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사랑 이야기 -<잠깐 동안 봄이려니>를 읽고

in #kr5 years ago (edited)

#산하의오책

사랑방 사랑 이야기 -<잠깐 동안 봄이려니>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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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즐겨 보던 만화 가운데 <사랑방 이야기>가 있었다. 만화가는 김삼이라는 분이었는데 저 유명한 <강가딘>의 작가이시며 <소년 007> 등으로도 줏가를 올리시다가 80년대 말에는 <대물> 등 묘한 성인만화로도 돌았던 분이다. <사랑방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 야사(野史)나 기인(奇人), 설화 등을 재미있게 그린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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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운 선생의 <맹꽁이 서당>이 왕 중심의 이야기라면 <사랑방 이야기>에서 대개 왕은 엑스트라나 조연급에 그쳤다. 그 만화 속에서 나는 ‘옛날 이야기’의 재미에 빠졌었다. 아들 집 개로 태어난 어머니, 무주구천동의 전설, 해학의 명수 임형수 등등 <전설의 고향>과 <역사 스페셜> 휴먼 버전의 절묘한 결합이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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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나는 이 <사랑방 이야기>에 필적하는 책을 손에 쥐고 몇 시간 동안 읽어내리며 낄낄거리고 숙연해지고 머쓱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했다. ‘사랑방의 사랑 이야기’라고나 할까. 이 기특한 책은 <잠깐 동안 봄이려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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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스에서 블로그하고 놀던 시절, 못내 존경의 마음으로 훔쳐보던 ‘초록불의 잡학다식’이라는 이름의 블로그가 있었다. 사학을 전공했으되 판판 놀면서 다른 일만 하고 다녔던 나와는 질적 양적으로 다른 지식들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깔끔한 문장과 정리를 통해 읽는 사람들의 수준을 막론하고 받아먹을 수 있게 해 놓았던, 놀라운 블로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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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동안 봄이려니>는 이 ‘초록불’ 이문영 선생이 들려주는 ‘사랑방 사랑 이야기’와 같다. 그리고 이 사랑방(?)의 주인은 여자다. 가끔 중국 사람도 등장하긴 하지만 거의 한국 여자들이 주인공이다. 사랑 이야기이니 남자도 당연히 나오지만 조연일 뿐이다. 역사를 독차지한 남자들의 굵은 글씨 사이로 주석 같이 달려 있으나, 그 없이는 문장 이해가 불가능한 사연들, 소소하지만 뭉클하고 옛날 일이나 어젯밤 꿈처럼 생생한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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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의 모델이 되는 최용신과 김학준, <사의 찬미>와 함께 현해탄으로 사라진 윤심덕과 김우진, 영화 <박열>로 유명해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유명짜한 러브 스토리도 흥미롭긴 하나 이 책의 진짜 매력은 ‘이런 사람들이 있었어?’하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사랑의 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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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상열지사와 연애지사에 대해서는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지녔다는 자타공인 속에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는 졸저까지 낸 적이 있는 나로서도 전혀 새롭고 신기한 사랑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쳐야 했다. 신문 연재를 근간으로 하다보니 더 풀어놓을 수 있는 사연을 그럼 여기서 이만! 자르는 느낌을 수시로 받았다는 뜻이다. 아마 작가 자신도 안타까웠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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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때 유희춘이라는 사람은 환로가 평탄치 못해 귀양살이를 여러 해 했다. 하지만 총명하고 야무진 아내는 남편의 부재 속에 시댁 봉양은 물론 제사까지 도맡아 했고 귀양지까지 가서 남편을 돌보았다. 뭐니뭐니해도 아내는 똑똑했다. 조선 사람치고 부인보다 나은 남편 찾기 어렵긴 하지만 이 댁은 출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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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멋을 부린 시를 건네자 아내도 시로 답한다. “그대의 시는 과장되어 겸손함이 없으니/ 청정함이 어찌 가을의 소상강물 같을까/젊은 시절 운우의 꿈을 없애 버리니/ 사물에 무심하여 견줄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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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 쓰자면 이런 것이다. “시를 쓰려면 진솔하게 써야지 멋만 부리고 자빠졌네. 강물같이 맑다는 소리 하지도 마셔. 젊은 시절 부부지간 떨어져 지내서 그런가 뭐에도 관심이 없어.” 이 시를 받은 유희춘의 얼굴이 궁금해지지 않는가. 하지만 유희춘은 조선 남자, 수시로 헛된 자랑을 하다 어퍼컷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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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유희춘이 지방관직에 나가 있었던지 떨어져 있을 때, 서너 달 동안 독수공방으로 정절(?)을 지켰답시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내 송덕봉은 이렇게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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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은혜를 베푼 것처럼 자랑했는데 참 감사합니다. (이 ‘참 감사합니다’를 ‘아내체’로 읽으시오) 당신이 몸을 닦은 것은 성현의 가르침을 따른 것인데 (맨날 공자왈 맹자왈 하더니!) 아녀자인 제게 보답을 바라시는 건가요? (생략: 이 화상아) 당신은 인의를 지키는 척 하면서 남들이 알아주는 병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겉 희고 속 검으면서 흰 거 자랑하는 속물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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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해도 허허 웃어 넘길만 하지만 이 송씨 부인은 끝내 조선 남자의 심장에 말뚝을 박는다. “당신은 이미 나이가 많으니 혼자 자면 건강에 좋은 것입니다. 제게 생색낼 일이 아닙니다.” (나이를 생각해. 뼈 삭어 이 인간아.) 이런 편지를 받고 남자는 이렇게 평한다.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감탄을 금할 수 없도다.” 숨막혔던 가부장제 하에서도 이런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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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 사극을 꿈꾸는 기획자가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보아야 할 것 같다. 영화 같은 소재와 대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율곡 이이의 플라토닉 러브. 