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골리앗의 세계사 4 - 발주나 맹약과 칭기즈칸

in #kr2 years ago

다윗과 골리앗의 세계사 4- 발주나 맹약과 칭기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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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서기 1000년부터 그때까지의 1000년의 세계사 속에서 가장 걸출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칭기즈칸을 꼽았다. “인터넷이 발명되기 700년 전 이미 지구상에 커다란 통신망을 건설했고,또 관세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못지 않은 자유무역세계를 건설했다. 칭기즈칸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이뤘고, ‘팍스 몽골리카’, 즉 몽골 지배하의 평화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데 성공했으니 아주 그른 평가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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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칭기즈칸과 휘하 몽골의 기마 전단의 말발굽 아래 수백 개의 나라와 도시가 잿더미가 됐고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가히 “세계 종말을 향한 신의 채찍”(당시 무슬림의 표현)같은 살벌한 면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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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선연한 명암을 지닌 거인 칭기즈칸. 하지만 그의 삶은 그렇게 순탄한 것이 아니었어. 이웃 부족의 음모에 아버지를 잃고 일가붙이들도 다 떠나 버린 뒤 칭기즈칸, 칸이 되기 전의 이름 테무진은 외로운 늑대 새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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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들이닥친 ‘골리앗’은 하나 둘이 아니었고 그는 다윗보다 훨씬 멸시받고 위태로웠던 어린 용사였지. 온 가가족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근근히 생을 이어갔고, 적의 포로가 돼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고 갓 결혼한 아내를 적에게 빼앗기기도 했으니 오죽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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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테무진은 시련을 이겨내고 상당한 세력을 지닌 지도자로 성장했고 1186년 주변의 추대를 받아 ‘칭기즈칸’의 호칭으로 칸 자리에 오른다. 이걸 칭기즈칸의 1차 즉위라고 하는데 이건 영광의 시작이라기보다는 더 험난한 시련의 출발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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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테무진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였던 자무카부터 칭기즈칸에 등을 돌린다. 자무카와 칭기즈칸은 각각 자신을 지지하는 13개 부대를 편성, 격돌하는데 이걸 ‘13익(翼) 전투’(1190)라고 불러. 이 전투에서 칭기즈칸은 형편없이 패배했고 4년간 수수께끼같은 공백기를 맞게 돼. 금나라로 가 노예 생활을 했다는 말도 있고 심지어 고려 (몽골 사람들은 솔롱고라고 부르는)에 와서 지냈다는 기록도 있어. 그렇게 잊혀질 정도로, 또는 지워 버렸을 정도로 비루한 시간이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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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뒤 칭기즈칸은 금나라 승상의 요구에 응해 자신의 후견인 노릇을 하던 케레이트 부족의 옹칸과 함께 타타르 부족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당시 북중국을 지배하던 금나라는 몽골의 갈등과 내분을 조장하며 몽골 고원을 통제하던 나라였어. 칭기즈칸은 조상의 원수인 금나라의 용병 노릇을 하며 역사에 재등장한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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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칭기즈칸은 다시금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다. 무엇보다 신분과 혈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을 끌어보았지. 자신을 쏘아맞춘 적장이라도 능력이 있고 쓸만한 사람이라면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칭기즈칸의 모습은 초원의 사람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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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전통대로 대학살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살아남은 적대 부족을 노예로 만들지 않고 자신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데 스스럼이 없었고, 개별적 약탈을 금지하고 전리품을 일괄 재분배했으며 전사한 병사의 과부와 고아들에게도 그 몫을 나눠 주는 칭기즈칸. 친구 자무카에 비해 오히려 군사적 재능은 뒤떨어졌다고 평가받지만 노예의 말이든 하급 전사의 말이든 귀기울일 줄 아는 칭기즈칸은 “재능의 천재가 아니라 태도의 천재였다.” (<테무진 투 더 칸>,홍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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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친구이자 숙적 자무카는 옹칸에게 들러붙어 세력을 확
