌어졌지만 남베트남 정부와 미군은 효과적으로 맞섰고 기대했던 남베트남 사람들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공세를 주도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6.25 이전 남한의 빨치산들처럼 괴멸 상태에 빠졌어. 붉은 나폴레옹 보응우엔잡의 참담한 실패작으로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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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벌어진 구정 대공세에서 불과 스무 명 남짓한 베트콩 특공대가 미 대사관을 습격,점령한다. 대사관을 탈환하려는 미군과 베트콩의 전투는 기자들의 카메라에 생생히 담겨 전파됐어. 또 사이공 곳곳에서 출몰한 게릴라 진압 과정에서 베트콩 청년을 즉결 처형하는 경찰서장의 모습은 전 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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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북베트남 폭격 이래 미군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쓸어넣었고 수십만 미군이 그 동맹국 군대와 함께 작전 중이었다. 미군 사령관들은 늘 승리를 장담했어.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의 침략 야욕을 꺾었다.”고 자신했고, 1967년 11월 주월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는 “끝이 보이는 단계에 와 있다.”고 호언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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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적들은 기가 꺾이기는커녕,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여 그들의 깃발을 휘날렸고, 붉은 무리로부터 지켜야 하는 ‘자유의 나라’ 베트남 경찰은 민간인으로 보이는 (그는 여러 사람을 살해한 용의자이기도 했지만) 사람을 재판도 없이 죽여 버린다? 미국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됐고 반전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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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사이에 반전(反戰) 시위대가 세 배로 증가했다.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의 얼굴이 전 세계 TV 화면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 허장성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파산자였다.” (<1968>,타리크 알리, 쥬산 왓킨스 저) 그리고 “미국의 지도부들이 전쟁에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한겨레신문 201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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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적으로는 완패했으나 미국 시민들의 전쟁 반대 여론에 불을 지르고, 세계적으로도 미국을 비난의 표적으로 만든 전략적인 승리. 미국에 비하면 형편없는 약소국 북베트남의 지휘관이었던 보응우엔잡의 구정대공세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패전의 악몽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한 매우 효과적인 작전으로 역사에 남는다. 보응우엔잡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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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전략인 동시에 정치전략이었다. 우리도 미군을 섬멸할 수 없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싸울 의지는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구정대공세의 이유다.” (<약함 너머>, 임종득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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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는 싸움을 피하는 것은 약자가 펼치는 생존의 지혜고, 강한 자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 아픈 손가락들을 찾아내는데 능숙해지는 건 생존을 위한 의무다. 골리앗과 싸울 때 다윗은 갑옷 입은 거인보다 훨씬 빠른 기동력과 칼과 창의 사정거리 바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돌팔매를 무기로 삼았다. 그게 골리앗의 약점이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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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나폴레옹 보응우엔잡은 미군의 약점은 ‘여론’이고 그를 통해 거인의 손가락을 비틀 수 있다고 여겼다. 어쩌면 기나긴 월남전의 승패는 세계 최강 미국 대사관의 옥상에서 성조기 대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깃발이 휘날리던 그 짤막한 순간, 하지만 세계인이 지켜본 그 찰나에 결판났는지도 모를 일이야. 붉은 나폴레옹은 끝내 미국이라는 이름의 알프스를 넘었고 “미국에게도 불가능이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창조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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