이황과 이이는 조선 역사의 양대 산맥이긴 하지만 둘은 한 세대 차이가 나서 서로 친교를 맺거나 라이벌 의식을 가질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의 입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내가 들은 얘기 가운데 이런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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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제자들이 어느 스승이 더 성현의 가르침에 충실한가를 논쟁하는 와중에 두 사람의 잠자리를 엿보기로 한다. 우리 스승님은 거의 성인이시니 잠자리 또한 그러하리라... 여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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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방을 엿본 율곡의 제자들은 기고만장했다. “우리 스승님은 우리 같지 않게 방사(房事)도 그럴 수 없이 점잖게..... 엄숙히 치르시더라.” 이 말을 들은 퇴계의 제자들은 우리 스승님은 점잖음을 넘어 거룩하시리라 기대하고 퇴계의 방을 엿보았는데 아 글쎄 별의별 체위가 동원되는 가운데 질풍노도가 일어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우리 스승님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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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제자들이 볼멘 소리로 율곡은 그러던데요 하니 퇴계가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율곡은 후사가 드물 것이다. 남녀가 어우러짐은 자연의 이치이고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는 것인데 거기에 예를 차리면 어이 땅에 초목이 자랄 것인가.”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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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스개 소리로 넘기면 되는데 나는 이 책에서 뜻밖에도 이 이야기가 마냥 근거없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율곡이 황해도 관찰사를 지낼 때 유지라는 황주 기생을 알았다. 역시 총명하고 아리따운 기생이었지만 율곡은 단지 귀여워하고 아낄 뿐 여자로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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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율곡이 나이가 들고 당쟁에 지쳐 벼슬에서 물러나 황주의 누나 집을 방문했을 때 유지가 달려왔다. 처음 만났을 때 유지는 십대의 동기(童妓)였지만 이제는 원숙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율곡은 크게 반가워하면서도 선은 넘지 않았다. 다시 황주를 떠나던 밤, 유지가 율곡의 방에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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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의 명성은 온 나라 사람이 흠모하고 있는데 저같은 기생이겠습니까. 하물며 여색에도 무심하시니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헤어지면 영원히 이별일 거 같아 찾아왔다 하니 율곡도 방에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부자리를 펴고 함께 누웠지만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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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 물었다. “너를 품지 않아서 서운치는 않더냐.” “나으리의 깊은 학문을 사모하는 것이니 그런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뭐 이건 알퐁스 도데의 별도 아니고 말이지. 율곡은 이 사연을 스스로 적어 두었고 (자랑일까 후회일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새삼 조선판 플라토닉 러브의 지존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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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이 이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지천이다. 조선판 ‘마틴 기어의 귀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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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불화로 집을 나가 버렸던 남자가 집에 돌아왔다. 간만에 돌아온 남편을 부인이 자기 남편이라고 주장하고 그 시누이, 즉 남편의 누이들의 식구들도 그렇다고 하는데 남편의 동생은 도무지 자기 형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가에 고했는데 별안간 부인이 울면서 고한다. “동생이란 자가 제 남편을 해치고 어딘가로 감춰 버렸습니다.” 시누이의 가족들이 거기에 동조하면서 남편의 동생은 그만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돼 버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16년 뒤 다른 곳에 숨어 살전 진짜 남편이 사연을 듣고 분기탱천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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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인즉슨 부인과 시누이 가족이 재산을 노리고 서로 짜고 벌인 일이었다. 불쌍한 남동생만 죽어 버린 것이었다. 남편의 매부, 즉 시누이의 남편은 죄를 쓰고 죽었고 남편도 숨어 살면서 아버지 상도 치르지 못한 죄를 물어 유배를 가는데 부인은 무사했다. 그 친정의 세도가 당당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명목은 공모 정황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이 사연을 후세에 남긴 건 오성 이항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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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재나 퓨전 로맨틱 사극 아이템을 찾는 분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 보시라. 아이템의 보고라 하겠다. 함경도 기생 홍랑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대하 드라마고 586이 어렸을 때 보고 몸살을 앓았던 ‘어우동’과 ‘깜동’의 이야기는 다시 보아도 흥미롭다. 남녀의 성기를 두루 갖춘 사방지의 일화는 그야말로 폭소와 경이의 대상이다. 상록수의 연인들, 그리고 안창호의 아내 이혜련,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가 남편을 선택한 후 겪어야 했던 삶을 읽으며 경건해지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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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인 3월 8일 ..... 한국의 여성들의 삶, 그리 잘나지 못했던 한국 남자들의 거드름 아래에서도 민들레처럼 피어났고 때로는 죽창처럼 날카로웠고 질경이처럼 끈질겼던 여성들의 삶을 목도하시려면 이 책을 보시기 바란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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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anha88님

랜덤 보팅!!

소소하게 보팅하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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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