장하는 칭기즈칸을 밟아버리자고 충동질하지. 칭기즈칸은 옹칸의 변덕에 괴로워하면서도 옹칸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 동맹을 제안한다. 하지만 옹칸과 자무카는 이에 응하는 척 하면서 칭기즈칸을 끌어들일 음모를 짰지. 결혼 축하 파티를 기대하면서 무리를 이끌고 오던 칭기즈칸은 또 한 번의 괴멸적 패배를 당한다. (카라칼디즈 사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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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진은 여기서 또 한 번 위대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들의 부하들을 후위에 배치해 추격대를 막고 희생시키고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을 사방으로 흩어 보낸 뒤 자신은 소수의 본대만 이끌고 필사의 도망을 친 거야. “그는 이번에도 사회적으로 그보다 지위가 높고 정치적으로 강력한 사람들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잠든 유럽을 깨웠다> 잭 웨더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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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몽골의 동북쪽 끝이라 할 발주나 호수까지 도망쳤다. 그 주변에 남은 건 굶주리고 지친 열 아홉 명.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신자에 칭기즈칸처럼 샤머니즘의 숭배자까지 뒤섞인 이질적인 집단에 출신 부족도 각각 다른 사람들. 신분의 귀천 따위는 애저녁에 사라진 그들을 앞에 두고 칭기즈칸은 건배를 제안한다. 19명의 사내들 역시 건배에 동참하며 충성을 다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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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을 지경이던 그들에게 술이 있을 리 없었고 그들이 마신 건 발주나 호수의 흙탕물이었어. 이게 몽골 역사의 전환점을 이룬다는 ‘발주나의 맹약’이야. 인류학자 잭 웨더포드는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단다. “친족관계,인종,종교를 떠나 결집한 몽골 민족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개인적 선택과 헌신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 결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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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주나 맹약 이후 칭기즈칸의 군대는 불가사의하게 부활한다. “칭기즈칸과 함께 하고픈 자들은 모여라.” 초원 곳곳으로 전령들이 내달리면서 유장하게 칭기즈칸의 포고를 읊어 내리자 (몽골인들은 문자가 없었다.) 칭기즈칸의 휘하였던 이들은 물론, 칭기즈칸과 싸웠으나 그 통치 방식을 못내 선망했던 부족들도 활을 차고 말에 올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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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을 패주시켰던 “사회적으로 지위 높고 정치적으로 강력한” 사람들을 향한, 거대한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소수’의 연합군이 형성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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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테무진은 초원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던 케레이트 부족의 옹칸과 자무카를 격파한 뒤 또 한 번 칭기즈칸으로 추대된다. 이걸 칭기즈칸의 2차 즉위라고 해. 이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련되고, “칭기즈칸이 원한다며 물불을 가리지 않는” 병사들로 그득한 몽골의 에너지는 유라시아 대륙 사방으로 폭발하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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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강자 및 지배 세력은 지금의 자신을 일군 과정이 성공적이었기에 자신이 지켜온 대로의 관성에 충실하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를 선호할 수 밖에 없어. 또 그게 상당 부분 들어맞을 때가 많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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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서에 저항하는 약자들은 그만큼 탄압받고 때로는 괴멸되기도 하지만 종종 강자들의 질서를 뒤엎는 새로운 시스템의 주인공이 되고,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열기도 한다. 외롭고 약했던 아이 테무진을 세계를 뒤흔든 칭기즈칸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무쇠같은 팔이 아니라 열린 귀였고, 군사상의 천재적 재능이 아니라 “칭기즈칸이 아니라 테무진이라고 불러도 좋다.”던 겸허함이었으며, 검은 뼈니 흰 뼈니 하며 우리 역사의 ‘골품제’처럼 귀한 핏줄 따지던 몽골의 전통을 뒤엎고, 귀족이든 말단 병사든 전리품에 공동의 권리를 주고, 전사자의 아내와 아이까지 챙겼던 리더십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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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한 번 주의깊게 네 주변과 세상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현재 우리를 다스리는 지배적 질서는 어떤 것이고, 누가 이 바위 같은 관성에 혁신의 계란을 던지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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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발견하기 힘들 거야. 앞에서 말했듯 칭기즈칸은 1000년에 한 번 나온 사람이거든. 하지만 칭기즈칸은 별안간 나타난 정치적 군사적 천재가 아니라 당시 몽골 사회가 빚어낸 ‘태도의 천재’였듯,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천재’를 장구한 세월에 걸쳐 길러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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