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있을 것 같은 사람'에 대한 만가

in #kr2 years ago

꼭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위한 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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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참 다양하다. 이목구비에 사지육신은 대충 비슷하지만 그 생김새부터 머리 속 생각이며 감정 표현의 방식까지 하나 하나가 다 특별하게 다르지 않은가. 사람 하나가 우주라는 건 그래서 과장만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거기서 거기이기도 하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실수와 한계가 명확하고 ‘사람 사는 것 다 똑같지’ 하면 대충 수긍하게 되며 ‘그런 사람 꼭 있다’고 하며 누군가 너스레를 떨면 맞아 맞아 키득거리게 마련이다. 그 상황에서 그런 사람 꼭 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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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에 빗대 보자. 매우 ‘특별하게 다른’ 사람들도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장동건은 구두닦이 연기를 하며 얼굴에 숯검정을 묻혀도 얼굴에서 빛이 났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아무리 흙수저 사형수 역을 하려고 해도 강동원은 그냥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등촌현빈의 원형인 현빈이야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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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배우라기보다는 그저 그 배역의 실제 인물인 양, 우리 주변 사람들인 양 녹아드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연기가 아니라 우리들 실제 삶을 구경하는 모습으로 “저런 사람 꼭 있지!” 하면서 가슴을 치게 만드는 이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배우 하나를 잃었다. 이얼(196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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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양반이 아직 환갑도 넘기지 못했던가 싶었던 것이다.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술에 취한 룸살롱 손님들의 강요로 옷을 다 벗고 기타를 두들기는 장면에서 봤던 그 표정부터 몇 년 전 <스토브 리그>에서 나름 능력은 있으나 자기 뜻을 펴지 못해 답답해 하던 감독, 자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해 줬지만 가족 치료비 때문에 그를 배신했지만, 다시 본 모습으로 돌아오는 따뜻하지만 허약한 인간의 얼굴까지, 그는 이미 나에게 20년 전부터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치르고 겨우 살아남아 무표정하게 ‘사는 게 그렇지’ 쳐다보는 인생 고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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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드라마 <라이브>에서였다. 술자리에서 향용 이런 말을 한다. 싸움하면 맞지는 않을 정도로 완력이 있고, 달리기나 턱걸이를 남만큼 했더라면 나는 경찰을 꿈꿨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쁜 놈 잡으러 다녔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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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시사 프로그램 하면서 형사들하고 술 먹을 때 고참 형사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했던 것도 그 영향이리라, “몇날 몇일을 고생하다가 말이지. 딱 쫓던 놈 뒷덜미 잡고 ‘아무개지? 너를 무슨 무슨 혐의로 체포한다.’ 하며 딱 수갑 채울 때의 그 손맛은 말이야.....막 손에서 전기가 오른다니까.” 그러니 국내 최대 지구대 홍익지구대를 모델로 했다는 드라마 <라이브>가 재미있었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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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얼은 여기서 정년 퇴직을 얼마 앞둔 경찰 이삼보 경위 역을 맡는다. 그는 딸도 둘째 딸 뻘의 말괄량이를 파트너로 맞는다. 젊은 선배들이 널려 있는데 큰아버지뻘 파트너를 맞은 여경은 불만도 많고 갈등도 크다. 대놓고 싫은 티를 내고 이삼보 역시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어쩌랴. 세월이 가르고 쌓아놓은 틈이자 벽인 것을. 이제 쉰 넘어드는 중년으로서 나는 여경보다는 이삼보 경위에 훨씬 이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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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자 세력가의 아들의 범죄를 건드린 이삼보 경위는 이 망나니 젊은이가 고용한 촉법소년들에게 보복 폭행을 당한다. 하지만 망덕이 돼 버린 얼굴로 파출소에 오면서도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 창피해서다. 이 늙은 경찰은 양아치들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피해 사실을 치부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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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사실이 밝혀지면서 동료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있냐고 분통을 터뜨리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젊은 놈들한테 짓밟혀 봤어? 늙어서! 힘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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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별 것 아닌 대사에서 약간 울컥했음은 나도 그만큼의 나이가 든 탓일 것이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저런 사람 꼭 있겠지.”였다. 지금은 ‘강력계의 전설’이 된 후배를 부사수로 데리고 다니면서 ‘호랑이로 만들어 놨던’ 베테랑이지만 세월에 깎이고 나이에 파묻혀 이제는 풋내기 양아치들에게 짓밟히는 신세가 된 이의 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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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겐가 말하기도 어렵지만 스스로 감내하기도 어려운 저 응어리가 어디 경찰에만 있을 것인가. 우리 회사에도 있겠고, 우리 아파트에는 부지기수로 있겠지. 그렇게 위험한 사고를 치고 다니는 아이들을 두고 나이 예순의 경찰이 내뱉는 한 마디는 찌르듯 현명하다. “늘 아이들은 잘못이 없어. 어른들이 망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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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사망하는 인명 사고가 나고 겁을 먹은 파트너 여경은 휴가를 내고 고향으로 향한다. 방앗간을 하는 아버지에게 “방앗간 하며 손 다쳤는데 무섭지 않으냐?”고 묻자 아버지로부터 “무섭지. 무섭다고 피해 다니다가 인생 다 간다.”는 명언을 듣고 절치부심 다시 올라가려고 짐을 싸 두는데, 파트너 이삼보 경위가 후배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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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후배가 싸둔 가방을 보고 모든 걸 눈치 채지만 짐짓 충고(?)한다. “나 너 경찰 계속하라고 설득하러 온 거 아냐. 넌 젊고 세상에 경찰일 말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 무서운데 오기로 경찰 일 하는 거 그거 아냐 며칠만 더 생각해.” 누가 그랬나. 중국인들은 쪽수가 불어넣는 사기(士氣)로 싸우고 일본인들은 용기로 떨쳐 일어난다면 한국 사람들은 오기를 부릴 때 가장 용감해진다고. 한 젊은이의 오기를 발동시키는 느물느물한 베테랑의 수법. 저런 사람들도 꼭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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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찾아온 대망의 퇴임식. 그런 자리에서 누구나 그럴싸한 연설을 꿈꾸지만 대개 그 꿈은 사람들을 졸게 만든다. 퇴임식에서 이삼보 경위는 무슨 말을 할까 했는데 <라이브>의 노희경 작가는 역시 이삼보 경위답게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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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말을 잘 못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후배들에게 딱 한 마디만 하고 내려가겠습니다. 경찰의 안전이 곧 국민의 안전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안전..... 안전...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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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경찰들에게 돌 깨나 던졌던 처지로, 그리고 시민의 안전을 경찰이 위협했던 역사를 잘 아는 입장에서 순간적인 거부감이 든 건 사실이었지만 씩 웃으며 이삼보 경위의 말에 수긍하기로 했었다. 대다수의 경찰은 그처럼 살았을 것이고 무사히 정년퇴직 하는 자리에서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후배들의 안전을 기원했을 것이므로. 그러면서 남기는 우정 넘치는 조롱 한 마디. “경찰 일 관둔 거 신나. 안됐다. 너도... 계속 경찰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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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보 경위에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이얼 배우의 평범하되 자연스러운, 특출하지 않되 마음을 울리는 연기, 잘 익은 동치미 같고, 소금 알맞게 뿌린 계란 프라이 같고, 안주 없이 술 많이 먹은 술자리 후 들이키는 컵라면 같은 얼굴과 눈빛과 손짓과 뜀박질 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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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에서는 배우가 아니라 경찰 같았고, <스토브리그>에서는 꼴치팀 의기소침 감독 같았고,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는 손님이 뭐라고 하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벗어던지는 기타 반주자였던 배우가 우리 곁을 떠났다. 아쉽다. 그의 연기를 더 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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